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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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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259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8.22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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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그믐_소환

DUMMY

어스름이 깔렸지만,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계속되었다.


위판 신용무는 성주와 칼을 겨누었다. 군관 양한은 심하게 다쳤으나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이 아수라장에서 황민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주저앉아 움직일 줄 몰랐다.

해령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하랑···. 그렇게 약속했건만···. 그대를 몰라보고.”

황민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군졸의 다리를 물고 늘어지던 바나가 휙 돌아섰다. 씩씩거리며 내게 눈을 부라렸다.

“주인님, 저쪽 좀 치워주셔라. 위험하여라.”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나는 황민에게 다가갔다.


‘몸을 떠나는 순간에야 혼빛을 알아보다니.’

사람의 눈은 몸에 갇혀서 무엇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어버린다.


황민은 옷과 뺨으로 핏물이 튀는 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미안하오. 허상만 믿고, 그대를 보지 못했소.”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옆에 앉았다.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판정관님 잘못이 아닙니다.”


“하랑도, 민도령도 알고 있었소. 해와 초승달 무늬도 있었소. 그런데도 난 믿지 못했소. 꿈에서 보던 모습과 너무 달라서···.”


황민은 해령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 때문이오. 나를 만나러 왔는데 알아보지 못하고···.”


“그토록 괴로우면··· 마음껏 괴로워하세요.”

나는 그를 위해 결계를 쳤다.


그가 자신을 거부하고, 의심하니 마고의 술법도 가능해졌다.

거부의 결계는 사람에 속한 것은 들어오지 못한다. 몸도, 화살도, 칼날도.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신을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하랑을 위해서도 새로운 삶을 살아야죠.”


황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이승을 떠나 당신을 만난다면··· 그때는 달라질까.”


‘나를 다시 만날 때까지?’

중천에서의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혼의 형상도 뭉그러졌고, 삼도천 때문에 기억도 지워졌으니 당연하겠지.


만약 중천에서 다시 만나면 나를 알아볼까?


일어서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슬퍼하십시오. 그 슬픔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저를 다시 만날 때까지만 슬퍼하십시오.”


결계 밖으로 나오자마자 눈앞으로 칼날이 휙 지나갔다.


“허억!”

순간 몸이 굳었다.


상대가 내게로 돌아섰을 때 다른 이가 칼을 막았다. 챙그랑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비키시오.”

우룡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가볍게 상대를 쓰러뜨리고 다른 이들을 향해 나아갔다.


나는 대의각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이 쓰러져있었다. 미사홀파든 구본성의 군졸이든 겉모습은 똑같았다.


싸움터란 볼 것이 못 된다. 인간세에서 수없이 보았으면서도 볼 때마다 역겨워진다.


상단 사람들은 손이 묶인 채 구석으로 몰려가 있었다. 웅크리고 앉아 두려움에 떨었다.

한쪽에서는 군관 양한이 칼에 맞아 쓰러졌다.


신용무는 상처를 입었지만, 여전히 이를 갈았다. 성주도 땀에 젖어 숨을 몰아쉬었다.

미사홀파의 군졸은 몇 명 남지 않았다. 그들은 칼을 내던지고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이제 끝났나?’

대의각 주변을 돌아보는데, 담장 밖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담장을 넘어 검붉은 옷의 무사 수십 명이 대의각 마당으로 내려섰다.


‘무명?’

그는 무명이 아니었다.


첫날, 움막 앞에 무명과 같이 있던 또 다른 무사, 둘 중 젊은 사람이었다.

구본성 뒷산 오두막에 있던 그 무명은 보이지 않았다.


‘복병이 또 있어?’

나는 젊은 무사를 노려보았다.


그의 소매와 옷자락이 피로 젖어있었다. 그가 든 검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명이 갖고 있던 보검이었다.


‘몰라도 좋은 것까지 보이다니. 마고의 눈이 늘 좋은 건 아니야.’

한숨이 나왔다.


“구본성은 미사홀님의 것이다!”

그는 아랫입술을 엄지로 쓰윽 닦았다.


“신왕의 군대가 두렵지 않으냐?”

우룡이 그들을 향해 호통쳤다.


“나는 내 길을 갈 뿐이다. 주군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

젊은 무사는 칼을 빼어 들고 성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무사답게!”


우룡이 성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래에서 위로 칼날을 들어 올려 무사의 칼을 쳐냈다.

바나가 크르릉거리며 그들 주변을 맴돌았다.


우룡과 무사의 칼날이 부딪치기를 수십 번, 무사의 손이 흔들렸다.

바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뛰어올라 그의 팔을 덥석 물었다.


“으악!”

무사가 소리치자 우룡이 칼을 휘둘렀다. 그의 가슴에서 배로 칼날이 번뜩였다.


나는 치를 떨며 고개를 돌렸다. 상단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검붉은 무사가 보였다.


‘도와야 해!’

군졸의 시체를 뛰어넘는데 다른 무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의 칼도, 그의 몸도 스르르 바닥으로 쓰러졌다. 동범이 그의 뒤에 있었다.


그가 소리쳤다.

“뭐하시오? 어사님이 걱정하시오.”

“걱정한다고요?”


“인연이란 그런 거 아니겠소?”

동범은 군졸을 도우러 앞으로 뛰어나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순간에 얼어붙어 있다니.


“아움!”

허공에서 얼음칼 아움을 꺼내 들었다. 아움을 잡고 칼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옮겼다.


아움은 자신의 방식대로 움직이며 무사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얗고 눈부신 칼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뿜었다.


아움이라면 혼자서도 대여섯 명을 상대하겠지만, 마고는 사람을 죽일 수 없으니 공격을 피하는 것이 전부였다.


바나가 날 듯이 뛰어왔다. 무사의 어깨를 물어 잡아당기고 마당 저편으로 집어 던졌다.


나는 사람들의 묶인 손을 풀어주었다.

“빨리 피하세요. 이쪽 담장을 따라가면 해원루가 있어요. 거기서 기다리세요.”


그중에서 젊은 사람의 팔을 잡았다.

“다니며 횃불을 밝혀주세요. 곧 어두워집니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불을 밝히러 갔고, 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담장을 따라 내려갔다.


나는 동범과 우룡이 싸우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나! 도우러 가자.”

“컹컹, 알겠어라.”


발을 내딛는데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꽃수 열쇠가 부른 것이다.

‘어? 벌써? 나 천력도 그대로고, 아무렇지 않은데?’


손에 쥐고 있던 아움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렸지만, 땅에서 멀어질 뿐이었다.

‘아직 시간도 남았다고!’


“주인님, 벌써 갈 때여라?”

바나도 둥둥 떠올랐다. 거대한 삽살개에서 흰 털뭉치로 돌아왔다.


노리개의 헝겊꽃을 두드렸다.

“꽃수 열쇠! 뭔가 착각한 거야! 지금은 셋째 날이라고!”


내 몸이 서서히 투명해졌다. 대의각 지붕이 발아래 있었다.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상처 입은 군졸들이 마당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황민은 여전히 결계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상단 사람들이 횃불에 하나씩 불을 밝혔다.


나는 점점 높이 올라갔다.


‘문휘수는?’

구본성을 내려다보았다.


소매 안에 있던 목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을 뻗었지만 목패는 땅에 달라붙듯 가라앉았다.


“저기 대장이어라. 왕왕.”

바나가 컹컹 짖었다.


문휘수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의 뒤를 백여 명의 군사가 따르고 있었다.


‘별사탕이자 문휘수···. 혼 조각을 나눈 한얼. 이렇게 다시 보는구나.’

이제는 한얼을 생각해도 따끔거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 것인 양 아무렇지 않았다.


조금 더 올라서자 인간세가 희미해졌다.

마지막까지 마당 한가운데 떨어진 목패만 또렷하게 보였다.


*


삼도천이 보였다. 삼도천 너머 한긋장벽이 넘실거렸다.


‘이번 외출은 너무 정신없네. 아침부터 불려 나가지를 않나, 사흘 만에 돌아오지를 않나. 이상해, 정말 이상하다고.’


한긋장벽의 구름 사이로 배웅문의 청록색 지붕이 언뜻 보였다.


“주인님, 마음숲이어라.”

바나가 꼬리를 흔들었다.


일렁이던 마음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만날 사람은 다 만났어. 황민도 만나고 한얼이 누구였는지도 알았고.’


마음숲으로 들어가려는데 투명한 결계가 물컹거렸다.


“응? 이건 뭐야?”

허공에 멈춘 발이 파도를 타듯 출렁거렸다.


힘껏 결계 속으로 뛰어들었다.

결계가 고무공처럼 내려앉았다 부풀면서 내 몸은 삼도천 근처까지 퉁겨졌다.


다시 돌아가 살며시 손을 밀어 넣었다. 결계는 몰랑거렸지만, 손가락 끝도 들어가지 않았다.


바나는 벌써 아날빛숨의 지붕 위를 날고 있었다.

“주인님! 빨리 오셔라!”


바나가 왕왕거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마음숲이 마고를 거부해?”

마고의 반지를 꽉 쥐고 몸에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들어가리라.


결계를 향해 있는 힘껏 뛰어들었다.


뛰어든 힘만큼, 그보다 더 큰 힘으로 결계가 나를 퉁겨냈다.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아날빛숨도 보이고, 마당에 내려앉은 바나도 보였다.

바나가 나를 보며 짖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느새 대명천 밖으로 벗어났다. 결계의 반대편, 우주 어디선가 나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중앙황천도 벗어났다. 허공에 매달린 자세로, 천계를 내려다보며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었다.


움직이려고 했지만, 팔도 발도 말을 듣지 않았다. 방향을 바꿀 수도 없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그믐 외출이 이럴 줄은 몰랐는데.


두렵지는 않았다. 마음이 들뜨고 심장이 빨리 뛰기는 해도 무섭지 않았다.


빠르게 천계를 벗어났다. 이곳은 동녘뜰로 가는 길과 비슷했다.

‘이대로 동녘뜰까지 가는 건가?’


멀리 큰 별들이 타올랐다. 여기저기서 별이 튀고 부딪쳤지만, 깊고 고요한 어둠이었다.

나는 하염없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딘가 끝은 있겠지?’

왼손으로는 마고의 반지를 쥐고 오른손으로는 꽃수 열쇠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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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그믐_달맞이 언덕의 뒷골목 +4 23.09.02 43 3 12쪽
148 천계_폭풍 전야 23.09.02 43 2 11쪽
147 천계_비밀회의 +2 23.09.01 42 3 11쪽
146 천계_신성한 땅의 흙 23.09.01 43 3 10쪽
145 천계_돌아오는 마음 23.08.31 43 2 12쪽
144 천계_움트는 비밀 23.08.31 45 3 11쪽
143 천계_신령수 동명 +2 23.08.30 42 3 11쪽
142 천계_두 번째 고백 23.08.30 43 3 12쪽
141 천계_숲센계곡 긔니초 23.08.29 43 2 11쪽
140 천계_반가운 할머니 +2 23.08.29 45 4 11쪽
139 천계_방법을 찾겠습니다 23.08.28 43 3 11쪽
138 천계_에밀레와 나토두 +2 23.08.27 43 3 12쪽
137 천계_떠나는 용희 23.08.26 41 4 11쪽
136 천계_기운을 훔친 대가 23.08.25 44 4 10쪽
135 천계_사라진 혼알방 +2 23.08.24 44 3 12쪽
134 그믐_빛나는 알과 만나다 23.08.23 44 3 8쪽
133 그믐_우주의 미아 +2 23.08.23 43 3 10쪽
» 그믐_소환 23.08.22 43 2 11쪽
131 그믐_대의각 앞마당 23.08.21 42 2 9쪽
130 그믐_증좌를 찾아내다 23.08.21 42 2 9쪽
129 그믐_형감어사 문휘수 23.08.20 43 2 11쪽
128 그믐_별사탕을 어찌 아는가 23.08.19 43 3 11쪽
127 그믐_사람의 눈은 진실을 보지 못한다 23.08.18 43 3 11쪽
126 그믐_판정관 황민 23.08.17 41 2 11쪽
125 그믐_억울한 누명 23.08.16 43 3 11쪽
124 그믐_그들의 비밀 23.08.15 42 4 10쪽
123 그믐_전생을 기억하는 소녀 23.08.14 42 2 11쪽
122 그믐_영함산과 만선상단 23.08.13 41 3 11쪽
121 천계_공조 23.08.12 44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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