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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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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264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8.04 08:58
조회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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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1쪽

그믐_근원을 향한 환영

DUMMY

초록빛 결계 속,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나무가 쿨렁거렸다. 나뭇가지를 흔들며 나를 불렀다.


‘신령수 동명님?’

소리치고 싶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뭇가지가 끄덕여 대답하는 것 같았다.


‘촤르르 쨍.’

금속성의 리듬에 맞추어 눈앞은 동녘뜰이 되었다.


멀리 사빈재가 보였다.

들어가고 싶었지만, 내 몸은 동녘뜰에서 멀어졌다.


순식간에 볕밭이 되었고, 나는 빙글빙글 우주를 떠돌았다.


우주의 기운이 뿌옇게 번져가며 날개를 펴듯 내 앞으로 다가왔다. 빛도 어둠도 뭉그러져 별 가루마저 색을 잃었다.


차원의 경계를 본 적 없지만, 그곳이 경계임을 알 수 있었다.

경계는 단단한 장벽이 아니었다. 물컹거리는 장막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 장막 너머 빛 덩어리가 보였다.

거대한 알인데, 그 속에 또 다른 빛알이 있었다. 어미가 새끼를 품은 것처럼 소중하게 감싸고 있었다.


‘저건 뭐지? 다른 차원의 것인가?’


빛 덩어리에서 한 줄기 빛이 스며 나왔다. 가느다란 빛줄기는 짙은 어둠 속 한 곳을 가리켰다.

나는 그 빛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나무가 하얗게 빛났다.

내 키만 한 작고 여린 나무였다. 껍질도 없이 하얗게 빛나는 가지에 노란 잎이 피어났다.


노란 잎은 붉어졌다가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이윽고 검은 잎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잎이 떨어진 자리에 다시 노란 잎이 피어났다.


‘허공에 나무가 자라다니. 이거··· 환상이구나.’

환상이라면 즐겨야지.


갤럭시의 연주는 끊이지 않았다. 웅장하고 아련하며, 슬프고 아름다운 음악이 우주에 가득 찼다.


검은 잎 하나가 둥둥 떠올랐다. 나는 검은 잎을 따라 우주를 헤엄쳐갔다.


붉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자 검은 나뭇잎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뿌옇게 흩어진 별 가루 구름인데, 붉고 커다란 구슬로도 보였다.


드럼 소리와 함께 둥둥거리는 신음이 들렸다.


나는 어느새 중천에 서 있었다. 마른 흙이 바람에 흩날렸다.


‘목이 말라. 누구 없어요?’

중천이 들썩거렸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 안의 혼들이, 비뢰수와 고사목이 함께 신음했다.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 서방백제 영랑이 앉아있었다.


그녀는 하얀 깃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크고 하얗고 윤기가 흘렀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날개였을 것이다.


사막이 종이책처럼 넘어가고 어둠이 드러났다.


어둠 속 허공에 마백북존 마눙이 누워있었다. 그는 깊이 잠들어있었다.


가슴에 뚫린 구멍 때문에 자면서도 괴로워했다. 차라리 소멸하고 싶어 하는 그의 소망이 주위에 가득했다.


그래도 신제는 사라지지 못 하는데···. 잠든 마눙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 한 방울이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눈물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둠 속에 상산대감 백하가 서 있었다.


‘대감! 대감!’

소리쳐 불렀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움직이지 못하고 서서히 돌이 되어갔다. 완전히 어둠에 묻혀버렸다.


어둠이 모든 빛을 삼켰다. 빛과 어둠, 눈앞의 모든 것이 하나로 뒤엉켰다.

처음처럼 색도, 모양도 없이 모든 것이 하나로 섞여 혼란스러웠다.


어지럽게 돌던 소용돌이가 후두두 일어서더니 거대한 괴물이 되었다.

형체도 없는 괴물이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


“헉!”

번득 눈을 떴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눈을 떴는데도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보였다.


‘여기···, 여기가 어디야?’

찌릿거리는 통증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꿰뚫고 지나갔다.


“정신이 들어?”

가온의 목소리였다.


“가온···?”

“어딘 어디야. 병원이지. 연주는 조금 전에 끝났어. 사람들도 돌아갔고.”


가온은 내 어깨를 잡아 똑바로 앉게 해주었다.

그녀는 물을 내밀었다. 처음 파라다이스 빌라에 갔을 때 마셨던 푸른 물이었다.


“하륜님이 챙겨줄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이럴 줄 알았어.”


가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히 말해주면 안 되나? 이 물이 필요할 거예요. 딱 이 말만 했다니까.”


나는 인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입술을 벌리기도 힘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컵을 쥐고 간신히 한 모금 삼켰다.


“동명님의 결계에서 떠온 물이야. 기력이 돌아올 거야.”

“동명님?”

조금 전 환영에서 보았던 그 초록의 결계. 거기가 신령수 동명의 결계일 거야.


“수명환은 네가 먹어야겠다. 대체 천력이 얼마나 사라진 거야?”

“조금?”

웃으려 했지만, 얼굴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조금··· 많이.”

정말, 왜 이렇게 힘이 없지?


그나저나···, 갤럭시의 연주는 근원을 건드린다며?


왜 환영만 보여주지? 우주 한가운데 나무와 구슬이 있다니, 말이 돼?

뜬금없이 상산대감은 왜 나오고? 마백북존은 왜 그렇게 아프고 슬퍼 보인 거야?


“괜찮아?”

가온이 내 어깨를 주물렀다.


“나도 그랬어. 처음 갤럭시의 연주를 들었을 때. 담아가 아니었다면 못 깨어났을 거야.”

“그 환영들···. 그거 진짜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난 잃어버린 기억을 봤거든. 심지아는 현재와 가까운 미래를 봤다고 했어. 어떨 때는 상징이나 기호로 보여준대.”


“다행이다. 진짜가 아니구나.”

백하가 돌이 될 리 없지.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바나는 내 옆에서 쿨쿨 자고 있었다.

‘그래, 너라도 편하게 지내야지.’


“오늘은 밤새도록 옆에 있어줄게. 너 정말 천력이 많이 사라졌어.”

“그래도 돼?”


“물론! 저녁에, 야식에, 내일 아침까지 준비했다니까.”

가온은 활짝 웃으며 바닥에 내려놓은 바구니 뚜껑을 탁탁 건드렸다.


함께 웃고 싶었지만, 힘이 달려 웃지 못했다.


*


그믐의 외출에서 앓아누운 것은 처음이다.

사고로 꼼짝 못 한 적은 있지만, 누워서 끙끙 앓다니, 다른 마고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가온의 술법으로 옥탑방은 아날빛숨의 아롱재와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멀뚱멀뚱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가온은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신령수의 우물 덕분에 많이 회복되었는데···.


“내일도 일해야 하잖아? 마음숲으로 돌아갈 천력은 남겨둬야지.”

“그러게. 돌아가는 것도 걱정하다니. 어쩌다 이렇게 되었담?”

“어리화 때문일 거야.”


가온은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옥탑방이어서인지 하늘이 바로 보였다. 별이 희미하게 하늘에 박혀있었다.


“가온, 다음 마고에 대해 뭐 좀 찾았어?”

병원에서 은서와 만났을 때도 별말이 없었다. 찾았다면 보자마자 알려주었을 텐데.


“아직은. 그래도 뭔가 나올 거야. 은서가 이귀와 정령들에게도 일러놨다니까.”

“뭐라고 부탁했대?”


“이귀가 아닌 순수한 혼이면서 특이한 기운이 있으면 무조건 알려달라고. 소재를 찾을 때 주로 쓰는 방법이라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거야.”


가온은 술법으로 차를 데워 내게 건넸다.

“마고가 바뀔 때라고 알려지면 큰일이잖아. 피천귀가 들을지 모르는데.”


“그래.”

더는 말하지 않았다. 반계에서는 이미 알아냈을 텐데.


불천수로 나오라던 부름이 생각났다. 알기에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닐까.


밤하늘의 별을 보니 가온의 소품샵에서 보았던 보름달이 생각났다.

“요정 조각은 잘 있어? 가끔 생각나더라. 네가 만들어준 보름달과 바닷가.”


“응. 빛결님이 깨어날 때까지 나빌라들이 잘 지킬 거야.”

“그 요정들, 정말 하나도 남지 않았어? 다 사라졌어?”


“그럴 거야. 그래서 빛결님이 영혼수집가가 되었으니까. 그건 왜?”

“하나라도 남았으면 좋을 것 같아서···.”


나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벽에 기대앉으니 버틸 만했다.

“이번에도 잘 끝내고 싶었는데···.”


“어허, 넌 충분히 잘하고 있어.”

가온이 눈을 부릅떴다.


“마음숲에서의 나와 인간세에서의 나는 같은 사빈일까? 내가 생각해도 너무 달라.”

“에고, 그건 나도 똑같아요, 마고님.”

가온이 키득거렸다.


“천계의 심부름꾼 가온과 사람처럼 꾸미고 차원의 문을 지키는 가온은 전혀 다르잖아? 인간세 사람들 다 그래. 안에서와 밖에서의 모습이 달라. 가면이 몇 개씩 있을걸?”


“하긴, 너나들이도 많이 다르더라.”

은서 앞에서 무게를 잡던 단가람이 생각났다. 목소리와 말투, 눈빛과 움직임도 달랐다.


그럼, 예언 속의 ‘넋과 몸 사이를 서성이는 이’는 마음숲의 사빈일까, 인간세의 사빈일까.


“가온, 혹시 천사장님이 알려준 예언 기억나?”

“천사장님이?”


가온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꽃이 태어나면 넋과 몸 사이를 홀로 서성이는 이가 잃어버린 조각을 찾으리라. 그거 말이야?”

“응. 현원님은 검은 꽃이 어리화라고 하셨어. 넋과 몸 사이를 서성이는 이는 중간자라고.”


가온이 으흠 소리를 냈다.

“그럴 수도···.”


그녀는 내 손목을 살짝 잡았다. 검붉게 바뀐 어리화가 보였다.

“그 때까지 못 찾는 거네? 다음 마고를 찾으면 무늬가 사라진다니.”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예언 속의 존재라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창밖을 내다보자 가온도 깜빡이는 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가온의 사색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내 팔을 세게 때렸다.

“어허! 예언을 혼자 다 차지하려고?”

“응?”


“인간세를 생각해 봐. 성벽을 누가 쌓았냐고 물으면 왕의 이름을 대잖아. 하지만, 왕이 돌 한 조각이라도 날랐겠어?”


“맞아. 일꾼들이 쌓았지.”

“그리고 그들이 성을 쌓는 동안 생계를 위해 집안을 꾸린 가족도 있고.”


가온은 바구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내 입에 넣어주었다. 하나를 더 꺼내 자기 입에 넣었다.


“인간세를 이끄는 건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야. 예언도 마찬가지야.”


사탕을 오물거리며 가온이 내 손을 잡았다.


“그 존재가 중심일 거야. 많은 이를 끌어당기는 힘. 핵심은 되지만, 다른 이들의 힘이 훨씬 많이 필요하다고.”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빛냈다.

나도 모르게 바짝 긴장되었다.


“그래서 말인데, 백하야, 한얼이야?”

“엥? 무슨 말이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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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천계_돌아온 온사랑 23.08.08 46 3 13쪽
114 천계_살아있는 환상 23.08.07 45 3 11쪽
113 천계_가시버시 축제 23.08.06 45 3 11쪽
112 그믐_수명환의 활약 23.08.05 46 3 11쪽
» 그믐_근원을 향한 환영 23.08.04 44 3 11쪽
110 그믐_그룹 갤럭시의 연주 23.08.03 44 3 10쪽
109 그믐_인연 연결자 +2 23.08.02 46 3 11쪽
108 그믐_숨은 후원자 +2 23.08.02 46 3 11쪽
107 그믐_외길과 산돌 23.08.01 42 3 12쪽
106 그믐_나무새가 찾는 주인 23.07.31 42 3 11쪽
105 그믐_하이브리드 인간 23.07.31 43 3 12쪽
104 그믐_사라남 종합병원 23.07.30 44 3 11쪽
103 예사달_몸은 없어도 마음이 있다 23.07.29 43 2 12쪽
102 예사달_다움성의 초대 23.07.29 43 4 11쪽
101 예사달_한얼이라 부르게 23.07.28 42 3 12쪽
100 예사달_신령수 동명 +2 23.07.28 46 3 11쪽
99 예사달_제자를 들이다 23.07.27 42 2 11쪽
98 예사달_빙천골 능금원 23.07.27 44 2 12쪽
97 예사달_불천수 전투 23.07.26 45 2 11쪽
96 예사달_다훤과 만나다 23.07.26 45 2 11쪽
95 예사달_경계의 떠돌이 23.07.25 44 2 11쪽
94 천계_남아있는 향기 23.07.25 43 2 12쪽
93 천계_동녘뜰 사빈재 23.07.24 43 2 11쪽
92 천계_다움성 온새미실 23.07.23 44 2 11쪽
91 천계_새로운 소식 23.07.22 4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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