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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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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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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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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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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6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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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그믐_억울한 누명

DUMMY

구본성의 중심은 야트막한 산이라 성주각과 관아는 성의 중앙에서 서남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옥사는 관아의 북쪽, 팔영산 밑자락에 있었다.

옥사를 둘러싼 돌담은 사람 키보다 높았다. 이끼와 가시넝쿨로 뒤덮여 음침해 보였다.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니 돌담 안쪽으로 다섯 채의 크고 작은 옥사가 있었다.

맨 오른쪽에만 관군들이 서성거렸다.

‘저기구나.’


나무에서 내려와 담장 옆에 몸을 숨겼다.

왼손으로 마고의 반지를 어루만졌다. 사람들의 소망만 있다면 길이 열릴 것이다.


나가고 싶다거나, 누군가 도와주었으면 바라거나, 억울해서 하소연하고 싶다거나 무엇이라도 좋았다. 그중 하나만으로도 마고의 술법이 가능하니까.


담장 앞의 공기가 꿈틀거렸다.

나는 꾸물대는 경계에 손을 갖다 댔다. 뭉클거리며 공간의 통로가 열렸다.

“됐어. 가자.”


한 걸음 내디디니 곧바로 옥사 안이었다.


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칸마다 상단 사람들만 앉아있었다. 다른 죄수는 보이지 않았다.

‘미리 옥사도 비워놨구나.’


나를 알아본 사람들이 저마다 소리를 질렀다.

“주술사님! 살려주세요!”

“우리 좀 꺼내주세요.”


나는 조용히 하라는 말 대신 손을 들어 허공을 저었다.

무언의 결계를 치자 사람들이 뻐끔거렸다. 놀란 눈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밖에 관군이 지키고 있어요. 소리 내면 들킵니다. 내 말을 들으세요.”

조그맣게 속삭였지만,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바나가 단주 만길을 찾아냈다. 바나는 나무 창살에 한쪽 발을 올려놓고 기다렸다.


단주가 손을 내밀었다. 그에게 걸린 무언의 결계를 지웠다.

“저, 정말 주술사님이군요. 제발 구해주십시오. 우리는 죄가 없습니다.”


“압니다. 단주님, 이건 음모예요. 미사홀파에서 수작을 부린 것 같아요.”

“미사홀파가 왜?”


“구본성을 차지하려고요. 전쟁을 시작하려는 거죠.”

“그렇다고 우리를···.”

단주는 입술을 떨며 울먹였다. 그의 어깨가 심하게 흔들렸다.


“성주에게 편지를 받았다고 하셨죠?”


단주가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저고리 안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있죠, 있어요. 아까도 그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는 덜덜 손을 떨며 가슴팍에서 커다란 봉투를 꺼냈다. 손이 심하게 떨려 봉투를 열지도 못했다.


나는 봉투를 받아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빈 봉투를 보고 단주의 얼굴이 하얗게 바뀌었다.

“이, 이게 대체···.”


“다른 단서는 없나요? 다른 이야기라거나 아니면 다른 누구라도. 이상한 거 없었나요?”

“그, 그게. 잘···.”

단주는 몸을 떨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색이 되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단주님! 정신 차리세요. 식구들의 목숨이 걸렸어요.”

나는 단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언제 심문을 시작할지 몰라요. 그러니 꼭 생각해내셔야 해요.”

그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마고의 기운이 평정심을 되찾게 해줄 것이다.


손이 따뜻해지고, 핏줄을 타고 뜨거운 기운이 흐를 것이다. 그의 눈빛이 서서히 돌아왔다.


“살려주실 거요?”

“할 수 있는 건 다 할 거예요. 그러려면 증거를 찾아야 해요.”


“그러니까···.”

단주가 생각해내려고 애쓰는 사이, 나는 다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복도 맨 끝 방에서 해령이 나를 보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 팔과 손에 붉게 피어난 상처가 보였다. 살려달라고 눈빛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나는 해령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힘겹게 고갯짓했다.


‘꼭 나가게 해줄게. 무고한 사람이 희생되는 건 용납할 수 없어. 과거든, 현재든!’

나는 이빨을 꽉 다물었다.


“생각나요, 생각나는 게 있소.”

단주가 내 손을 두드렸다.


“위판 나리가 다녀간 그 날, 도둑이 들었소. 일찍 발견하는 바람에 도둑맞은 물건은 없었는데···.”

“훔치러 온 게 아니예요. 수레에서 미사홀파의 기밀문서가 나왔대요.”


“뭐요?”

단장의 외침과 함께 다른 칸에서도 쉭쉭 소리가 들렸다. 모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욕을 하고 있었다.


“그때 단주님은 잠옷 차림으로 나오셨죠?”

“그, 그렇소···.”

편지가 빈 봉투로 뒤바뀐 것이 그때이리라.


“다른 건요? 뭔가 없을까요?”

“그게···.”

단주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옆 칸에 있는 장로가 가슴을 두드리며 손으로 입을 가리켰다.

나는 그의 결계를 풀어주었다. 묵언의 결계가 풀리자 헥헥 숨을 몰아쉬었다.


“수상한 사람을 봤소이다. 위판의 심부름꾼이라면서 거래를 주선한 수고비를 달라고 했소.”

“그런 얘기 없었잖나?”


“걱정하실까봐 말씀 못 드렸죠. 금화 몇 개를 건네줬습니다. 패거리를 몰고 왔거든요. 모두 칼을 차고.”


“혹시 검붉은 옷을 입고 있었나요?”

“예. 모두 같은 옷을 입었소.”


“다른 말은 없었나요?”

“그자들이 말하는 걸 엿들었는데···. 위판은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라고요. 돈을 못 받으면 어쩔 거냐고 따지니까 대장이 낄낄거렸소.”


장로는 숨을 몰아쉬며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치부를 다 모아놨다고. 그것만 있으면 놈들은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위판이 흰 두루마기를 입었나요? 눈매는 날카롭고 코가 길고 입술은 얇은?”

“그렇소. 바로 그자요. 위판 신용무라고 하였소.”

이번에는 단주가 대답했다.


“단주님, 미사홀파가 관군에 섞여 있어요. 조심하라고 일러주세요. 증거를 찾아올게요.”

“부탁드리오. 꼭.”


나는 묵언의 결계를 풀어주고, 곧바로 공간의 통로로 빠져나왔다.


담장 밖으로 나오자 바나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주인님, 사람이 마고의 술법을 봐도 되어라?”


“음. 내가 주술사인 줄 알잖아? 내일 아침이면 꿈처럼 느낄 거고.”

“어디로 가면 되어라?”


증거를 찾는 것만큼이나 내 말을 믿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가짜가 날뛰는 마당에 진짜임을 어떻게 증명할까. 그마저 가짜라고 해버리면 헛수고가 된다.


진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성주를 설득시킬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빨리 알아보자. 어두워지기 전에.”


*


관아에서 멀지 않은 영주장터 끝에 자리 잡고 앉았다.

평야에서 가까운 남문과 이어지니 북쪽 복래 거리보다 가게도 많고, 사람도 많았다.


이번 외출은 주술사니까 주술사답게 정보를 캐내야지. 긴 천에 문구를 쓰고 막대기에 매달았다.

‘미래를 읽어드립니다.’


한낮이라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미래가 궁금한 손님은 없었지만, 그들이 떠드는 말은 잘 들렸다.


일상적인 다른 이야기는 흘려보내고, 필요한 이야기만 골라 들었다. 장터가 넓으니 모여서 떠드는 사람도 많았다.


“위판 나리? 나리라는 호칭이 아깝네.”

“아니, 왜 멀쩡한 다리를 부수고 그 옆에 새 다리를 놓냐고.”

“그래야 뒷돈이 생기나 보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또 다른 무리가 다가왔다.


“판정관? 제 아비 등살에 떠밀려 판정관이지. 그 성정에 무슨···.”

“글은 제법 쓴다던데?”

“그러니까. 글만 잘 쓴다고.”


‘판정관이라···. 구본성에는 그런 직책도 있구나.’

나는 귀를 쫑긋거리며 저잣거리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를 긁어모았다.


“판정관? 성주님 아들 말이지?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줏대가 없는 건가?”

“흔들리는 갈대여?”


“좋은 일도 하더구만. 그때 왜 아기 낳고 몸조리 못 한 여인 있잖아?”

“아, 그려. 행한댁? 남편이 장사하러 가고 없었지.”


“쌀이랑 미역도 보내줬다던데.”

“황민 도련님이야 여러 사람 도왔지. 그래도 쫌 거시기하지 않어?”

“그렇기는 혀.”


사람들은 위판 신용무와 판정관 황민에 대해 가장 많이 떠들었다.

위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욕이지만, 판정관은 반반이었다. 어느 쪽인지 직접 만나야 알겠지.


저잣거리를 돌며 조사하겠다던 바나가 느리적느리적 돌아왔다. 황갈색 털에서 꾀죄죄한 땟물이 흘렀다.


힘없이 늘어진 척하지만, 입가에 묻은 가루와 얼룩만 봐도 무엇을 얼마나 먹었나 알 수 있었다.


“뭔가 알아냈어?”

“주인님, 조심하셔라. 겉과 속이 다른 놈이 있어라.”

“누구? 위판?”

“벌써 아셨어라?”


“네가 뭘 먹었는지도 알지.”

“조금밖에 안 먹었어라. 힘이 없어라.”

바나는 말하면서도 앞발로 입가를 털었다. 우수수 가루가 떨어지자 끼깅 앓는 소리를 냈다.


“왈, 관군에 섞인 미사홀파를 알아냈어라. 발목에 보라색 끈을 묶고 있어라.”

“잘했어. 이제 우릴 도와줄 사람을 찾자.”

“그게 누구여라?”

“판정관.”


*


판정관의 집무실을 찾기는 쉬웠다. 넓은 마당에 형틀이 갖춰진 곳은 관아에서 한 곳뿐이니까.


해원루는 관아의 동쪽에 있었다. 원통함을 풀어준다는 뜻인가.


역도를 찾는 일에 동원되었으니 관아를 지키는 경비는 몇 명 없었다. 그나마 성주가 머무는 대의각에 가 있고 해원루는 중문 바깥의 네 명이 전부였다.


“주인님, 어서 통로를 만드셔라.”

“마고의 술법은 소망이 있어야 돼.”


“그럼 어쩌실 거라? 담을 넘으실 거라?”

“할 수 없다. 그래야지.”


나는 낑낑거리며 해원루 뒷담을 넘었다.

치마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데 바나가 사뿐사뿐 걸어와 기웃거렸다.


“주인님, 사잇문은 열려있어라. 왈.”

“아우, 그런 건 미리 말해줘야지.”


“말하기 전에 넘으셨어라. 주인님이 안 물어봤어라.”

바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키킥거렸다.


아휴, 얼마나 긴박한 때인데 장난이나 치다니.

나는 씩씩거리며 해원루 계단 앞에 다다랐다.


해원루는 높이 지어진 건물이라 계단 끝이 내 머리보다 높았다.


대청에 판관용 의자와 탁자가 놓여있고, 마당에는 피 묻은 형틀이 있었다. 옥사에 갇힌 사람들을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바나가 킁킁거리며 형틀을 건드리는 바람에 세워놓은 막대가 와르르 무너졌다.


“누구냐?”

벌컥 문이 열렸다.


남색 철릭을 입은 남자가 뛰어나왔다. 두리번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문득 그의 혼이 눈동자에 서렸다가 사라졌다.

‘어, 저 혼···.’


어디선가 만난 혼이었다.

‘아주 슬프고, 외롭고, 괴로운···. 그런 혼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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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그믐_마지막 주술 23.09.03 52 3 12쪽
149 그믐_달맞이 언덕의 뒷골목 +4 23.09.02 43 3 12쪽
148 천계_폭풍 전야 23.09.02 42 2 11쪽
147 천계_비밀회의 +2 23.09.01 42 3 11쪽
146 천계_신성한 땅의 흙 23.09.01 42 3 10쪽
145 천계_돌아오는 마음 23.08.31 42 2 12쪽
144 천계_움트는 비밀 23.08.31 44 3 11쪽
143 천계_신령수 동명 +2 23.08.30 42 3 11쪽
142 천계_두 번째 고백 23.08.30 43 3 12쪽
141 천계_숲센계곡 긔니초 23.08.29 42 2 11쪽
140 천계_반가운 할머니 +2 23.08.29 45 4 11쪽
139 천계_방법을 찾겠습니다 23.08.28 43 3 11쪽
138 천계_에밀레와 나토두 +2 23.08.27 43 3 12쪽
137 천계_떠나는 용희 23.08.26 41 4 11쪽
136 천계_기운을 훔친 대가 23.08.25 43 4 10쪽
135 천계_사라진 혼알방 +2 23.08.24 44 3 12쪽
134 그믐_빛나는 알과 만나다 23.08.23 43 3 8쪽
133 그믐_우주의 미아 +2 23.08.23 43 3 10쪽
132 그믐_소환 23.08.22 42 2 11쪽
131 그믐_대의각 앞마당 23.08.21 42 2 9쪽
130 그믐_증좌를 찾아내다 23.08.21 42 2 9쪽
129 그믐_형감어사 문휘수 23.08.20 43 2 11쪽
128 그믐_별사탕을 어찌 아는가 23.08.19 43 3 11쪽
127 그믐_사람의 눈은 진실을 보지 못한다 23.08.18 43 3 11쪽
126 그믐_판정관 황민 23.08.17 41 2 11쪽
» 그믐_억울한 누명 23.08.16 43 3 11쪽
124 그믐_그들의 비밀 23.08.15 41 4 10쪽
123 그믐_전생을 기억하는 소녀 23.08.14 42 2 11쪽
122 그믐_영함산과 만선상단 23.08.13 41 3 11쪽
121 천계_공조 23.08.12 44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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