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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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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256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9.0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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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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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천계_신성한 땅의 흙

DUMMY

놀뫼마당에서는 악기 연주와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돌봄차사와 인도자의 혼례식을 축하하기 위해 혼들이 모여들었다.


가시버시 축제도 끝났겠다, 다음 축제인 화평축제까지는 까마득히 기다려야 했다.

공방이나 학당에서 수련하는 혼들은 바쁘다지만, 대부분 재미있는 일을 찾고 있었다.


이런 때 차사와 인도자의 혼례식이라니. 마고 사빈이 춤과 노래를 가르쳐주고 함께 춤춘다니 기회를 놓칠 이들이 아니었다.


어느새 혼들이 즐기기 위한 잔치가 되어갔다.


사빈은 놀뫼마당에서 혼들에게 춤을 가르쳤다.

그녀의 춤사위는 확실히 달랐다. 꽃잎이 휘날리듯 나비가 날개를 펄럭이듯 가볍고 우아했다.


나도마중의 도우미인 아리영은 사빈을 차마 부르지 못하고 혼들은 지켜보았다.


사흘 동안 배웠다지만, 지금 막 배운 것 같이 딱딱하고 박자도 맞지 않았다.

그래도 아랑곳없이 모두가 즐거워하며 깔깔거렸다.


사빈이 뒤늦게 아리영을 발견했다.

“아리영! 웬일이야?”


“아날빛숨의 새 도우미가 왔어요.”

사빈은 아리영 뒤에 서 있는 도우미의 혼을 알아보았다.


“반가워.”

사빈이 손을 내밀자 새 도우미도 소매를 걷고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자 사빈의 손바닥으로 아련한 떨림이 지나갔다. 잠자코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에서 팔로, 어깨로 시선을 옮기며 혼의 기운을 살폈다.


‘해령?’

지난 그믐에 만났던 만선상단의 해령이었다.


‘벌써 씻김을 끝냈나?’

벌써가 아니구나. 시간의 덫에 걸려 과거로 갔으니 이천 년이 넘었어.

‘아주 오래··· 씻김을 했구나.’


사빈이 해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생의 기억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다행이다. 아픈 기억은 다 잊어서.’


그녀를 보고 있으니 황민의 혼이 생각났다. 여전히 중천에서 괴로워하고 있겠지.

해령은 씻김을 끝내고 마지막 수련만 남았는데.


황민의 혼은 모양도 흩어져있었다. 아직도 그 상태라면 중천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를 도울 방법이 없을까?’


“마고님? 마고님!”

아리영이 부르는 소리에 사빈은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도우미 해령의 손을 잡고 있었다.


“미안해.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이름이 뭐야?”

“아직 없어요. 두루천을 이제 막 건너왔거든요.”

아리영이 대신 대답했다.


“마고님이 이름을 주셔야죠.”

“그래. 그럼 해령 어때?”

아무래도 다른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


“해령···. 좋아요. 예쁜 이름이에요.”

도우미 혼이 활짝 웃었다. 이전의 기억은 씻겨나가 어떤 것이든 처음 받는 이름이었다.


“마고님, 전 나도마중으로 가볼게요.”

아리영이 해령에게 손을 흔들었다.


언제 왔는지 초연이 살며시 다가왔다.

“어머나, 새로 온 도우미라고?”

“예. 해령이라고 이름 지었어요.”


해령이 공손히 손을 모으고 초연에게 허리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얼지 않아도 돼. 여기는 염라부가 아니거든. 난 돌봄차사 초연이란다. 너와 함께 아날빛숨에서 일할 거야.”

초연은 해령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그녀의 팔에 손을 끼웠다.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자세히 알려주마. 사빈은 지금 몹시 바쁘단다.”

“제가요?”

사빈이 놀라 물었다.


“그래. 춤 연습도 해야 하고, 혼들에게 노래도 가르쳐야 하니까.”

“보세요. 제가 없어도 다들 잘하는데요.”


초연이 혼들의 엉성한 움직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얘, 해령아. 저 춤 어떠니? 춤으로 보이니?”


해령은 웃음을 참으며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초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간단히 식사만 한다니까.”


“그래도요. 혼례는 처음이에요. 다음 마고를 못 찾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라고요.”

“그거랑 무슨 상관이니?”


“다음 마고를 일찍 찾았으면 초연님 혼례식도 못 봤을 거 아니에요?”

“허, 그래. 네가 춤춘다는 바람에 해담 대차사님에, 두모 대차사님까지 오신다잖니? 이러다 황제님까지 오실까 봐 겁난다.”


“오, 중앙황제님도 당연히···.”

사빈이 말하려 하자 초연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눌렀다.


“됐다. 넌 연습해라. 나는 해령과 오붓하게 다닐 테니.”

초연은 해령과 팔짱을 끼고 아날빛숨으로 들어갔다.


“정말 현원님도 오셔야 하는 거 아니야?”

사빈은 중얼거리며 놀뫼마당으로 돌아섰다.


*


사빈의 춤 연습은 아날빛숨 뒷마당에서도 이어졌다.


축하 공연을 사빈의 독무로 시작할 계획이었다.

벌써 그녀를 위한 기둥이 세워졌다. 놀뫼마당 어디서나 보이도록 높이 만들었다.


공중에 떠서 춤출 것이므로 기둥은 보조 역할이었다.


사빈의 춤이 끝나자 누군가 요란하게 환호했다.

“역시 사빈님!”


한얼은 손바닥이 달아오를 정도로 세게 손뼉을 쳤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실력이 녹슬지 않았습니다.”


“한얼님! 오셨군요.”

사빈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한얼에게 다가갔다.


“예. 다녀오는 길에 신성한 땅에 들렀습니다.”

“고마워요. 고생하셨죠?”


“하아, 정말 힘들었습니다.”

한얼이 가리킨 곳에는 그의 몸집만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조금만 가져오려 했는데 안 되더군요. 인간세를 벗어나면 신성한 기운이 사라져버립니다. 이 정도는 가져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누가요?”

“아, 신성한 땅에 갔더니 예님이 계시던데요.”


“예님···. 예전에 마고였던 그분요?”


마고를 넘기고도 낙원에도 가지 않고, 무결의 고리에도 들지 않은 혼.

인간세에 머문다는 그 혼백이었다.


“예. 이전에 마고였다고 하시더군요. 사빈님께 드린다고 했더니 챙겨주셨습니다.”


“그분은 왜 인간세에 머무실까요?”

“무슨 숙제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안 하시더라고요.”


“숙제요? 신성한 땅은 사람이 안 산다던데···.”

“아, 사람이 아니고 여우였습니다.”


한얼이 손짓하니 사빈의 꽃밭으로 흙자루가 움직여갔다.


사빈은 흙을 채우고 그 자리에 긔니초를 심었다. 마당 한쪽에 대충 심어놓은 긔니초가 이제야 제 자리를 찾았다.


“이건 뭡니까?”

“긔니초예요. 대감이 구해줬는데, 여기서도 잘 자랄 것 같아요.”


긔니초가 무엇인지는 한얼도 알고 있었다. 사빈을 위해 숲센장벽까지 갔다 왔다는 말이다.

“그 얼음대감이···. 대단하군요.”


“한얼님도 대단하세요. 신성한 흙을 구해오셨잖아요? 한얼님의 손길도 받았으니 긔니초가 잘 자랄 거예요.”

사빈은 땅을 다독이고 손을 털었다.


“순백초는 실패해도, 긔니초는 성공한다! 반드시!”

사빈이 기합을 넣었다.


‘곧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거야. 다음 마고를 위해서라도 잘 키워야지.’


*


원래 천인의 혼례식은 형식이 없었다. 친한 벗과 함께 식사하며 서로를 축복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혼례식이 오늘은 놀뫼마당과 이즈막광장까지 아우르는 잔치가 되고 말았다.

축하 공연에 참여하는 혼들이 늘어나면서 이즈막광장까지 뻗어나갔다.


위즐증가 뿐만 아니라 고샅공방에서도 요리를 만들었고, 상산대원들은 영진촌의 모심장터까지 가서 음식을 사다 날랐다.

혼례식이 아니라 마음숲의 축제가 되어버렸다.


해담 대차사가 광장을 내려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내 여태까지 이런 혼례식은 본 적이 없네.”


“아직 기회는 있네. 자네도 할 수 있어.”

두모 대차사가 해담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야 얀다가 있지만, 자네는 아직 짝을 못 찾았잖나? 사빈이 마고로 있을 때 빨리 찾으라고.”

“허허, 사양하겠네.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것은 질색이네.”


“그게 자네가 바라던 거 아닌가? 보게. 저들은 혼알방이 사라진 일은 싹 잊었네. 돌봄차사와 키움차사들까지 들떠있지 않은가.”


“다행이군. 곧 그믐이지?”

“음. 사빈이 나가면 시작할 건가?”


“그래야지. 마고가 나가고 마음숲이 약해지면 수집가들이 모습을 드러낼 걸세.”

“혼들과 차사들도 나오지 말라고 일러야겠군.”


두모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얀다가 다가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너무 티 내지 마. 오늘은 혼례식이야.”

그녀의 속삭임에 두모와 해담 모두 뒤로 돌아섰다.


위즐증가의 정원에 화려한 식탁이 차려졌다. 식탁과 정자 주위로 손님들이 모두 모였다.


영진촌의 여러 인도자들과 키움차사인 지나실, 요선, 석보, 목예가 와 있었다.

돌봄차사 구추도 왔지만, 위화는 거동이 불편해 오지 못했다.


상산대원들은 혼을 지키느라 놀뫼마당과 이즈막광장으로 흩어졌고, 상산대감 백하만 축하하러 올라왔다.


백하는 다른 인도자들과 인사를 나누며 천천히 한얼에게 다가갔다.


한얼과 가까워지자 백하가 정원을 향해 눈짓했다. 한얼도 알아듣고 일행과 떨어져 정원으로 나아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할 얘기가 있으니 내일 한요재로 오게.”

“수집가에 관한 겁니까?”


백하가 눈을 감았다 뜨자 한얼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얼과 백하가 자리로 돌아왔을 때 혼례의 주인공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대취와 초연, 산여와 다담은 황금빛 겉옷을 입고 손에 손을 잡았다.


놀뫼마당에서 연주가 시작되었다.

맑고 고운 피리 소리에 이어 기둥 위로 사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빈이 사뿐히 발을 움직이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녀가 손짓하자 바람이 일어나며 꽃향기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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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그믐_마지막 주술 23.09.03 52 3 12쪽
149 그믐_달맞이 언덕의 뒷골목 +4 23.09.02 43 3 12쪽
148 천계_폭풍 전야 23.09.02 43 2 11쪽
147 천계_비밀회의 +2 23.09.01 42 3 11쪽
» 천계_신성한 땅의 흙 23.09.01 43 3 10쪽
145 천계_돌아오는 마음 23.08.31 43 2 12쪽
144 천계_움트는 비밀 23.08.31 45 3 11쪽
143 천계_신령수 동명 +2 23.08.30 42 3 11쪽
142 천계_두 번째 고백 23.08.30 43 3 12쪽
141 천계_숲센계곡 긔니초 23.08.29 43 2 11쪽
140 천계_반가운 할머니 +2 23.08.29 45 4 11쪽
139 천계_방법을 찾겠습니다 23.08.28 43 3 11쪽
138 천계_에밀레와 나토두 +2 23.08.27 43 3 12쪽
137 천계_떠나는 용희 23.08.26 41 4 11쪽
136 천계_기운을 훔친 대가 23.08.25 44 4 10쪽
135 천계_사라진 혼알방 +2 23.08.24 44 3 12쪽
134 그믐_빛나는 알과 만나다 23.08.23 43 3 8쪽
133 그믐_우주의 미아 +2 23.08.23 43 3 10쪽
132 그믐_소환 23.08.22 42 2 11쪽
131 그믐_대의각 앞마당 23.08.21 42 2 9쪽
130 그믐_증좌를 찾아내다 23.08.21 42 2 9쪽
129 그믐_형감어사 문휘수 23.08.20 43 2 11쪽
128 그믐_별사탕을 어찌 아는가 23.08.19 43 3 11쪽
127 그믐_사람의 눈은 진실을 보지 못한다 23.08.18 43 3 11쪽
126 그믐_판정관 황민 23.08.17 41 2 11쪽
125 그믐_억울한 누명 23.08.16 43 3 11쪽
124 그믐_그들의 비밀 23.08.15 42 4 10쪽
123 그믐_전생을 기억하는 소녀 23.08.14 42 2 11쪽
122 그믐_영함산과 만선상단 23.08.13 41 3 11쪽
121 천계_공조 23.08.12 44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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