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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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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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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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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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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천계_숲센계곡 긔니초

DUMMY

숲센계곡의 골짜기는 차갑게 얼어붙었고, 얼지 않은 곳은 메마르고 거칠었다.


빙천골에도 능금원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길도 찾기 어려웠다.


백하는 기억을 더듬으며 이리저리 길을 헤맸다.

땅이 얼어붙고 모래와 자갈로 덮였지만, 간신히 흔적을 찾아냈다.


옷자락은 찢어지고 더러워졌다. 흙과 먼지가 달라붙었지만, 거기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빨리 긔니초를 찾아야 했다. 마음숲과 상산대를 오래 비울 수 없었다.


그가 긔니초를 알게 된 것은 예님이 마고를 맡았을 때였다.

백하는 그녀보다 이전 마고인 시나래 때부터 상산대감이었다.


시나래는 어렵지 않게 다음 마고로 예님을 찾아냈기에, 백하는 어리화가 나타나면 후계자가 곧바로 나타나는 줄 알았다.


예님은 그렇지 못했다.

어리화가 피고 일곱 번째 그믐 만에 다음 마고인 하늬를 찾아냈다.


예님도 처음에는 멀쩡했다. 네 번째 그믐부터 천력이 약해지더니 다섯 번째 그믐이 지나자 급격히 쇠약해졌다.


잠에 빠져있거나 기운이 부족해 꾸벅거렸다. 때로는 날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했다.

부족한 천력을 억지로 꺼내다 보니 점점 수척해졌고, 혼빛도 탁해졌다.


“사빈님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돼.”

백하는 얼음덩어리와 마른 넝쿨을 쳐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예님이 알아낸 처방이 긔니초였다. 마고에게는 최고의 보약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마고의 반지를 낀 자를 위한 약이었다.


씨앗과 꽃, 뿌리와 잎이 온전히 필요했다. 그것을 샛뜸잎과 함께 달여 먹으면 원래의 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때는 예님도, 상생농장에서도 빙천골을 몰랐기에 중앙황천의 동쪽 위례산에서 긔니초를 찾아왔다.


이제는 위례산에 긔니초가 자라지 않는다.

긔니초는 살아있는 짐승처럼 좋은 자리로 옮겨 자라는데 빙천골이 가장 좋은 자리였다.


능금원에 천인 엄장의 천력까지 더해지니 거기서 자라는 긔니초는 튼튼하고 윤기가 흘렀다. 절벽을 따라 빼곡히 자라곤 했다.


‘사빈님은 그믐이 몇 번 남았지?’

백하는 능금원의 결계가 있던 자리에서 멈추었다.


“이야압!”

온몸의 기운을 모아 한 번에 뿜어냈다.


차가운 기운이 칼날이 되어 마른 넝쿨을 끊어냈다. 결계의 흔적을 따라 능금원 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백하는 서둘러 절벽을 따라 날아올랐다.


능금원은 맞지만, 살아있는 긔니초는 보이지 않았다. 마른 줄기만 남아 한때 풀이 자랐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너무 많이 변했어. 하나도 남지않다니.’

그래도 멀지 가지 못했을 것이다. 어딘가 빙천골과 비슷한 곳에서 자라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많이 불고, 서늘하며, 햇빛이 너무 세지도 그늘도 아닌 곳. 얼음산이어도 땅이 얼지 않은 곳.

그런 곳이라면 빙천골에서 멀지 않은 남쪽에도 있었다.


*


예상대로 긔니초 밭을 찾아냈다. 백하는 뿌리가 움켜쥔 흙덩이까지 그대로 떼어냈다.


‘이대로 보내면 긔니초를 키우겠지? 언제 다시 필요해질지 모르니.’

명랑하고 활발한 사빈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하니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손목을 돌리자 바람 한 줄기가 그 앞에 머물렀다. 그는 긔니초를 바람에 올린 다음 하늘로 날려 보냈다.


바람은 곧장 한요재로 날아갔다.


‘서두르자. 너무 오래 마음숲을 비웠어.’

그도 바람에 몸을 실었다. 어디선가 신음이 들렸다.


천인의 소리가 아니었다. 짐승도 아니었다.

‘영물인가?’

숲센계곡에서 천인과 짐승이 아닌 존재라면 영물밖에 없었다.


백하는 소리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바위 뒤에 갈색과 미색의 털이 섞인 곰 영물이 몇 마리나 쓰러져있었다.


원래는 흰 곰이었으나 미틈오름이 지나면서 모습이 바뀌었다. 다른 짐승의 여러 기운이 섞여 머리에는 뿔이 달리고, 꼬리가 길어졌다.


다른 영물은 모두 죽었으나 한 마리는 숨이 붙어있었다.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 있었어?”

‘우우웅, 웅웅.’

영물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냈다.


백하는 영물의 상처에 손을 갖다 댔다. 날카로운 것에 베인 상처였다.

“칼?”


그는 한편으로 상처를 살피면서 영물의 몸에 천력을 불어넣었다. 상처가 조금씩 아물었다.


다른 영물의 상처도 베이고 찔린 자국이었다.

‘천인은 아니다. 피천귀도 아니야. 그들은 무기를 쓰지 않아.’


영물은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상대를 해치지 않기에 천인들은 영물을 건드리지 않는다.


피천귀는 몸으로 공격하기에 그들이 남긴 상처는 투박하고 거칠었다. 몸에서 튀어나온 부분을 손이나 팔처럼 쓰고 물어뜯기에 예리한 상처는 남지 않는다.


‘피가 엉겨 붙은 지 얼마 안 되었어. 이 근처에 있겠군.’


그사이 살아난 영물은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했다. 앞발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켰다.


‘웅, 우우웅, 우웅.’

앞발을 휘두르며 검을 흉내 냈다. 또다시 서북쪽 오솔길을 가리켰다.


“알았다. 너는 잘 숨어있거라. 그놈들과 다시 엮이지 말고.”

백하는 영물의 등을 쓰다듬고 오솔길로 들어섰다.


드문드문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사람의 맨발과 같은 모양이었다.


“사람의 발자국?”

백하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살펴보았다.

‘산 사람이 여기 들어올 리 없는데.’


발자국 사이의 넓이로 보아 걸어간 것이 아니었다. 날아가다가 잠깐 내려앉은 자국이었다.

‘이건 사람의 모습을 한 어떤···.’


문득 사빈의 목소리가 울렸다.

‘대감, 수집가예요.’


백하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들은 조금 전에 이곳을 지나갔다. 근처에 있을 것이다.


*


나무가 무성하고 수풀이 우거진 곳이었다. 숲센계곡은 온통 얼어붙었지만, 군데군데 숲이 남아있었다.


두런거리는 소리는 울창한 숲속에서 들렸다.


“그럴 줄 알았어. 흥, 금방 잊어버릴 테니. 그때 다시 움직이면 돼.”

“이러면 되는걸. 왜 감여지만 고집해?”

“크크크, 마음숲은 우리 건가?”


‘마음숲?’

백하는 기척을 내지 않고 다가갔다.


이십여 명의 영혼수집가가 서거나 앉아있었다.

해날품곡에서 한얼을 공격하던 그 수집가들이었다. 인간세의 사람과 똑같이 생긴.


장검을 차고 방패를 들었다. 도끼나 낫을 가진 수집가도 있었다.

모두 비슷하게 생겨 구별할 수 없었다. 한 배에서 나온 쌍둥이들 같았다.


“겁쟁이들과는 상대 안 해. 마눙의 끄나풀이나 다름없어.”

“맞아. 우리가 마음숲을 차지하고 황천까지 가져야지.”

“혼알방은 숨겼지만···, 언제 깨어나려나?”

“급한 거 없어.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


“마눙이 깨어나지는 않겠지?”

“아직 멀었어. 상처가 아주 크니까.”

“그래도 빨리 끝내. 마눙이 깨어나면 우리 힘을 다 가져간다.”

“깨어나지 못하게 하자.”


“그런데, 어째 바람이 서늘하지 않나?”

수집가 하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백하는 숨을 죽이고 나무 뒤에 몸을 감추었다.


그들과 싸워보지 않았다면 벌써 달려나갔겠지만, 그들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가까이 또 다른 수집가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해담 대차사와 상산대에게 전하려면 적어도 마음숲까지 살아서 돌아가야 했다.


“혼을 반인으로 만들고, 그놈들도 반인으로 만들자.”

“우리야말로 초인이다!”

하나가 소리치자 다른 수집가들이 따라서 외쳤다.


“신제도 우리에게 꼼짝 못 한다!”

“천계는 우리 거야!”

“인간세도 우리 거다! 아하하.”


이십여 마리의 수집가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믐마다 마음숲 기운이 흐트러진다. 이번에 쳐들어가자.”

“혼알방을 왕창 가지고 나오자!”


“가자!”

수집가들은 저마다 무기를 들고 하늘을 향해 들썩거렸다.

벌떡 일어나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숲을 건너뛰어 남쪽으로 사라졌다.


백하는 분노에 휩싸여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


백하는 마음숲으로 돌아온 지 이틀 만에 상생농장을 찾았다.


농장은 언제나 푸르고 생명력이 넘쳤다. 숲센계곡과는 달리 꽃향기가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백하는 향기를 따라 넓은 뜰을 바라보았으나 이번 그믐을 생각하니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요재에서는 수집가를 상대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해담 대차사는 비밀리에 차사들을 모으기로 했다. 다른 성천까지 연락하면 수집가들이 알아차리므로 중앙황천으로 제한했다.


상산대원도 이번 그믐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시작했다. 문제는 마고 사빈이었다.


모든 일은 사빈 모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해담의 뜻이 그러했다.

‘사빈에게는 말하지 말게. 알면 그믐에 나가지 않겠다고 할 거고. 일이 틀어질 테니.’


상산대 삼인행의 의견도 똑같았다.

‘사빈님이 나가야 기운이 달라져요. 그들을 끌어들이려면 마고가 여기 없어야죠.’


백하가 길게 한숨을 내쉬자 구추가 불쑥 다로즙을 내밀었다.

“왜?”


거인 구추가 옆에 앉자 백하는 그의 그림자에 가려 아주 작아 보였다.

“샛뜸잎을 얻으러 왔습니다.”


“뭐하게?”

구추의 말은 언제나 굵고 짧았다.


“긔니초랑 같이 달여서···.”

“사빈에게? 긔니초는?”

“한요재에 갖다 놓았습니다. 아날빛숨 마당에 심어주려고요.”


“사빈, 가면 안 온다.”

“하하, 고백했지만 거절당했죠.”


“한 번으로?”

“사빈님을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요.”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이번에는 피천귀와 싸우던 때와는 다르다. 해날품곡에서 맞섰던 수집가라면 상산대원도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빙천술도 잘 통하지 않았다. 반계의 양존에게서 힘을 흡수했을 것이다.


‘어쩌면 사빈님보다 내가 먼저 마음숲을 떠날지도···.’

사빈 혼자 남겨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따끔거렸다.


“나도 그랬다.”

구추는 구겨놓은 자세로 앉아 다로즙을 홀짝거렸다.


“후회한다.”

“구추님도 사랑하는 천인이 있었습니까?”

“마고···, 예님.”


“네?”

백하는 놀라 뒤로 몸을 뺐다.

거인 구추와 사람의 혼 예님이라니··· 상상도 못 했다.


“아, 그래서···. 마고를 위해 긔니초를 찾아내셨군요.”

백하의 말에 구추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 번 더.”


구추가 백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백하의 몸이 텅텅 울렸다.

“떠나기 전에.”


백하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사빈이 떠나기 전인지, 자신이 떠나기 전인지는 알 수 없어도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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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그믐_마지막 주술 23.09.03 52 3 12쪽
149 그믐_달맞이 언덕의 뒷골목 +4 23.09.02 43 3 12쪽
148 천계_폭풍 전야 23.09.02 43 2 11쪽
147 천계_비밀회의 +2 23.09.01 42 3 11쪽
146 천계_신성한 땅의 흙 23.09.01 42 3 10쪽
145 천계_돌아오는 마음 23.08.31 43 2 12쪽
144 천계_움트는 비밀 23.08.31 45 3 11쪽
143 천계_신령수 동명 +2 23.08.30 42 3 11쪽
142 천계_두 번째 고백 23.08.30 43 3 12쪽
» 천계_숲센계곡 긔니초 23.08.29 43 2 11쪽
140 천계_반가운 할머니 +2 23.08.29 45 4 11쪽
139 천계_방법을 찾겠습니다 23.08.28 43 3 11쪽
138 천계_에밀레와 나토두 +2 23.08.27 43 3 12쪽
137 천계_떠나는 용희 23.08.26 41 4 11쪽
136 천계_기운을 훔친 대가 23.08.25 44 4 10쪽
135 천계_사라진 혼알방 +2 23.08.24 44 3 12쪽
134 그믐_빛나는 알과 만나다 23.08.23 43 3 8쪽
133 그믐_우주의 미아 +2 23.08.23 43 3 10쪽
132 그믐_소환 23.08.22 42 2 11쪽
131 그믐_대의각 앞마당 23.08.21 42 2 9쪽
130 그믐_증좌를 찾아내다 23.08.21 42 2 9쪽
129 그믐_형감어사 문휘수 23.08.20 43 2 11쪽
128 그믐_별사탕을 어찌 아는가 23.08.19 43 3 11쪽
127 그믐_사람의 눈은 진실을 보지 못한다 23.08.18 43 3 11쪽
126 그믐_판정관 황민 23.08.17 41 2 11쪽
125 그믐_억울한 누명 23.08.16 43 3 11쪽
124 그믐_그들의 비밀 23.08.15 42 4 10쪽
123 그믐_전생을 기억하는 소녀 23.08.14 42 2 11쪽
122 그믐_영함산과 만선상단 23.08.13 41 3 11쪽
121 천계_공조 23.08.12 44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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