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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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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201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7.2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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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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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예사달_경계의 떠돌이

DUMMY

우주의 가장자리는 죽은 듯 살아있었다.

고요하다가도 갑자기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별이 부풀어 오르다가 궤도를 벗어나 퉁겨졌다. 한순간에 터지거나 다른 별과 부딪혀 폭발했다.


굉음과 함께 잔해가 빛의 속도로 퍼져나갔다. 다음 순간,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멈추었다.


두 번째 대혼란으로 공간과 시간이 뒤틀리며 경계가 뒤섞여갔다.

천계와 선계는 서서히 안정을 찾았지만, 다섯 성천을 둘러싼 일부분뿐이었다.


적막한 잔해 위로 청록색 구슬이 떠다녔다. 누군가의 눈이었기에 핏줄과 힘줄이 달려있었다.


구슬은 가장자리를 떠돌며 우주의 정기를 빨아들였다.


우주에는 천인과 선인들의 기운이 흩어져 있었다. 두 번의 대혼란을 지나며 신장들의 혼 조각도 떠다녔다.


모든 것을 삼키며 구슬은 점점 뿌연 덩어리가 되어갔다.

둥근 구슬은 운기 덩어리로 스며들었다. 연한 청록빛만이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보여주었다.


청록빛 덩어리는 경계를 따라 떠돌며 차원의 기억을 읽기 시작했다.


우주의 기운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차원의 모든 대기 속에, 별이 서로를 끌고 당기는 힘 속에 기억 조각이 담겼다.

어떤 기억인지도 모르면서도 기억의 파편을 머금었다.


*


운기 덩어리가 한 곳에 멈추었다.


고요 속에서 별의 잔해가 기억을 버리고 있었다. 버려지는 기억 속에 한 남자가 있었다.


검은 머리와 덥수룩한 검은 수염의 남자는 눈을 감은 채 쓰러져 있었다.

그의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새하, 이제 그대를 지켜주지 못하는구려.’

행복한 순간을 회상하는지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마고의 소임이 끝나면 소명원에서 함께 살고 싶었는데···.’

남자는 허상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한 여자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모습이 있으나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사람의 혼이었다.


그녀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눈빛은 그를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했다.

‘지금부터 함께 있어요. 영원히.’


여자의 몸이 순식간에 둥그렇게 뭉그러졌다.

그대로 남자의 가슴으로 들어가 구멍을 채웠다. 붉은 심장이 생기고 새살이 돋아났다.


초록빛 운기 덩어리는 쿨럭거리며 몸을 떨었다.

혼 덩어리가 모습을 갖고, 다른 이의 심장이 되다니.

‘나도 모습을 갖고, 또 몸을 버릴 수도 있겠구나.’


남자의 가슴에 작은 씨앗이 하나 생겨났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번 기억 조각은 거기서 끝났다.


다른 장면은 다른 조각에 남았을 것이다. 어디로 흩어졌는지 모를 곳에. 아니면 어디에도 없거나.


*


그 자리를 떠나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여갔다. 별의 궤적을 따라 과거와 현재, 우주의 모든 것을 알아갔다.


‘어이, 친구!’

부르는 소리에 운기 덩어리는 멈추어 섰다. 이곳에는 나를 부를 존재가 없는데.


덩어리를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조각에 담긴 기억이었다.


한 남자가 다른 이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다. 백록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바지와 저고리는 푸른빛과 흰빛이었는데 그와 잘 어울렸다.


몸집이 크고 얼굴이 동글동글한 여자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양쪽 볼에 보조개가 깊이 파였다.

‘마눙, 또 흰색이야? 네가 서방백제를 맡으면 좋을 뻔했네.’


운기 덩어리는 그 여인을 보고 몸이 굳었다.


여인의 눈이 자신과 똑같았다.

기억의 파편에는 양쪽 눈이 다 있는데, 그중 오른쪽 눈이 자신이었다.

‘내가 저기서 나왔구나. 저 여자는 누구지?’


기억 속 장면은 계속되었다.

‘진정한 미인은 색을 가리지 않아. 영랑을 봐. 무슨 색이든 잘 어울리잖아.’


커다란 날개를 가진 여인이 다가왔다.


풍성한 날개가 바람에 살랑였다. 희고 찰랑이는 머리카락과 뽀얀 날개가 그녀를 더 우아하게 만들었다.


‘같은 알에서 나왔으니 다 똑같아. 남방홍제도, 중앙황제도 우리 선택은 아니지만, 모두 어울리는 자리를 받았어.’


‘이제부터 천인과 선인이 태어날 거야. 그들을 위해 터를 닦아야지.’

몸집이 큰 여인이 씩씩하게 외쳤다.


‘좋아. 각자의 성천을 꾸민 후 서로를 초대하자. 바람길을 따라 순서대로.’

남자가 말하자 날개를 가진 여인도 손을 들었다.


‘그럼, 바람길 연회라고 하면 되겠어.’

‘좋아. 남방홍천부터 시작하지. 다음에는 천시원으로 오라고.’

‘천시원?’

‘응. 내가 살 곳이야. 이름부터 정해놨어.’


‘난 다움성이라고 지을 거야. 이루와 전욱에게도 알려야지. 그들도 연회에 초대할 거니까.’

‘좋지!’

남자는 껄껄 웃었다.


날개를 가진 여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조각의 기억이 거기서 끝났다.


청록빛 운기 덩어리는 그렇게 세상의 규칙과 질서를 배워나갔다.


두 번의 대혼란이 얼마나 흉폭했는지도 보았다.

‘첫 번째 대혼란을 숨가림, 두 번째 대혼란을 미틈오름이라 부르는구나.’


덩어리는 파편 속 신제들이 하던 말을 되풀이했다.

‘미틈오름이 끝났어도 끝난 것이 아니다. 끝났어도··· 끝난 것이 아니다. 끝난 것이 아니다.’


숨가림과 미틈오름 시기를 거치며 우주의 많은 기억이 송두리째 지워졌다. 그 자리에 점차 새로운 기억이 들어섰다.


자신이 중앙황제 현원에게서 온 것도 알았다.

북방흑천의 가슴에서 씨앗이 자라 아기가 되어가는 것도 보았다.


‘저들은 나와 인연이 깊구나. 언젠가 만나겠지.’

운기 덩어리는 조금씩 미래를 예견하는 방법도 터득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오래된 기억 하나와 마주쳤다.


*


다섯 신제가 소명원 회의실에 모였다. 미틈오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중앙황제의 오른쪽 눈에는 황금빛 안대가 얹어졌다. 서방백제의 날개는 반 이상 잘려 나갔다.

마눙의 가슴 한가운데 구멍이 뚫렸지만, 옷으로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루의 왼쪽 팔은 사라지고 빈 소매가 풀럭거렸다. 오로지 전욱만 멀쩡했다.


“결국 수리마루는 나타나지 않았어. 두 번이나 세상이 뒤집혔는데! 신은 뭘 하는 거지?”

이루는 탁자를 내리쳤다.


“수리마루 정명이 진짜 있기는 해?”

이루가 소리치자 전욱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진정하게. 어쨌든 미틈오름은 지나갔어.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갈 테고,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


창가에 기대 있던 마눙이 외쳤다.

“그건 자네 소망이지! 우리는 몸의 일부를 잃었어. 그런데 자네만 멀쩡하지.”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구멍 위로 옷자락이 펄럭였다.

“신의 축복을 받아서? 그러니 수리마루를 믿고 싶겠지?”


“이건···.”

전욱은 말하려다 말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보물을 쓰다듬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대혼란이 지나갔으니 성천을 다시 가꾸면 돼. 이 정도의 혼란은 다시 오지 않을 거야.”

영랑이 애타는 눈으로 이루와 마눙을 바라보았다.


“다시 없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

마눙이 비아냥거렸다.


“마지막까지, 나타나지 않았어. 결국 우리가 막은 거야. 무책임한 신은 필요 없어.”

이루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리에겐 더 큰 힘, 우주를 다스릴 힘이 필요해.”

이루가 천천히 탁자 주변을 걸으며 신제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대혼란이 다시 오지 않도록 힘을 키워야 해. 천선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어.”

“어떻게 하려고?”

전욱이 이루를 돌아보았다.


“천선계의 힘은 한정되어 있지만, 피천귀는 무궁무진해.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더욱더 많은 힘을 받을 거야. 그 힘을 이용하자.”


“말도 안 되는 소리!”

전욱은 벌떡 일어났다.

“무자비한 욕심 덩어리와 한 편이 되겠다고? 인간세에나 통하는 음모와 욕망으로 뭉친 것들과!”


“언제까지 사람을 동정할 건가? 사람이 약한 것 같아? 웃기지 마. 그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자네도 알잖아?”

마눙은 전욱의 어깨에 손을 얹고 두드렸다.


“우리도 변해야 해. 인간세는 뒤집힐 때마다 바뀌었어. 점점 교묘하게, 점점 흉측하게 말이지. 이게 뭘 뜻하는가?”

마눙이 설명했지만, 현원과 영랑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눙이 외쳤다.

“그들이 세 번째 대혼란을 몰고 올 거야. 그 힘을 우리가 먼저 이용하자.”


“너희들이 내 생각과 다르다면 할 수 없어. 난 내 식대로 할 테니까.”

이루가 팔짱을 끼고 서서 다른 신제들을 내려다보았다.


“생각해 봐. 수리마루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알에서 받은 지식이 전부야.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어. 세상이 뒤집혀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루가 오른손 검지를 들고 허공을 찔렀다.


“있지도 않은 존재를 믿고 성천을 가꿨던 거라고!”

이루가 말을 마치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래도 난 믿어. 생명의 알을 만든, 우리를 태어나게 한 존재가 있다고.”

영랑이 조그맣게 대답했다.


“너희도 같은 생각이야?”

이루가 현원과 전욱을 보며 물었다.


“북방흑제야 당연히 정명을 믿겠지. 선택받은 천사장이잖아?”

마눙은 창가에 올라섰다.


“길게 얘기할 필요 없어. 우리는 우리대로 하면 돼.”

마눙의 말에 이루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엇을 하든 너희와 상관없어. 너희도 날 방해하지 마.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야.”

이루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곧이어 창가에 앉아있던 마눙도 사라졌다.


*


청록빛 운기 덩어리는 잔해가 내놓은 기억 앞에서 멈춰 있었다.


‘수리마루?’

이름은 들었으나 본 적은 없었다. 오랫동안 우주를 떠돌았어도, 그 비슷한 존재도 보지 못했다.


‘있으면서 없는 존재인가?’

운기 덩어리는 수수께끼를 품은 채 그곳을 떠났다.


그는 우주의 가장자리를 따라다니며 가르치지 않아도 알았고, 배운 것을 잊지 않았다.


덩어리는 점점 커졌고, 작은 구름처럼 뭉쳐졌다.

실체는 없지만, 혼이 완성되자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게 되었다.


이름도 없이 경계를 떠돌았다. 이름을 지어줄 누군가 나타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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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천계_잉걸둥지에 이르다 23.08.11 41 3 11쪽
118 천계_얼음칼 아움 23.08.10 43 3 11쪽
117 천계_백하의 다짐 +2 23.08.09 48 3 12쪽
116 천계_바람길 연회 23.08.08 43 3 10쪽
115 천계_돌아온 온사랑 23.08.08 46 3 13쪽
114 천계_살아있는 환상 23.08.07 44 3 11쪽
113 천계_가시버시 축제 23.08.06 45 3 11쪽
112 그믐_수명환의 활약 23.08.05 45 3 11쪽
111 그믐_근원을 향한 환영 23.08.04 43 3 11쪽
110 그믐_그룹 갤럭시의 연주 23.08.03 43 3 10쪽
109 그믐_인연 연결자 +2 23.08.02 46 3 11쪽
108 그믐_숨은 후원자 +2 23.08.02 46 3 11쪽
107 그믐_외길과 산돌 23.08.01 42 3 12쪽
106 그믐_나무새가 찾는 주인 23.07.31 42 3 11쪽
105 그믐_하이브리드 인간 23.07.31 42 3 12쪽
104 그믐_사라남 종합병원 23.07.30 44 3 11쪽
103 예사달_몸은 없어도 마음이 있다 23.07.29 43 2 12쪽
102 예사달_다움성의 초대 23.07.29 43 4 11쪽
101 예사달_한얼이라 부르게 23.07.28 42 3 12쪽
100 예사달_신령수 동명 +2 23.07.28 45 3 11쪽
99 예사달_제자를 들이다 23.07.27 41 2 11쪽
98 예사달_빙천골 능금원 23.07.27 43 2 12쪽
97 예사달_불천수 전투 23.07.26 44 2 11쪽
96 예사달_다훤과 만나다 23.07.26 44 2 11쪽
» 예사달_경계의 떠돌이 23.07.25 44 2 11쪽
94 천계_남아있는 향기 23.07.25 42 2 12쪽
93 천계_동녘뜰 사빈재 23.07.24 43 2 11쪽
92 천계_다움성 온새미실 23.07.23 43 2 11쪽
91 천계_새로운 소식 23.07.22 4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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