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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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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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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98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8.30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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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2쪽

천계_두 번째 고백

DUMMY

바래강은 반다강과 달리 휘돌아 올라가는 곳마저도 잔잔했다.


마음숲 남쪽의 물꽃 호수가 강물이 돌아가는 곳이었다. 호수에서 뻗어 나온 샛강도 유유히 혼알판 사이를 흘러갔다.


사빈은 가장 남쪽의 샛강을 따라 걸었다.

가까이 한긋장벽의 거대한 구름이 꿈틀거렸다. 쿠르릉 천둥 소리도 들렸다.


그녀는 샛강 근처의 혼알판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마음숲의 가장 남쪽, 바래강과 가까운 곳이었다.


‘이 근처에서 제일 많이 사라졌어.’

혼알방이 있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구멍이 막혔는데. 어떻게 가져갔지?’

상상 속에서 수집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들어와서 때가 될 때까지 숨어있는 거야. 혼과 같은 모습이니 다른 혼은 알아차리지 못하지. 밖에는 상산대원이 있고···.’

사빈은 터덜터덜 앞만 보고 걸었다.


그녀는 생각에 빠져 백하가 다가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백하는 사빈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뒤따랐다.


‘숨을 곳은 땅속밖에 없어. 천인들은 상상도 못 하지만, 사람의 기억을 가진 수집가라면 가능해.’

사빈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는 눈을 감고 수집가가 숨을만한 곳으로 생각을 좁혔다.

‘반계와 가까워야 하니 남쪽 어딘가.’


머릿속 지도에서 남쪽만 남겼다.

‘반다강은 아니야. 모든 걸 삼켜 버리니까.’


남동쪽도 떨어져 나갔다.

배웅문이 있는 정남쪽도 아니다. 그곳은 인도자들과 차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소리를 숨기려면···, 구름장벽과 물소리가 큰 곳. 혼이 자주 가지 않는 곳.’


사빈은 눈을 뜨고 남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거기야. 한긋장벽 아래 다름샘!”


“다름샘이 어떻다는 거요?”

“우왁!”

사빈은 팔을 휘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백하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아, 대감이군요. 난 또···.”

“또 뭐요?”

“수집가인 줄 알고···.”


“그들은 마음숲에 없소. 적어도 지금은.”

백하는 고개를 돌려 한긋장벽을 바라보았다.


남쪽으로 몇 걸음만 가면 다름샘이었다.

예전에는 물이 있었으나 한긋장벽에 빨려들어 바닥이 드러났다. 구름장벽에 가려있다가 가끔 구름이 높이 치솟을 때만 바닥이 잠깐 보였다.


백하는 사빈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다름샘을 눈여겨보았다.


“어쩐 일이세요?”

“사빈님을 찾고 있었소.”

“저를요?”


백하가 휘파람을 부니 휘나래가 샛강을 타고 내려왔다. 계속 그를 따라왔기에 바로 옆에서 다가왔다.


그들이 내려앉자 휘나래는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바람이 살랑거리며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빈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듬으며 백하에게 다가가 앉았다.


“대감, 아무래도 수집가들이 다름샘에···.”

“알겠소. 상산대에서 알아보겠소. 사빈님은 이 약부터 드시오.”

“약이요?”


그들 사이에 작은 항아리가 나타났다. 항아리 뚜껑에 물을 따라 마실 수 있었다.


“이건 술통인데요?”

“술을 담으면 술통, 약을 담으면 약통 아니오?”


백하는 뚜껑 가득 약을 따랐다.

맑은 물이 또르르 차오르며 풋풋하고 달큰한 향도 함께 올라왔다.


“긔니초라오. 샛뜸잎과 함께 달였으니 쓰지는 않을 것이오.”

“긔니···.”

사빈은 물끄러미 백하를 바라보았다.


부루와 차미가 말하던 그 긔니초였다.

‘마고에게는 특효약이여. 만병통치약이구먼.’


백하는 사빈의 눈길을 피해 강물을 바라보았다.

“상생농장에서···, 구추님이 주시더군.”

“긔니초를요? 아니면 샛뜸잎을요?”


사빈은 싱긋 웃으며 약을 다 마셨다.

“빙천골에 갔다 오셨다고요?”


“아···. 일이 있어서···.”

백하의 하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사빈은 백하의 머리부터 발까지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영물과 싸워도 다칠 분은 아니지.’


“긔니초도 몇 뿌리 가져왔소. 한요재에 두었소.”

백하가 손을 펼치자 허공에 한요재 뜰과 긔니초가 보였다. 흙도 묻어있으나 제대로 키우려면 맞는 흙이 필요했다.


“중천에서도 잘 자라는 풀이니, 몇 뿌리는 살아남을 것이오.”

“여기서도 자랄까요? 순백초는 상생농장에서도 실패했거든요.”


허공에 떠 있던 긔니초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졌다.


사빈이 손뼉을 쳤다.

“그믐에 나가면 신성한 땅에서 흙을 가져와야겠어요. 단가람이 넘겨준 땅이 있거든요.”


싱글거리다가 이내 시무룩해졌다.

“꽃수 열쇠가 보내주면 좋겠는데···. 제가 고를 수가 없으니 모르겠네요.”


사빈은 허리띠에 매달린 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제가 다시 만든다면 언제라도, 어디라도 필요한 곳으로 갈 수 있게 할 거예요.”


“언제든 가져올 자가 있지 않소? 인도자인지 천사인지 알 수 없는 한얼 말이오.”

백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투가 사빈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늘 으르렁대던 사이가 갑자기 달라지다니?

“두 분이 잘 지내시네요? 예전에는 싸움꾼 같았는데. 지금은 형과 동생 같아요.”


사빈이 눈을 빛내자 백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 그믐에도 인간세에 나가오?”

“그럼요, 다음 마고가 나올 거예요. 어리화가 새까매졌거든요.”

“이번에는 일찍 나가는 것도 좋겠소.”


사빈은 소매를 걷어 어리화를 살펴보았다.

“그것도 마음대로 안 돼요. 지난 그믐에는 정말 이상했어요. 아침부터 나간 건 처음이었어요. 이상한 일도 많았는데···.”


그믐에 겪은 일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황민의 혼과 문휘수는 인간세의 일이지만, 빛나는 알을 만난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휘모랑을 만났을 때 마음숲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자신이 마고인 것도, 그믐 외출이 끝난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사빈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백하가 휘파람을 불었다.


휘나래는 물꽃 호수로 들어섰다.


호숫물이 서서히 바뀌었다. 투명한 물이 노란색에서 붉은빛으로, 보랏빛에서 푸른색으로 서서히 바뀌더니 다시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우와, 대감, 이것 좀 보세요.”

사빈은 놀라 호수를 내려보다가 키득거렸다.

“대감이 이런 술법도 쓸 줄 아세요?”


물꽃 호수를 바라보던 백하가 사빈에게로 돌아앉았다.

“가시버시날 한 말 기억하오?”


“예. 그날 아움을 주셨지요.”

“내 마음은 그때와 같소. 사빈님 덕분에 내가 바뀌었으니 고맙고, 곁에 있고 싶을 뿐이오.”


사빈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늘 마음에 남아있었다.


‘그대를 사모하오. 사랑을 못 느끼는 것도, 마음숲을 떠날 것도 알고 있소. 그게 무슨 상관이오? 그대가 어디 있든 찾아가면 되는 것을.’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뜨거워지고 뺨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예전처럼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 마고가 오면 어디로 갈지 모르잖아요?”

“어디든 상관없소. 나도 그곳으로 갈 테니.”

“제 모습이 달라지면요?”


백하는 항아리를 두드렸다.

“항아리나 자루와 같지 않소? 겉은 다르지만, 속은 똑같은 약이라오.”


“이미 수명을 다했다면요?”

“혼을 따라가면 되오. 무결의 고리에 들어도 상관없소. 그저 지켜주고 싶소.”


“상산대는 어쩌고요?”

“능력자가 많소. 운와만 해도 충분히 차고 넘치오.”

그의 말에 사빈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운와의 천력이라면 상산대감에도 어울렸다.


사빈의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중간자가 될 때 약속한 일이 있어요. 그 일을 끝내고 대답해도 되지요?”

“좋은 답이오?”


사빈이 싱긋 웃었다.

“좋을 거예요.”


백하는 호수 건너 바래강으로 눈길을 돌렸다.

가슴이 벅차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스산했다. 어둠과 빛이 함께 들어찼다.

‘그 대답을 들을 수 있기를···.’


사빈은 백하의 소매를 잡았다.

”아움을 제대로 쓰고 싶어요. 검술을 가르쳐주신다고 하셨죠?“


”이번 그믐이 지나면···.“

백하는 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


대취는 아날빛숨 주방을 종종거렸다.

아직 도우미가 오지 않아 초연과 함께 찻잎을 손질하느라 정신없었다.


산여가 혀를 끌끌 찼다. 밖에는 인간세로 떠날 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봐, 자네는 인도자야. 일부터 하라고.“


”워디, 혼은 자네도 있고 한얼도 있지만, 초연에게는 나뿐인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대취는 앞치마를 벗었다. 초연이 앞치마를 받아 들었다.


사빈도 혼을 배웅하기 위해 문 앞으로 나갔다.

”대취님, 힘드시죠?“

”아니여. 사랑하는 반쪽과 함께 있는디 뭐시 힘드나. 을매나 행복한디. 헤헤.“


대취는 싱글거리며 아날빛숨을 나섰다.


한얼도 이미 준비를 끝내고 혼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무게 있고, 점잖았다. 연륜이 쌓인 듯 눈빛이 깊었다.


사빈은 그에게 다가갔다.

”한얼님, 인간세에 가시면 흙을 좀 가져다주세요.“


”신성한 땅의 흙이 필요하시다고요?“

”어떻게 아세요?“

“상산대감이 부탁했습니다. 사빈님이 긔니초를 키울 거라고.”


사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감이 그런 말까지 한다고요? 한얼님께?”

“사빈님을 위한 일이니 꼭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비장할 것까지는 없고요, 시간이 되면···.”

사빈이 우물쭈물 말했지만, 한얼은 쓸쓸히 웃었다.


대취와 산여가 앞장서고, 일곱 혼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 뒤를 한얼과 사빈이 따라갔다.


배웅문이 보이자 한얼이 작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빛글이 담긴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사빈님, 지난번에 외길과 산돌의 혼을 보았다고 하셨죠. 그때 수명환을 받은 다른 환자 기억하십니까?”


“그럼요. 수명환이 직접 나선 건 처음이었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이것도 반가우실 겁니다.”

한얼은 산여를 바짝 쫓아가는 혼을 가리켰다. 그 혼은 기대에 부풀어 발걸음도 가벼웠다.


혼을 바라보며 접힌 종이를 펼쳤다. 다 펼치기도 전에 글자에서 빛이 났다.

- 아버지는 온결찬, 어머니는 오샘차라 -


“우와! 우와!”

사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한얼을 바라보았다.


“정말 잘 되었어요. 영감들이 약속을 지켰네요. 어?”

사빈이 종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되었나요? 너무 빠른데요?”

“보통은 아기가 들어선 다음에 가는데, 이건 특별합니다. 수명환이 직접 찾아갔으니까요. 혼이 먼저 내려가서 준비할 겁니다.”


“미래의 아기가 함께 하는 거네요. 영감들이 더 신나겠는걸요?”

“인간세의 지박령이나 바람잡이도 사빈님을 기다리나 봅니다.”


“예. 다른 마고는 천력이 넘치니 영감이 필요 없거든요. 저는 꼭 도움을 받아야 하고요. 소중한 이들이지요.”


한얼은 걸음을 멈추고 마주 보고 섰다.

“사빈님. 이번 그믐에도 꼭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한얼님께는 꼭 들려드릴게요.”

사빈이 환하게 웃으며 온결찬의 아이로 태어날 혼을 바라보았다.


“예. 눈꽃 누이.”

한얼은 배웅문을 향해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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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그믐_마지막 주술 23.09.03 52 3 12쪽
149 그믐_달맞이 언덕의 뒷골목 +4 23.09.02 43 3 12쪽
148 천계_폭풍 전야 23.09.02 42 2 11쪽
147 천계_비밀회의 +2 23.09.01 42 3 11쪽
146 천계_신성한 땅의 흙 23.09.01 42 3 10쪽
145 천계_돌아오는 마음 23.08.31 42 2 12쪽
144 천계_움트는 비밀 23.08.31 44 3 11쪽
143 천계_신령수 동명 +2 23.08.30 42 3 11쪽
» 천계_두 번째 고백 23.08.30 43 3 12쪽
141 천계_숲센계곡 긔니초 23.08.29 42 2 11쪽
140 천계_반가운 할머니 +2 23.08.29 44 4 11쪽
139 천계_방법을 찾겠습니다 23.08.28 43 3 11쪽
138 천계_에밀레와 나토두 +2 23.08.27 43 3 12쪽
137 천계_떠나는 용희 23.08.26 41 4 11쪽
136 천계_기운을 훔친 대가 23.08.25 43 4 10쪽
135 천계_사라진 혼알방 +2 23.08.24 44 3 12쪽
134 그믐_빛나는 알과 만나다 23.08.23 43 3 8쪽
133 그믐_우주의 미아 +2 23.08.23 43 3 10쪽
132 그믐_소환 23.08.22 42 2 11쪽
131 그믐_대의각 앞마당 23.08.21 42 2 9쪽
130 그믐_증좌를 찾아내다 23.08.21 42 2 9쪽
129 그믐_형감어사 문휘수 23.08.20 43 2 11쪽
128 그믐_별사탕을 어찌 아는가 23.08.19 43 3 11쪽
127 그믐_사람의 눈은 진실을 보지 못한다 23.08.18 43 3 11쪽
126 그믐_판정관 황민 23.08.17 41 2 11쪽
125 그믐_억울한 누명 23.08.16 42 3 11쪽
124 그믐_그들의 비밀 23.08.15 41 4 10쪽
123 그믐_전생을 기억하는 소녀 23.08.14 42 2 11쪽
122 그믐_영함산과 만선상단 23.08.13 41 3 11쪽
121 천계_공조 23.08.12 44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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