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_빛나는 알과 만나다
둥그스름한 알이 은은한 빛을 냈다.
나와 나토두를 삼키고도 남을 정도로 큰 빛 덩어리였다.
반죽처럼도 보였고, 흐느적거리는 공처럼도 보였다. 안에 또 다른 작은 알을 품고 있었다.
나토두는 허공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천마의 등에서 내려 빛나는 알을 향해 몇 걸음 다가갔다.
더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알이 보이는 곳까지가 한계였다.
그것은 차원의 경계 밖에 있었다.
흐느적거리며 물컹거리는 가장자리 너머, 경계에 맞물려있었다.
빛나는 알이 꾸물거리며 소리를 냈다.
”미사···랑?“
알이 쿨럭거리면서 웃음 비슷한 소리가 나왔다.
”후후, 그럴 리가 없지. 그 아이는 다른 차원이었지.“
예사달 할머니가 뭐라고 하셨더라?
‘수리마루 정명님일지도 모른다고 하셨나? 다른 차원의 존재? 어쨌든 요물은 아니라고 하셨어.’
빛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수리마루 정명님이신가요?”
“아니다. 너희는 그를 수리마루 정명이라 부르는구나.”
“수리마루님이 아니라고요?”
“너희는 절대로 그를 볼 수 없다. 네게 달린 눈썹이 온전한 너를 볼 수 있는가?”
“제 몸에 달린 줄도 모르겠죠.”
“어디에나 있으나 어디서도 볼 수 없지. 네가 그 속에 녹아있으니.”
빛나는 알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안에도 있고, 너의 바깥에도 있다. 있으나 만날 수 없는 존재이다.”
알이 갑자기 후후 소리를 냈다. 웃느라 처음보다 심하게 쿨렁거렸다.
“이쪽 차원의 정명은 가끔 몸을 얻어 태어나더군. 구경꾼처럼 들어갔다 나오지.”
“수리마루님을 아세요?”
“하하, 네가 모른다고? 음···. 그럴 수도.”
빛나는 알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은은한 빛이 한 줄기로 모이더니 나와 나토두를 비추었다.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는 그의 마음이지.”
빛줄기가 가늘어지며 나토두를 비추었다. 나토두가 눈썹을 실룩거렸다.
‘눈이 부실 정도는 아닌데···. 천마에게는 너무 밝은가?’
손을 뻗어 나토두의 눈을 가려주었다.
“네가 상상 못 할 모습으로 구경하다 갈 테지. 어쩌면 네 옆에 있을 수도.”
“당신은 누구인가요? 이쪽 차원의 존재가 아니죠? 이계의 요물인가요?”
“하! 이계의 요물!”
빛 덩어리가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심하게 꿈틀대며 웃음소리도 커졌다.
“난 휘모랑이다. 다음 차원을 열기 위해 기다리고 있지.”
휘모랑이 품고 있는 작은 알도 빛을 내뿜었다. 휘모랑보다 약했지만, 더 깨끗하고 맑아 보였다.
“내가 기다리던 신호가 이것인가?”
알에서 나오는 빛이 나토두의 날개에 머물렀다.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구나. 나는 다시 시작한다. 나의 연인과 함께.”
“저기···,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뭘 알고 싶으냐?”
“신호라니요? 새로운 차원은 뭐고, 누구를 기다렸다는 건지···.”
“하나의 차원이 닫히면 다른 차원이 생겨난다. 나는 새로운 차원의 씨앗이자 심부름꾼이다. 너희가 생각하는 수리마루와 비슷하지.”
“당신이 신인가요?”
“아니, 나는 정수일 뿐, 신은 아니다. 꼭 신을 만들어야 한다면 차원 자체가 신일 수도.”
“수리마루는 앞날을 내다보고 세상 끝까지 다 안다고 했는데요?”
“차원이 열리는 순간, 처음과 끝, 모든 시간과 공간이 그 안에 있다. 아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지.”
“한순간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본다고요?”
“너는 이해할 수 없다. 허긴···.”
빛줄기가 나토두의 날개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나토두의 날개가 아름답게 빛났다.
“일단 몸을 입으면 천인이나 다름없어. 마음대로 못 하거든.”
휘모랑의 빛이 내 가슴으로 움직였다.
“너는···.”
한 줄기 빛이 부채처럼 퍼지며 밝아졌다.
“이토록 약한 기운으로 여기까지 오다니···. 다른 차원의 아이가 생각나는구나. 연약하면서도 강한 아이였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보고, 숨 자체가 사명이었던 아이. 너도 그렇구나.”
휘모랑의 웅얼거림은 주술처럼 들렸다.
“내게 신호를 가져다주었으니 보답을 해야겠지. 너는 누구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뜬금없이?
“저는 대명천 마음숲의 마고 사빈이에요.”
“무엇을 하고 싶으냐?”
“하고 싶은 거야 많죠. 마음숲을 평화롭게 지키고 싶고, 다음 마고도 찾고 싶고, 반계의 마눙님과 이루님도 돕고 싶고, 중천도 되살리고 싶고···.”
손가락을 하나씩 구부리다 보니 손이 모자랐다.
‘예사달 할머니와 다훤 아저씨도 돌봐드려야 하고, 얼음 대감과 한얼도 도와야 하고, 또 뭐가 있더라? 아, 파라다이스 빌라에 가서 차원의 문지기도 되고 싶고, 동녘뜰도 가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이 줄줄이 생각났다.
나토두가 날개를 펄럭이면서 앞다리를 들어 올렸다.
빛 속에서 머리와 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치 빛나는 알과 말하는 것 같았다.
“간절함만으로 되는 일은 없다.”
“에? 왜 물어보셨어요?”
“알려줄 것이 있다. 하얀 나무와 붉은 구슬에 대해.”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얀 나무와 붉은 구슬이라고?
“진짜 그 하얀 나무와 붉은 구슬요?”
“가장자리에 떠다니고 있다. 이곳으로 지나간 적도 있지.”
“경계를 따라 쭉 둘러보면 되겠네요?”
“현재의 가장자리라고는 하지 않았다.”
“예? 그것도 시간의 덫에 걸렸다고요?”
“네가 찾아야 하는 조각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 걸 어떻게 아세요?”
“무슨 일이든 그 안에 있는 자는 제대로 볼 수 없지. 이방인에게는 보인다.”
“어디 가야 만날 수 있죠?”
휘모랑의 빛이 알 속으로 숨었다가 다시 밖으로 번져 나왔다. 빛이 숨을 쉬듯 퍼졌다 오므라들었다.
나토두가 앞발을 굴렀다.
“사빈님, 빛나는 알이 떠나려고 해요.”
“떠나다니? 어디로?”
“새로운 차원을 연다고 했잖아요?”
“응? 나한테 보답한다면서?”
빛나는 알을 바라보았다. 빛은 계속 가라앉았다가 솟아 나왔다.
“잠깐만요. 그걸 어디서 찾나요? 어떻게요?”
알에서 한 줄기 빛이 길게 뻗었다. 그 빛이 내 가슴에 와닿았다.
“볼 수 있는 눈을 받았으니 곧 보일 거다. 네가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쳇! 뭔 소리야?’
잉걸둥지나 빛나는 알이나 알처럼 생긴 것은 다 두루뭉술하게 말해?
말의 껍질에 갇힌 것처럼 웅얼거리고, 밑도 끝도 없고,
“네가 할 일을 하다 보면 수리마루를 알 수 있을 거다. 그가 널 선택했다.”
“그러니까요. 그 할 일이 뭐냐고요?”
“너는 그것 때문에 선택되었다. 너의 진짜 사명도 열릴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한 일은 뭐고요?”
듣고 싶은 답은 들을 수 없었다.
알은 빛을 삼키더니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 자리에 깊은 어둠만 남았다.
“나토두, 여기 뭔가 있었지?”
“예. 빛나는 알이 있었습니다.”
“어디로 갔어?”
“할 일을 하러 갔겠죠.”
나토두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라? 너도 휘모랑이랑 똑같이 말하네. 그새 말투까지 배웠어?”
“돌멩이 밟았다 생각하십시오. 사빈님은 할 일이 있으니까요.”
“어쩜, 똑같이 따라 하는구나.”
‘할 일···. 나 뭐 할 일이 있었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딱 멈췄다.
“우왁! 마음숲!”
나토두의 등으로 훌쩍 올라탔다.
“꽃수 열쇠는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얼마나 지났지?”
“그믐을 훨씬 넘겼을 겁니다.”
마음숲이 어수선하겠구나.
바나는 종종거릴 테고, 초연님과 용희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겠지.
차사님들과 상산대원들도 걱정할 거고. 얼음대감이 많이 걱정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마음숲은 괜찮을까?”
“괜찮지 않아도 괜찮을 겁니다.”
나토두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