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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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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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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52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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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3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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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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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그믐_그룹 갤럭시의 연주

DUMMY

작은 새들이 과자를 깨끗이 해치웠다. 먹을 것이 떨어지자 한 마리 두 마리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이로운은 연필을 쥔 채 황홀한 눈으로 새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작아도 이렇게 많으면 무서울 텐데, 소리도 내지 않고 뚫어질 듯 지켜보았다. 종이가 아니라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다.


“로운아, 앞으로도 계속 그림 그리고 싶어?”

“예.”

이로운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람이한테 장난감도 만들어주고 싶어요.”

“다른 아이들처럼 건강하게 뛰어놀고 싶지?”


로운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그렇다면!”

나는 가방에서 조그만 망고 주스를 꺼냈다. 아침에 편의점에서 산 것이다.


다른 주스와 다른 것이 있다면 안에 수명환이 녹아있다는 것 정도?


“이거 다 마시고 한숨 푹 자면 내일부터 조금씩 건강해질 거야.”

“에이, 누나. 그런 거짓말이 어딨어요?”


“왜? 못 믿겠어?”

춤사위를 펼치듯 모여든 새들을 가리켰다.

산으로, 나무 위로 날아가고도 산책길에는 여전히 이십여 마리가 남아있었다.


“진짜예요?”

“그럼.”


로운은 주스를 빼앗듯 가져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단숨에 주스를 다 마셨다. 벌컥벌컥,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자고 나면 나와 만났던 일도 깨끗이 지워질 것이다.


치료 효과가 뒤늦게 나타난 특이체질이라거나, 기적처럼 활성도가 좋아졌다거나 그런 이유를 둘러대겠지.


‘첫 번째 임무 성공. 다음에는 온결찬이다!’


*


온결찬을 시험하려면 일단 온결찬을 찾아내야지.


병실을 기웃거렸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돌아다니는 거야? 혹시 도서실에 갔나?’


오샘차라는 오후에 출근한다고 했는데? 그럼 단가람한테 가볼까.


단가람이 있는 411호는 반대편 복도를 따라가면 된다. 간호사실 앞을 지나 통로로 들어섰다.


병실 사이 좁은 복도를 지나는데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왔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지러웠다. 온몸에 가시가 박힌 듯 따갑고 아팠다.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댔다.

몸이 추웠다가 뜨거워지며 몸속의 모든 장기가 뒤집힐 듯 울렁거렸다.


‘너는···,’

머릿속에 소리가 웅웅거렸다.


‘너는 나를 지울 존재구나. 그 전에 없애주마.’

뭐지? 웅웅거리던 소리가 또렷해졌다.


‘당신 누구야?’

‘죽을 목숨에게 알려줄 이유 없다.’


소리의 주인이 내 힘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고의 기운이, 내게 남은 천력이 조금씩 흘러나갔다.


‘약하긴 해도, 이 정도면··· 나를 되찾겠군.’

웅웅거리던 소리가 크크큭 기분 나쁜 웃음으로 바뀌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데, 어떤 투명한 기운이 나를 감쌌다.


다정하고 포근했다. 아기처럼 어머니의 품에 안긴 느낌이었다.

따뜻한 기운이 스며들자 의식도 서서히 돌아왔다. 어지럼증도 사라졌다.


귓가의 소리가 빼애액 갈라졌다.

‘제길, 수호자가 있었어?’


소리는 아득히 멀어졌다.

‘안심하지 마라. 내가 너를 먼저 찾아낼 테니.’


나는 봄 햇살 같은 기운에 싸여 일어섰다. 눈꺼풀은 붙은 것처럼 뜰 수 없었다.

‘당신은··· 누구죠?’


‘네가 나를 살렸으니, 지켜주마. 때가 되면 만날 것이다.’

조그맣고 맑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눈을 떴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하얀 벽이었다.


내 몸을 살펴보고, 남아있는 천력도 가늠해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뭐지? 꿈인가?’


몇 걸음 걸으니 생생하던 느낌이 희미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걸으면서도 꿈을 꾸다니 인간세에는 별일이 다 있구나.


*


곧 그룹 갤럭시의 미니 콘서트가 시작된다. 온결찬은 미뤄두고 연주부터 들어야 해.


정원에 내려와 보니 한쪽에 온결찬이 떡하니 앉아있었다.

옆자리에 책을 올려놓고 한 자리 더 맡아 놓았다. 오샘차라를 위한 자리겠지.


나도 근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그가 아니라 갤럭시의 연주를 들을 때였다. 해밀의 차원에서 넘어온 음악을 언제 또 듣겠는가.


“오셨어요? 사빈님?”

바우의 목소리였다.


빌라의 다른 식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은서님은요?”

“만화방에요. 알바 시간이거든요.”


“가온은 안 오나요?”

“콘서트 끝나면 오실 거예요. 오늘 오후는 임시휴업이래요.”

바우가 재미있어하며 배시시 웃었다.


“장사보다 친구가 먼저라고요.”

“아, 아하.”

뭘 그렇게까지. 하긴, 가온이 마음숲에 온다면 나도 그럴 테지만.


“너무 기대돼요. 해밀의 차원이라니!”

나의 칭찬에 바우는 눈썹을 움찔거렸다.


굳은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조심하세요. 차원을 넘어온 음악은 근원을 느끼게 하니까요.”


그의 경고에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언젠가 가온도 같은 말을 했다.


‘좋아, 근원이 무엇인지 부딪쳐보겠어.’

나는 자리에 앉아 악기를 맞춰보는 바우와 다른 갤럭시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형! 나 이거 해줘요.”

바로 앞에서 꼬마 아이의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가니 네 명의 아이가 온결찬 앞에 모여 있었다.

이로운보다 한두 살 어려 보였다. 아이들 손에는 색종이 뭉치가 들려있었다.


“또?”

“나 공룡요.”

“난 가면 전사!”

“너희도 잘하잖아?”


“내가 하면 안 멋져요. 형이 해줘요.”

“공연 보고 같이 만들자. 곧 시작할 거야.”


“진짜죠?”

한 아이가 온결찬 옆에 앉았다. 다른 아이가 겨루듯 다른 쪽 옆에 앉았다.

작은 벤치에 온결찬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두 명씩 아이들이 끼어 앉았다.


‘저런! 연인의 자리가 없어졌구나.’

나는 곤란해 하는 그의 표정을 보며 킥킥 웃었다.


그래도 그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밥은 잘 먹는지, 약은 시간 맞춰 먹는지, 운동은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우웩, 약 써요.”

“잘 먹어야 빨리 나아. 그래야 뛰어놀지. 학교도 가고.”

“학교 가면 시험 봐야 하잖아요? 시험도 싫고, 병원도 싫어요.”

“다 나쁜 건 아니야.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니 내 결심이 옳았다. 어떻게 수명환을 건네느냐 이것만 남았네.


“왕왕, 주인님!”

발밑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바나는 벤치로 폴짝 뛰어올라 내 옆에 앉았다.


“벌써 왔어? 삽살이는?”

“삽살이가 빨리 가보라고 해서 왔어라. 괜찮으셔라?”

“괜찮지 그럼.”


“다행이어라. 주인님을 노리는 사악한 기운이 있다고 했어라.”

바나는 내 허벅지에 턱을 올리고 엎드렸다.


“아무 일 없는데? 맞아. 아까 복도를 걷다가 악몽을 꿨어.”

“왈, 걸으면서도 꿈을 꾸어라?”

바나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부터 주인님을 지키겠어라.”

“그래라.”

바나의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조금 안심이 되었다. 어쨌든, 한얼과 백하의 천력을 받은 강아지니까.


‘나를 노리는 사악한 기운···.’

그것도 어리화 때문일까.


현원님은 꽃이 완전히 검어질 때까지 다음 마고를 못 찾을 거라고 하셨다.

마음에 위로는 되지만, 마고의 기운이 약해지니 두려웠다.


*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파고라와 벤치에 환자와 가족들이 앉았다. 창문으로 내려다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오샘차라는 내 옆에 앉았다. 온결찬 옆에 꼬마들이 있는 것을 보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저분, 꼬마들한테 인기가 많나 봐요?”

“예. 할머니, 할아버지들한테도 인기 많아요.”

“성격이 좋은가 보네요.”


“예. 깨끗하고 맑아요. 사람도 착하고.”

오샘차라가 가늘게 눈웃음을 지었다. 깨끗하고 맑기로는 그녀도 만만치 않은데.


‘띠링.’

전자기타가 줄을 튕겼다.


무대 뒤편에 앉은 바우가 스틱을 휘둘렀다. 두두두둥 탁.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드디어···. 해밀의 차원에서 온 음악을.


첫 음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가슴을 설레게 하면서 뜨겁게 데웠다.


다른 사람들은 여유롭게 듣고 있었다. 이렇게 다른데?

‘아··· 사람의 귀에는 안 들린다고 했지. 이 깊이를 못 느끼겠구나.’


첫 곡은 마음숲처럼 평온하고 잔잔했다. 눈앞에 마음숲이 펼쳐졌다.


아날빛숨과 위즐증가, 산과 강, 개울을 따라 걷는 수많은 혼.

나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토록 그리운지. 가슴이 시큰거리고 아련했다.


두 번째 곡을 시작할 때까지 내 마음도 평온했다.


연주가 이어지며 세상이 뒤섞이고 혼란스러웠다. 색도, 모양도 모든 것이 하나로 섞였다.

그 혼돈 속에서 빛과 어둠이 나타났다.


그들의 음악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내게 보이는 세상이 달라졌다.


적막하고 고요하다가 갑자기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천계가 태어났고 선계도 만들어졌다.

천인과 선인이 나타나자 별이 만들어졌다.


별은 부풀어 오르다가 궤도를 벗어나 퉁겨졌다.

여기저기서 터지고, 부딪히며 폭발했다. 굉음과 함께 잔해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시간이 멈춘 듯 미동도 없이 멈추었다.


‘사빈아, 네게 보여줄 것이 있다.’

누군가 나를 불렀다.


넓고 싱그러운 초록의 결계였다.


끝도 없는 숲 사이로 투명한 강물이 천천히 흘렀다. 아름드리나무 사이로 그물코 같은 하늘이 비쳐 보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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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천계_기록추적자 23.08.11 4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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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천계_돌아온 온사랑 23.08.08 46 3 13쪽
114 천계_살아있는 환상 23.08.07 45 3 11쪽
113 천계_가시버시 축제 23.08.06 45 3 11쪽
112 그믐_수명환의 활약 23.08.05 46 3 11쪽
111 그믐_근원을 향한 환영 23.08.04 43 3 11쪽
» 그믐_그룹 갤럭시의 연주 23.08.03 44 3 10쪽
109 그믐_인연 연결자 +2 23.08.02 46 3 11쪽
108 그믐_숨은 후원자 +2 23.08.02 46 3 11쪽
107 그믐_외길과 산돌 23.08.01 42 3 12쪽
106 그믐_나무새가 찾는 주인 23.07.31 42 3 11쪽
105 그믐_하이브리드 인간 23.07.31 43 3 12쪽
104 그믐_사라남 종합병원 23.07.30 44 3 11쪽
103 예사달_몸은 없어도 마음이 있다 23.07.29 43 2 12쪽
102 예사달_다움성의 초대 23.07.29 43 4 11쪽
101 예사달_한얼이라 부르게 23.07.28 42 3 12쪽
100 예사달_신령수 동명 +2 23.07.28 45 3 11쪽
99 예사달_제자를 들이다 23.07.27 42 2 11쪽
98 예사달_빙천골 능금원 23.07.27 44 2 12쪽
97 예사달_불천수 전투 23.07.26 45 2 11쪽
96 예사달_다훤과 만나다 23.07.26 45 2 11쪽
95 예사달_경계의 떠돌이 23.07.25 44 2 11쪽
94 천계_남아있는 향기 23.07.25 43 2 12쪽
93 천계_동녘뜰 사빈재 23.07.24 43 2 11쪽
92 천계_다움성 온새미실 23.07.23 44 2 11쪽
91 천계_새로운 소식 23.07.22 4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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