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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공장 님의 서재입니다.

격동의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창작공장
작품등록일 :
2021.11.22 10:37
최근연재일 :
2022.03.2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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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22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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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 시즌1 - 186화

DUMMY

인정은 처음 한 번이 어렵지, 그 이후는 쉬웠다. 몇 차례의 부정 끝에 끄덕인 고개가 무거웠다. 강태수는 박정필의 진심을 누구보다 느낄 수 있었다. 강태수 또한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내게 언제나 좋은 친구였다네, 정필. 또래 친구라고는 없는 나한테 둘도 없는 친구였어. 내 마음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늘 전부에 가깝게 털어놓을 수 있었지. 나는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도 어려운데도 말이야.”


강태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다시 덧붙였다.


“처음에는 동향이라는 것에 반가웠고, 그다음에는 정필 자네의 인간적인 면모에 끌렸어. 그 누구도 정필 자네를 좋아하지 않기에는 힘들지 않았나. 자네는 언제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으니 말이야. 아니,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했다는 게 더 어울리는 말일지도 모르겠군.”


강태수는 지난날을 회상했다. 과거로 돌아가서 돌이킬 수 있는 것들은 없었으나, 추억은 때때로 그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강태수를 버티게 하던 것들은 대부분 추억이었다. 따뜻했던 기억들은 언제 꺼내 보아도 그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나쁜 기억보다 좋은 기억들이 많다면, 나쁜 것들을 조금이라도 밀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강태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늘상 현재였으니까.

강태수는 순식간에 과거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으나 더 나은 현재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이 과업이라고 여겼다.


‘과업課業.’


이 얼마나 우스운 단어인가. 강태수는 생각했다.


“나는 말일세, 정필. 눈앞에 닥친 일들만 해결하면서 산다면, 적어도 그렇게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치워 가면서 앞으로 나가기만 한다면···. 그렇게 살면 모든 일들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했었네.”


박정필이 술기운에도 분명한 눈빛으로 강태수를 바라보았다.


“죽음은 제각기 하나하나 잊을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지 않나. 이 가슴속에는 늘 불덩이가 하나 있어. 활활 타올라서 언젠가는 나 역시 잡아먹을 것만 같은 불덩이 말이야.”


박정필이 조용히 강태수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강태수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뜨거운 느낌에 정신이 혼미해졌다가 곧 다시 선명해졌다.


“모래를 집어 던지고, 물을 끼얹고···. 수백, 수천 번을 노력해 봐도 잘 되지가 않아.”


강태수는 가족이 아닌 이에게 처음으로 야마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오래도록 광복일을 잊을 수가 없다네.”


1945년 8월 15일은 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꾸었다. 강태수는 그중에서 제일 극적으로 바뀐 게 자신의 인생이 아닐지 간혹 돌아보았다.


“동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동생이 죽었다면 장례라도 치러 주고 싶었어.”


강태수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떠올렸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란다면 희수가 눈을 감았던 나이를 뛰어넘어 살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강태수가 애쓸 예정이었다. 어떻게든, 무엇을 하든. 옳은 방향이라는 전제 하에.


“동생을 죽인 왜놈이 눈앞에 있고, 도망가려 하고 있고, 광복이 되었다는데. 내 동생을 죽이고, 수많은 우리 땅의 아이들을 죽인 놈은 제 나라로 돌아가겠다는데,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어.”


감각은 기억보다도 오래 남았다. 강태수는 돌을 쥐었던 손의 감각을 아직 잊지 않았다. 처음으로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거두었던 타인의 얼굴 또한.


“후회는 하지 않아. 오히려 그놈을 그 순간 살려 주었다면 나는 평생을 후회하고 살았겠지. 동생의 복수를 할 수 있던 기회를 눈앞에서 날렸다며 스스로를 아직까지도 한심하게 여기고 있었을 게 분명하네.”


단 한순간도 야마다를 죽인 것을 후회한 적 없었다.


“그런데 말이네, 정필. 내가 진정으로 후회하는 건··· 그날 발견한 쌀들을 태우지 않은 것이네.”


박정필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강태수를 바라보았다. 강태수가 피식 웃었다. 강태수 자신이 말하고도 모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쌀로 인해서 얻은 게 적지 않았어. 물가가 폭등하는 와중에도 꿋꿋이 헐값에 팔았는데도 그랬지. 그런데 종종 그런 생각이 들더군. 이건 동생의 목숨값이 아닌가. 동생이 죽음과 맞바꾼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강태수가 박정필의 빈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동생의 목숨값으로 부끄럽게 연명하고 있지 않은가. 쌀 원조 사업을 맡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종종 들었다네. 내가 원하던 인생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쉽지가 않았어. 마음이 쉽지가 않았지. 꿈에 나온 동생은 한 번도··· 한 번도 예전처럼 웃으면서 나에게 달려오지를 않았거든.”


팔을 벌리면 달려왔던 막냇동생을 멀리서 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움직여도 닿을 수 없는 신기루처럼, 희수는 닿지 않았다.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은 분명 알 수 있었는데, 닿지를 않았다.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은 어쩔 수 없지 않나. 동생이 나에게 꼭 화난 것만 같았다네. 희수의 또래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돼. 그 아이는 평생 그 나이에 멈춰 있고,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태수는 생각하고는 했다.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살아간다면, 자신이 사는 이유도 있을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아직 죽을 수 없다고.


“그래서 이렇게 죽을 듯이 달려가느라 옆을 보지 못하고 산 것도 한참이었지.”


강태수는 빈 술병을 한 번 들었다가 놓았다. 밑바닥에 찰랑이며 고인 술은 한 모금도 돼 보이지 않았다. 새 술을 쓰던 잔에 따르며 강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소한 것들을 미루며 사는 인생이 어떻게 좋은 인생이겠나. 이렇게 술 한잔할 친구도 없는 인생이 어떻게 좋은 인생이겠냐, 이 말이야.”


웃음기가 묻어 있는 강태수의 말에 박정필도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의 앙금을 이 한순간에 모두 털어 버릴 수는 없었으나 두 남자는 오래도록 술잔을 맞부딪쳤다.



*


강태수는 다시 좋은 친구를 얻었다. 박정필은 지난밤 이야기했다. 박정휘는 머지않아 대통령에 도전할 것이라고. 강태수 또한 짐작하고 있는 바였다. 그러나 우려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대통령을 왕처럼 생각하는 인식부터를 다잡아야 할 것 같군.”


강태수의 이야기에 박정필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꾸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부터 해야 하지 않겠어.”


강태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박정필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박정필의 눈빛에는 거짓이 없어 보였다. 강태수는 어쩌면 자신이 그저 박정필을 믿고 싶은 것뿐이지 않을까 고찰했다.

그러나 박정필은 누구보다도 박정휘와 가까운 측근이었다. 여전히 박정휘는 문제가 생기면 강태수가 아니라 박정필을 먼저 찾았다.

강태수는 그 모습을 보며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박정휘가 만들고 싶은 그림은 여전히 나와 정필의 경쟁 구도인 게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박정휘로서는 이득이었다. 두 개로 쪼개진 권력 구도와 박정휘는 대결하면 될 일이었다. 쪼개지는 이름이 많을수록 권력은 분산되었다. 강태수는 강태수 자신과 박정필을 한데 묶어 버린다면 박정휘는 자신이 위태로워진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강태수는 박정필도 이 가설을 짐작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정필, 자네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의장께 많이 위협으로 느껴지리라 여기나?”


강태수의 질문에 박정필이 잠시 말을 골랐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박정필은 방금까지 보고 있던 서류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자네의 평판은 날로 좋아지고 있어. ‘형제’를 등에 업고 중정부장이 되었다고 우기던 자들도 이제는 전부 입을 다물고 있지.”


강태수는 가압한 재산들로 국민들이 살 수 있는 복지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 개발도 중요하지만, 국민들이 모두 굶어 죽고 난 자리에 돈을 뿌리면 거름밖에 되지 않습니다. 돈은 적재적소에 써야 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찾는 해답은 즉각적이지는 않을지라도 교육에 있습니다.’


강태수는 농촌에서 굶주린 사람들과 아이들을 찍어 온 사진을 중진들 앞에 내밀었다. 갈빗대가 전부 보일 정도로 마른 몸은 크흠, 헛기침이 나오게 만들었다. 강태수는 기세를 몰아 더욱 세게 밀어부쳤다.


‘물가에 소와 말을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으라고 고개를 밀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저 고개를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가는 죽고 말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안전한 물이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마실 수 있는 물과, 마실 수 없는 물을 구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태수가 이렇게 강하게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강태수가 만든 학교가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막대한 인기를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평생 소원이 글자를 읽어 보는 것이었던 노인들부터, 자라는 아이에게 한글을 직접 가르쳐 주고 싶다고 찾아온 부모, 돌보아 줄 사람이 없어 제 발로 찾아온 아이까지. 각자 모두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나라에서 만들어 준 공짜 학교.’


사람들은 그렇게 인식했다. 나라가 드디어 무언가를 해 주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눈에 보이는 것은 건물 하나와 선생 몇, 책걸상에 옹기종기 붙어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뿐이었으나 그 장면은 모두의 인상에 오래도록 남았다.


“가난해서 배우지 못했다는 건 옛말이 되는 게 순식간이겠어.”


강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서울에서 이렇게 하고 있지만, 곧 장소와 선생들만 정해진다면 다른 지방에서도 실시할 생각일세. 농촌에서 꼭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게 좋겠지.”

“좋은 생각 같군. 고향에도 꼭 필요하겠어.”


박정필의 말에 강태수는 고향을 떠올렸다. 강인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집이 눈앞에 그려졌다. 새로운 다짐을 했던 형의 논밭이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만들던 귓가가 간지러운 소리가 간지럽게 울렸다. 강태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예산은 충분하니 다행이군.”


강태수의 생각보다도 예산은 충분했다. 강태수는 강태수 자신이 넘겨준 서류들을 꼼꼼히 확인하는 박정필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필, 자네는 이 자리에 왜 앉고 싶었나?”


강태수는 문득 궁금해졌다. 박정필과 중정부장 자리를 두고 몇 달 동안 암투를 벌이면서도, 왜 박정필이 이 자리에 앉고 싶어 했었는지 깊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암암리에 사람들이 박정필을 ‘부장님’으로 불렀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박정필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입을 열었다. 박정필이 돌려준 대답은 강태수의 생각보다도 훨씬 간단했다.


“태수 자네도 그 자리에 앉은 이유가 있지 않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걸세.”


강태수는 박정필의 집에서 보았던 박정필의 아내를 떠올렸다. 오늘 아침 강태수에게 안겨 인사하던 성예진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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