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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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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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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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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31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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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천계_돌아오는 마음

DUMMY

예사달은 소상각 옥상에 앉아 모로매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중년 남자의 모습이었다. 칼은 없지만, 무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


소상각의 옥상도 운치 있었다.

위즐증가만큼은 아니어도 정자도 있고, 키 작은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나름대로 정원의 분위기를 풍겼다.


다훤은 예사달의 맞은편에 앉아 부채를 흔들었다.

“위화님도 힘드실 거야. 온천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데···.”


그는 호수 가운데 솟은 작은 섬을 바라보았다. 섬에도 정자가 있어 가끔 그곳에서 쉬기도 했다.


예사달은 다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온천을 찾은 것도, 옥상 정자에 올라온 것도 다훤이 따라왔지 같이 온 것이 아니었다.


“화를 내고 나가더니 염치도 없어졌나?”

예사달은 다훤에게 등지고 앉아 반대편 호수를 바라보았다.


다훤은 쓰읍 숨을 삼키며 부채로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대명천을 거닐며 생각해봤네. 내가 없으면 자네는 어떻게 될까 하고.”

“지금보다는 낫겠지.”


“궁금하니까··· 지켜보기는 하겠네. 허나, 도움을 바라지는 말게.”

“지킬 것도, 볼 것도 없으니 북방흑천으로 돌아가게나. 자네가 없어도 세상은 잘 굴러가네.”

예사달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다훤이 치잇 이빨 사이로 소리를 냈다.

“천계가 싫어졌어. 인간세보다도 약하다니···. 나도 인간세로 내려가겠네. 내 천력을 펼칠 때가 되었다고.”


“자네가 떠난다면 대환영이지.”

예사달이 비로소 웃음 지었다.


“내려가는 즉시 천력이 사라질 거야. 천사들이 그렇지 않나? 심부름할 때야 천군만마의 힘을 갖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람보다 조금 나은 정도지. 자네가 천력도 없이 얼마나 버틸지 궁금하군.”


“자네는 괜찮은 줄 아나?”

“내가 왜 거기까지 가나? 난 천계나 유람하며 조용히 살 테니, 어서 내려가게.”


“어허, 이 친구, 서운하게 왜 그러나?”

다훤은 부채를 펼쳐 힘껏 흔들었다.


예사달이 갑자기 할머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어디선가 지팡이가 생겨나 그의 손에 들어왔다. 그는 웃으며 주름진 입을 오물거렸다.

“사빈이냐?”


옥상으로 올라온 이는 사빈이 아니라 나토두였다.

열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은 연회색 머리를 단정하게 올려묶고 미색 저고리에 고동색 허리띠도 깔끔하게 돌려 묶었다.


“예사달님, 아날빛숨에서 차를 가져왔습니다.”

나토두는 조심스럽게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다훤은 호기심에 가득 차 나토두를 훑어보았다.

“자네가 나토두인가?”


“예. 다훤님이시죠?”

“눈썰미가 좋구만. 에밀레는 같이 오지 않았나?”


“다른 일이 있어 떠났습니다.”

나토두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차를 준비했다.


“저런···. 에밀레도 보고 싶었는데. 소문이 하도 무성해서···. 허허, 남방홍천의 신물을 볼 기회가 많지 않거든.”

“조만간 다시 올 겁니다.”


나토두는 생글거렸지만, 예사달은 무덤덤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사빈과 함께 빛나는 알을 보았다고?”


“예. 어르신.”

“사빈은 중간자의 몸이라 가장자리 근처에도 가지 못할 텐데?”


다훤이 부채를 탁 접으며 탁자에 붙어 앉았다.

“그래, 그거, 어떻게 거기를 찾아냈나?”


나토두는 두 천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에 빛이 서렸다.

“알의 힘이었을 겁니다. 빛나는 알이 부른 거지요.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짐짓 목소리를 떨었다.


“그럴 수도. 사빈은 특별한 아이니까···.”

예사달은 지팡이에 두 손을 얹고 나토두가 차를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빈을 따르기로 했다면서?”

“예. 태어날 때 사빈님이 살려주셨거든요. 은혜를 갚으려고요. 부모님도 부탁하셨고요.”

“그래. 얘기는 들었네.”


나토두가 너무 작아 다른 주인을 정할 수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 주인이 사빈이 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다훤이 부채 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남방홍천은 어떤가? 여전히 마눙님을 기다리나?”


“예. 모두 마눙님이 다시 오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금천도 그리 믿겠지?”


“예.”

나토두는 두 개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일이 재미있는지 싱글거렸다.


“동방청천에서도 이루님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 다 했지. 이번에도···.”

다훤은 말하다 말고 나토두를 흘끗 보았다. 예사달이 눈짓하자 그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싸움이 일어나도 반계를 지킨다고 나설 테지.”

다훤은 부채를 쫙 소리 나게 펼쳤다. 화를 식히려는 듯 세게 부채질했다.


“그러니까 능사들에게는 절대 알리지 말아야지.”

그는 혼잣말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예사달은 갑자기 말이 많아진 다훤이 걱정스러웠다.

‘저리도 입이 가벼워서야···.’


남방홍천의 위사들은 반계와 직접 맞닿은 적이 없었다.

그들의 파괴력을 겪지 않았으니 반계에 대한 반감도 중앙황천만큼 크지 않았다.


첫끝마을은 중앙황천의 영역이었고, 황금들과 연곡호수는 중앙황천과 동방청천의 경계였다.


동방청천에서도 자신들의 신제를 기다리고 있으니 반계와 맞선다면 이번에도 중앙황천의 차사들만 나서게 될 것이다.


“다섯 성천을 보며 수련했다고?”

예사달은 나토두에게 의자를 가리켰다.


나토두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사빈은 아주 약한 아이라네. 자네가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어떤지 모르겠군.”

예사달이 몰아붙이자 다훤이 손을 들었다.


“자자, 오해는 하지 말게나. 이 친구가 제자 사랑이 유난하거든. 온통 제자 걱정뿐이니 자네가 이해하게.”


나토두가 두 손을 모아 올렸다.

“걱정 마십시오. 사빈님은 강한 분입니다. 마고의 기운 만큼이나 영혼이 맑고 힘이 넘칩니다. 신령수 동명님도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동명님의 결계에 갔었다고?”

예사달과 다훤이 동시에 소리쳤다.


“예. 하얀 나무와 붉은 구름 덩어리도 가져왔는걸요.”

나토두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고개를 살짝 숙여 앞에 앉은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예사달이 씁쓸한 얼굴로 되뇌었다.

“아무 말 없었는데···.”


“이보게. 무슨 일 있을 때마다 자네를 찾아와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쳐야 하나? 사빈이 마고인 걸 잊었어? 마음숲 일로도 바쁘다고.”


“그래도···.”

예사달은 마음이 허전해 가슴을 쓰다듬었다. 소중한 보물을 잃은 것 같았다.


*


나토두가 돌아가자 예사달은 할머니에서 무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다훤이 예사달 옆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마고의 능력이 옮겨가면 어찌 되나? 그래서 이렇게 예민한가?”


예사달이 슬픈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빈은 다른 마고와 다르니까···. 모르겠네. 어찌 될는지.”


그는 탁자 위에 주먹을 얹었다.

“다음 마고를 찾으면 바로 데려가야겠어. 동녘뜰에 가서 요양해야지.”


다훤이 예사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거야말로 과잉보호일세. 게다가 사빈은 지켜줄 존재가 따로 있다고.”

“누구?”


“아, 그게···.”

다훤은 입만 벙긋거렸다.

‘그야···. 백하가 시험을 통과했으니까.’


대명천에서 들어오는 길에 그는 아날빛숨을 지나왔다. 사빈은 바삐 움직이면서도 활짝 웃고 있었다.


불과 며칠 만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발그레한 뺨에는 금방이라도 꽃이 필 것 같고,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중간자가 될 때 잃었던 조각을 찾아가는 거라네.’

그러나 다훤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남방홍천의 천마가 들어오지 않았나! 사빈을 아주 잘 따르겠더구먼. 안심하게.”

다훤은 일부러 큰 소리로 답했다.


*


아날빛숨은 설레고 들뜬 분위기로 가득 찼다. 겉으로는 달라진 것이 없으나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들떠 올랐다.


예사달은 지팡이에 기대어 아날빛숨 일 층에서 꼭대기까지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바뀐 것은 없지만 더 밝아졌고, 혼들의 표정도 흥겨웠다. 축제를 앞둔 것 같았다.


“할머니!”

사빈이 달려와 예사달을 꽉 끌어안았다. 예사달의 가녀린 몸이 휘청거렸다.


“소식 들으셨어요? 초연님과 대취님이 드디어 혼례를 올린대요. 산여님과 다담님도 함께요.”


“혼례라니. 이런 때에 무슨···?”

예사달은 말을 멈추었다. 불안한 마음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럽구나. 천인은 부부가 될 때도 겉치레가 없는데?”

“아, 행사는 아니고요. 위즐증가 옥상에서 함께 식사하는 거예요.”


사빈이 흥분해서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예요? 위즐증가와 아날빛숨이 만나면 잔치가 되는 거죠!”


“그런데 왜 지금이냐?”

“해담 대차사님이 조언하셨대요. 함께 할 시간을 늦출 필요 없다고요. 천인에게는 시간이 차고 넘쳐도 아끼고 사랑하는 데 남는 시간은 없다고요.”


“해담이?”

예사달의 눈이 가늘어졌다.


‘불안한 정황을 시끄러운 행사로 가리겠다는 거로군. 혼들에게는 효과가 있겠지만···.’


“그런데 똑같은 말을 두모 대차사님도 하셨대요. 신기하죠?”

“그렇구나. 서로 사랑하면 일찌감치 함께 하는 것이 좋지.”


“천인들의 혼례는 처음 봐요. 밥 한 끼 먹는 거라도 마음이 다르잖아요? 제가 춤을 출 거예요. 혼들도 놀뫼마당에 모여 축하 노래도 부르고, 저와 함께 춤도 추고요.”


사빈은 꿈꾸는 듯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도 혼인할 수 있을까?’

사빈은 두 손을 모으고 볼에 갖다 댔다. 눈앞에 백하가 보였다.


‘엇, 내가 무슨 생각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눈빛이 다시 몽롱해졌다.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마음이 살아나는 걸까?’


“할머니, 예전에는 마음이 어떤 건지 잘 몰랐는데, 조금 알 것 같아요. 전에는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았거든요? 어떨 때는 목부터 가슴까지 콱 막힌 것도 같고.”


사빈은 예사달을 주방 앞 탁자로 이끌었다.

“그런데, 구멍이 조금씩 닫히는 것 같아요. 무겁게 누르던 것은 사라지고요.”

“무슨 일이 있었구나? 좋은 일이냐?”


사빈은 예사달의 귀에 손을 갖다 댔다. 귓속말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대감이 저를 좋아한대요. 제가 마고가 아니어도, 혼이 되어 중천으로 가도 함께 있겠대요.”


사빈의 뺨이 붉어졌다.

그녀의 미소가 함박웃음으로 바뀌는 동안 예사달의 가슴에는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나만의 사빈이었는데···. 다시는 동녘뜰로 가지 않겠구나.’

예사달의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어린 제자에게 날개가 생겼으니 기뻐해야 하는데 왜 서운하고 괴로운지 의아했다.

‘중간자가 되며 사라진 것이 되살아나다니···. 백하의 진심과 정성 때문인가.’


문득 다훤이 얼버무리던 말이 생각났다.

‘사빈은 따로 지켜줄 존재가 있다고.’


예사달은 지팡이를 톡톡 두드리며 조금씩 마음을 추슬렀다.

‘다훤은 알고 있었군. 그래··· 나도 알고 있었는지도···. 인정하기 싫었을 뿐.’


“그믐이 열흘 정도 남았지?”

“예. 혼례도 구경하고, 술도 담글 수 있어요. 할머니 뵈러 온천에 자주 갈게요. 위화님도 봬야 하고.”


“이번 그믐에 나가면 다른 곳도 돌아보며 느긋하게 오려무나. 너의 천력이면 차원의 문도 찾아갈 수 있지?”


“그래도 돼요?”

“그럼. 인간세에서 마고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꽃수 열쇠가 말을 들어야 할 텐데요.”

“이번에는 다를 거다.”


예사달은 사빈을 혼란 속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본 환영대로라면 곧 경고장이 날아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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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그믐_마지막 주술 23.09.03 52 3 12쪽
149 그믐_달맞이 언덕의 뒷골목 +4 23.09.02 43 3 12쪽
148 천계_폭풍 전야 23.09.02 43 2 11쪽
147 천계_비밀회의 +2 23.09.01 42 3 11쪽
146 천계_신성한 땅의 흙 23.09.01 42 3 10쪽
» 천계_돌아오는 마음 23.08.31 43 2 12쪽
144 천계_움트는 비밀 23.08.31 44 3 11쪽
143 천계_신령수 동명 +2 23.08.30 42 3 11쪽
142 천계_두 번째 고백 23.08.30 43 3 12쪽
141 천계_숲센계곡 긔니초 23.08.29 42 2 11쪽
140 천계_반가운 할머니 +2 23.08.29 45 4 11쪽
139 천계_방법을 찾겠습니다 23.08.28 43 3 11쪽
138 천계_에밀레와 나토두 +2 23.08.27 43 3 12쪽
137 천계_떠나는 용희 23.08.26 41 4 11쪽
136 천계_기운을 훔친 대가 23.08.25 43 4 10쪽
135 천계_사라진 혼알방 +2 23.08.24 44 3 12쪽
134 그믐_빛나는 알과 만나다 23.08.23 43 3 8쪽
133 그믐_우주의 미아 +2 23.08.23 43 3 10쪽
132 그믐_소환 23.08.22 42 2 11쪽
131 그믐_대의각 앞마당 23.08.21 42 2 9쪽
130 그믐_증좌를 찾아내다 23.08.21 42 2 9쪽
129 그믐_형감어사 문휘수 23.08.20 43 2 11쪽
128 그믐_별사탕을 어찌 아는가 23.08.19 43 3 11쪽
127 그믐_사람의 눈은 진실을 보지 못한다 23.08.18 43 3 11쪽
126 그믐_판정관 황민 23.08.17 41 2 11쪽
125 그믐_억울한 누명 23.08.16 43 3 11쪽
124 그믐_그들의 비밀 23.08.15 41 4 10쪽
123 그믐_전생을 기억하는 소녀 23.08.14 42 2 11쪽
122 그믐_영함산과 만선상단 23.08.13 41 3 11쪽
121 천계_공조 23.08.12 44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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