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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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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260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8.1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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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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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1쪽

그믐_전생을 기억하는 소녀

DUMMY

단주 만길은 반갑게 나를 맞았다.

“유명한 주술사라고?”


‘오늘 처음 왔는데 언제 유명해졌대?’

해령이 뭐라고 소개했는지 몰라도 그는 불길 속에서 출구를 찾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어려서 산에 들어가 수련만 하다가 나왔습니다. 세상사는 전혀 모릅니다. 지금 왕이 누구인지도 모르는걸요.”


“키우는 개만 봐도 알 수 있소. 주인이 얼마나 비범한지.”

단주는 앉으라고 손짓했다.


“해령이 부모 없이 자라 엉뚱하기는 해도 거짓말은 안 한다오. 새를 부르는 것도 사실이라오.”

단주는 따뜻한 차를 따라 주었다.


아날빛숨에 비하면 텁텁하고 향도 거의 없지만, 인간세에서 이 정도는 고급이었다.

“감사합니다. 내일 출발하시나요?”


“그렇소. 내일 아침 성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가기로 약속했다오.”

“약속?”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등받이에 기대며 내 옷을 훑어보았다.


‘나를 시험하겠다, 이거군.’

일을 앞두고 주술사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영험한지 확인하고 싶겠지. 나였어도 그럴 테니까.


“진짜 주술사라면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지 않소? 이번 거래는 아주 중요하다오.”

“예. 그렇군요. 상단의 모든 재산을 쏟아 넣으셨으니.”


여기까지 오며 천막을 세어보았다. 이 정도 규모라면 있는 것 없는 것 다 긁어모은 것이다.

그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다음 말을 기대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나는 마고의 반지를 쓰다듬었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위험할 것 같은데, 뭔지 모르니 무작정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에잇, 하필 주술사 옷을 입혀서는···.’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애매모호하게 말하면 된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맞아떨어질, 천선계의 예언 같은 두루뭉술한 말들.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고, 상황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무조건 자기에 맞게 받아들일 테니까.


“사람의 일은 몰라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여기서 한 박자 쉬는 것도 필요하지.


“짙은 안개가 앞을 막고 있습니다. 위험하지만 돌아설 수도 없습니다. 안개 속에 귀인도 있고, 악연도 있습니다. 누가 악연인지 누가 귀인인지 잘 봐야 합니다.”


나는 단장의 눈빛을 살피며 잠시 말을 끊었다.


“거센 강 위에 외나무다리가 놓였습니다.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빠지고 맙니다. 똑바로 앞을 보고 곁눈질하지 말아야 합니다.

옳은 길로 간다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지만, 악인의 꾐에 빠지면 눈을 뜨고도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힘을 주어 말했다.

“지금은 위험한 때입니다. 단주님도 아시다시피.”


인간세에 위험하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게다가 해령의 말로 백선국으로 바뀐 지 얼마 안 되었다면 왕권도 불안할 것이다.


무엇보다 산에서 만난 두 남자가 신경에 거슬렸다. 무사 중에서도 계급이 높아 보였는데.


단주는 허리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부터 단주와 나, 둘밖에 없었는데 천막 안을 둘러보다니.


“그대의 말이 맞소. 사빈님이라고 했던가?”

그는 내 쪽으로 가까이 허리를 숙였다.


“신왕은 아주 예민하다오. 한마연합이 흩어지고, 여기에 새 나라를 세우려는 무리가 여럿 있었소.”

단주는 침을 삼키고 잠시 뜸을 들였다.


“신이당이 승리했고, 총수가 신왕이 되었다오. 부휘류 일당은 거의 죽거나 도망쳤지만, 미사홀파는···.”

단주는 목이 마른 지 급히 차를 따랐다.


“잔당들이 기회를 노린다는군.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거지.”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겠군요.”


“구본성 성주가 내게 부탁했다오. 정한 날짜와 시각에 맞춰 성에 들어오기만 하면, 가져온 물건을 모두 사들인다고.

일부는 신왕에게 뇌물로 쓰고, 나머지로는 시장을 융성하게 하여 구본성을 믿고 맡길 수 있게 할 거라고 말이오.”


“성주가 직접 제안했다고요?”

“아니. 편지를 받았소. 성주의 인장이 찍힌. 위판이 직접 가져왔는데, 처음에는 나도 안 믿었소.”


단주는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중요한 편지가 거기 있는 모양이었다.

“구본성주는 겁이 많다오. 신이당이 세력을 잡을 때도 제일 먼저 성을 바칠 정도이니.”


“자기 성에서 피비린내 나는 것이 싫었군요. 그래도 주민들은 살아남았겠네요.”

“신왕의 신임을 얻으려 안달이더군. 공을 세우려고 말이오. 그래서 우리를 찾아왔다고 했소.”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다른 상단은 빼돌리는 것도 많고, 누구의 끄나풀인지 알 수 없다오. 하지만, 우리는 정직하게 일하거든. 통행세도 잘 내고, 관리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만약 성에 안 들어가면요?”

“그날로 우리 목숨은···.”

단주는 엄지로 허공을 그었다.


‘어쨌든 지금은 선택할 수 없어. 이미 일어난 일이니···.’

내가 한숨을 쉬자 그도 가슴 가득 숨을 들이마셨다.


*


모닥불이 타닥타닥 불꽃을 뿜어냈다. 연기가 뭉클뭉클 올라가며 까만 하늘을 하얗게 물들였다.


상단의 젊은이들이 둘러앉기에 나도 거기 끼어들었다. 저녁도 먹었겠다, 해령의 전생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내일이면 구본성에 들어간다. 어때?”

“그저 그래.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어쭈! 아까는 신나서 펄펄 뛰더니!”

젊은이들이 내일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있었다.


“해령아, 아까 얘기한 꿈 이야기 말이야. 전생이 진짜 기억나?”

“그럼요. 어릴 때부터 꾸었는걸요. 그 사람은 빛 속에 있기도 하고, 숲이나 꽃밭에도 있었고, 강가에도 있었어요.”


해령은 꿈을 꾸는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많이 사랑했어요. 그 꿈만 꾸면 막 설레고, 행복해져요. 참!”


그녀는 내게로 돌아앉았다.

“그 사람은 헤엄을 잘 치고, 맨손으로 낚시도 잘했어요. 제가 새를 부르면 새소리도 흉내 냈고요. 휘파람을 정말 잘 불었어요.”


“그는 뭘 좋아했어?”

“저요. 헤헤, 당연히 저를 좋아했죠. 음···.”


해령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갸웃거렸다.

“피리를 잘 만들었어요. 나무 조각도 잘하고.”


“야, 너 또 꿈 얘기냐?”

그녀의 옆에 앉은 젊은이가 핀잔을 주었다.


“넌 말이야, 그런 말만 안 하면 다 좋은데. 아깝다, 아까워.”

“냅둬. 난 임자 있거든.”

해령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해맑은 소녀를 보자 피식 웃음이 났다.

‘그 사람과 만나 행복하게 살려나? 그것까지 보기에는 그믐 외출이 너무 짧구나.’


전생의 사랑이 이어지는 것, 한 번쯤 보고 싶은데.


실제로 전생을 기억하는 혼은 거의 없다. 기억의 잔해가 남을 수는 있어도.

대부분 상상으로 위로받고, 생각을 되풀이하다가 전생이라고 착각한다.


“언니, 언니는 주술사니까 신기한 이야기 많이 알죠? 이야기 하나 해주세요.”


“아, 그러네요. 주술사님 부탁드립니다.”

내 옆에 앉은 젊은이도 장난처럼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라···.”

이야기라면 쌓이고 쌓였지. 그믐 외출만 몇 번인데.


그래도 막상 할 말이 없었다. 인간세의 기억은 필요할 때만 올라오니까. 이야기하고 싶다고 불쑥 일어나지 않는다.


‘한마칠국이 백선국이 되었다고 했지?’

백선국의 역사는 들은 적 있다. 그믐 외출에서 만났던 어떤 역사학자에게.


“옛날 어느 나라에 한 왕이 살았어. 나라를 너무 걱정하다가 일찍 죽고 말았지. 그의 동생이 다음 왕이 되었는데, 이 사람은 너무나 조심성이 많아서 누구도 믿지 못했어.”


백선국 초대 신왕과 두 번째 왕의 이야기지만, 여기서는 미래이니 알 리가 없지.


나는 오래전 선인에게 들은 이야기도 섞어 넣었다. 인간세의 기록에는 남지 않은 사건이었다.


“신하들도 두 패거리로 나뉘어 서로 헐뜯고 으르렁거렸어. 왕은 어느 쪽도 믿지 못했어. 매번 사람을 시험했지. 그러다 정말 뛰어난 관리가 나타났는데···.”


내가 말을 멈추니, 해령이 물을 한 잔 건네주었다.


“고마워. 어쨌든, 그가 어느 정도였냐면 글이면 글, 그림이면 그림, 검술에서 활까지 못 하는 게 없었어.

역모 세력이 무고한 사람들을 끌어들였을 때도, 진짜 역도들을 찾아냈어.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굶는 사람이 없도록 제도를 고쳤어.”


“히야, 그런 사람이 여기 있어야 하는데.”

해령과 젊은이들이 한 마디씩 던졌다.


“왕은 그가 마음에 들어 아들의 스승으로 삼았어. 그러니, 다른 신하들이 가만히 있겠어?”

“어머, 누명을 씌웠어요?”

해령이 두 손을 입가에 댔다.


“맞아. 반대파에서 편지와 기록을 꾸매냈지. 거짓 소문을 내고, 가짜 증거를 만들었어.”

“정말 나쁜 사람들이네.”

“애꿎은 충신이 목숨을 잃었네요.”


“처형당하는 날, 수레에 실려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갔어. 그에게 도움받은 사람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서 배웅했대. 사람이 제일 많은 거리를 지나가는데···.”

나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


‘응? 이거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그 역사학자 말고 다른 어디였나 기억나지 않았다.


해령이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감쪽같이 사라졌어.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 수레에 앉아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진 거야. 그 대신 수레 위에 꽃잎이 흩날렸대. 꽃잎 끝에 붉은 무늬가 있는 흰 꽃잎이 펄펄.”


“그 사람은 어디로 갔어요?”

“천사가 된 거 아냐?”


“그럼 억울한 누명을 벗었어요?”

“진실이 밝혀졌겠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지켜봤는데?”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인간세에서 진실은 그다지 힘이 없다. 문자는 권력의 수단이고, 역사는 승리자의 전리품이니까.


“왕은 천벌이 두려워서 그의 이름도 입에 올리지 말라고 했어.”

“너무해요. 좋은 신하도 못 알아보고.”


“지금도 억울한 사람이 있으면 나타난대. 그가 다녀간 곳에는 어김없이 꽃잎이 떨어져 있고.”


“와, 언니! 그런 사람이 진짜 있으면 좋겠어요.”

해령이 손뼉을 치자 옆의 천막에서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찍 출발한다. 그만 자거라.”

“예. 어르신.”

젊은이들이 일어나 모닥불을 정리했다.


“구본성아, 기다려라!”

“너 말고 나를 기다릴 거다.”

젊은이들은 어깨동무하고 천막으로 들어갔다.


나도 해령과 같은 천막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는데, 어둠 속에 구본성의 깃발이 보였다. 처음 보는 데도 구본성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깃발을 보고 있으니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등골이 오싹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나는 가만히 마고의 반지를 매만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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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그믐_마지막 주술 23.09.03 52 3 12쪽
149 그믐_달맞이 언덕의 뒷골목 +4 23.09.02 43 3 12쪽
148 천계_폭풍 전야 23.09.02 43 2 11쪽
147 천계_비밀회의 +2 23.09.01 42 3 11쪽
146 천계_신성한 땅의 흙 23.09.01 43 3 10쪽
145 천계_돌아오는 마음 23.08.31 43 2 12쪽
144 천계_움트는 비밀 23.08.31 45 3 11쪽
143 천계_신령수 동명 +2 23.08.30 42 3 11쪽
142 천계_두 번째 고백 23.08.30 43 3 12쪽
141 천계_숲센계곡 긔니초 23.08.29 43 2 11쪽
140 천계_반가운 할머니 +2 23.08.29 45 4 11쪽
139 천계_방법을 찾겠습니다 23.08.28 43 3 11쪽
138 천계_에밀레와 나토두 +2 23.08.27 43 3 12쪽
137 천계_떠나는 용희 23.08.26 41 4 11쪽
136 천계_기운을 훔친 대가 23.08.25 44 4 10쪽
135 천계_사라진 혼알방 +2 23.08.24 44 3 12쪽
134 그믐_빛나는 알과 만나다 23.08.23 44 3 8쪽
133 그믐_우주의 미아 +2 23.08.23 43 3 10쪽
132 그믐_소환 23.08.22 43 2 11쪽
131 그믐_대의각 앞마당 23.08.21 42 2 9쪽
130 그믐_증좌를 찾아내다 23.08.21 42 2 9쪽
129 그믐_형감어사 문휘수 23.08.20 43 2 11쪽
128 그믐_별사탕을 어찌 아는가 23.08.19 43 3 11쪽
127 그믐_사람의 눈은 진실을 보지 못한다 23.08.18 43 3 11쪽
126 그믐_판정관 황민 23.08.17 41 2 11쪽
125 그믐_억울한 누명 23.08.16 43 3 11쪽
124 그믐_그들의 비밀 23.08.15 42 4 10쪽
» 그믐_전생을 기억하는 소녀 23.08.14 43 2 11쪽
122 그믐_영함산과 만선상단 23.08.13 41 3 11쪽
121 천계_공조 23.08.12 44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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