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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공장 님의 서재입니다.

격동의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창작공장
작품등록일 :
2021.11.22 10:37
최근연재일 :
2022.03.2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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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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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 시즌1 - 174화

DUMMY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다는 느낌은, 여러 사람들을 들뜨게 했다. 일한 만큼 보상받고, 그 보상이 헛되지 않다는 생각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다. 강태수는 정보원들이 은밀히 가지고 오는 여론의 반응을 보며 생각했다.

‘형제’도, 전쟁도 모두 강태수의 인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이루는 요소였다. 하지만 지난날이 아닌 지금의 강태수를 제일 크게 이루는 정체성은 강태수가 살고자 하는 방향이었다.

강태수는 자신이 구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언젠가 강인수는 강태수에게 모든 사람들을 구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동생이 강박에 갇히지를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강태수가 잘 알았다. 강태수는 버거워질 때마다 강인수의 그 말을 떠올렸다.


‘태수야, 네가 모든 사람들을 구할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말이야. 한 사람의 인생을 구하는 일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 된다. 멋진 일이지. 그런데 그보다 더 명심해야 할 것은, 혹시 네가 누군가를 구하지 못했다고 해도 네 탓은 아니라는 거다.’


강인수는 강태수의 뿌리 깊은 분노를 알았다. 가야 할 곳을 잃은 감정은 종종 스스로를 베는 칼이 되어 돌아왔다.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을 때, 그때 움직여라.’


강인수의 이야기는 강태수의 강박을 아주 조금 줄여 주었다. 살던 대로 살아진다는 말을 부정하기 위해 온몸으로 힘쓴 인생이었다.

살던 대로 살았다면, 강태수는 그저 주먹만 조금 쓰는 사내로 인생을 보냈을 터였다. 강태수는 종종 군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때를 복기했다.

그때는 상황과 벤자민의 말 때문에 충동적으로 결정했던 것도 적지 않았지만, 그 결정이 강태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두었다.

언젠가 세상을 흔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태어나 세상을 알게 된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꿔 볼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운이 좋았고.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온 거겠지.’


강태수는 눈앞에 놓인 사진들과 신문들을 헤집어 배경목이 중앙정보부에 자진 출석했다는 기사를 다루고 있는 신문을 집어 들었다.


‘지금쯤이면 전부 취조실로 옮겨졌겠군.’


툭.


신문을 내려놓고 강태수는 취조실로 향했다.

취조실은 빈 곳 하나 없이 전부 꽉 차 있었다. 강태수는 마침 배경목을 취조실로 데려가는 박정필을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강태수를 발견한 박정필의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며칠 도피 생활을 한 탓인지 배경목의 몰골 역시 그랬다.


“들어가!”


쾅!


박정필은 거칠게 배경목을 취조실로 밀어 넣고 강태수를 향해 이를 으득 갈았다.


“덕분에 오늘 일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겠어, 태수.”


박정필의 빈정거림에 강태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고맙다는 인사는 하지 않아도 돼, 정필. 배경목을 찾느라 애먹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듯한데. 그렇지 않나? 사상계와 오늘 신문 덕분에 숨어 있던 자들도 이제 한 번에 나타나고 있고 말이야. 수고가 덜었지.”


마치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한 강태수의 여유로운 대답은 박정필을 더욱 흥분시켰다. 박정필은 며칠 사이에 계속 궁지로 내몰리는 듯한 기분을 벗어나지 못했다. 속도전에서 밀린 탓에 손을 쓸 틈도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강태수가 ‘화양’에 다녀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다 이긴 싸움이라고 확신했다. 일부러 그곳에 들여보낸 것이었으니, 그만한 성과 또한 따라올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강태수는 그 후에도 분노도, 불안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른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은 짐작했으나, 이 정도의 큰 규모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박정필과 얽힌 자들은 하나같이 장부의 내용이 세밀했다. 누구의 짓인지 밝히려 했으나 박정휘가 나서서 막았기 때문에 그대로 수족이 잘려나가는 꼴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박정필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모든 상황이 그가 강태수에게 밀리고 있음을 증명했다.

박정필이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배경목은 박정필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신문을 읽고 겁에 질려 은신처에서 도망쳐 중정으로 나타났다. 박정필이 배경목이 다른 사람에게 배정되려던 것을 억지로 뒤바꾼 차에 강태수가 찾아온 것이었다.


성큼.


인상을 구긴 박정필이 큰 보폭으로 다가와 강태수만 들릴 만큼 속삭였다.


“이런 식으로 지저분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자네가 이 정도였나? 내가 강태수라는 인간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군.”


턱.


강태수는 박정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힘을 주어 눌렀다.


“윽, 지금 뭐 하는,”

“가족을 건드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박정필은 강인수로도 모자라 성예진에게까지 손을 뻗었다. 강태수는 그 사실을 결코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멈추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멈출 수 있는 상황이 되지도 않았지만.


“지금 상황을 더 악화시키려는 게 아니면 그만해.”


강태수도, 박정필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박정휘 말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점점 더 심각해질 무렵, 강태수가 손에 힘을 풀고 박정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툭, 툭.


“그럼 나는 이만 가 보지. 고생하라고, 정필.”


강태수는 뒤에서 뜨겁게 쏟아지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그 분노를 기꺼워하는 강태수 자신 또한 발견했다.


‘이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겠군.’


박정필이 방금 분노가 아닌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마음이 바뀌었을지도 몰랐다. 바뀌지는 않았더라도 흔들렸을 것이 분명했다. 모두가 믿지 않았지만, 강태수는 주변 사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유독 약했으니까.

박정필이 여태 배경목의 행방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애를 썼다면, 이제는 박정필 자신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 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바둥거리면 바둥거릴수록 그 고리는 더욱 견고한 사슬이 되어 박정필을 옭아맬 터였다.

강태수는 그럼 그만큼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마지막 한 방을 준비할 시간을.


*


강태수는 이번 일로 박정휘의 신임을 얻었다. 강태수의 생각대로 박정휘의 이름으로 강태수가 투고자였음을 밝힌 것은 상당히 도박적이었으나 그만큼 효과적이었다.

그 기사 하나 안에서 눈길을 끌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충분했다.

강태수는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않은 채 쫓기듯 계획만을 위해 달린 탓에 피곤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강태수는 사람들의 생각과 시선을 되도록 오래 잡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최대한 오랫동안 이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정말 바뀌고 있다고 알려 줄 수 있으니까.’


소를 물가에 데리고 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물을 먹지 않겠다는 소를 강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강태수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누군가는 회의적이었고, 누군가는 의심했고, 혹자만이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지만 강태수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하나였다.


‘평화로운 삶.’


전쟁이 끝난 이후 대한민국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가난은 발악하며 살을 파먹는 벌레와도 같아서, 가려운 만큼 긁다 보면 오히려 피를 쏟았다. 그렇다고 그 가려움을 참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견딜 만한 가려움이었다면 애초에 손을 대지도 않았을 터였다. 덧나고, 다시 피가 나는 상처에 할 수 있는 조치는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약을 바를 수 없다면, 나아질 수 없다면 잊고 사는 것이 맞는 처사였다.

하지만 늘 문제는 그곳에 있었다. 잊고 싶을수록 잊히지 않았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생각해야 했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발밑은 언제까지 꺼질 참인지, 눈을 감았다 뜬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을 감게 되는 이유는, 그 순간의 해결책이 그것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희수야.”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이름을 일부러 소리 내서 부르는 것은 단지 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죽은 이의 이름은 금기처럼 잊히고, 기억은 세월에 희미해졌다. 제일 먼저 기억에서 사라지는 영역은 목소리라고, 강태수는 희수를 떠올릴 때마다 줄곧 생각했다.

피에 무뎌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강태수는 기원을 되짚어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뎌지지 않을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나서야 강태수는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한참 뒤에 고개를 뒤로 젖힌 강태수는 아주 느리게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눈을 감는 순간 정신을 놓아 버릴 것만 같아서, 몇 년 동안 억지로 만들었던 습관이었다. 모질게 정신을 붙들어 살고 지내던 날들은 지났으나 흔적처럼 남아 있는 버릇에 가까웠다.

인지하고 있음에도 고칠 수 없는, 고치지 않는 버릇이었다.


스윽.


강태수는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은 여전히 기자들로 가득했다. 또 누군가 올까 싶어서 진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강태수는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강태수 자신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일은 매번 겪어도 적응되지 않았다. 창문 바깥에서 쏟아진 햇빛이 강태수의 공간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햇빛은 강태수의 책상 위를 차지하고 있는 액자에 부딪혀 다시 반사되었다.

강태수는 등 뒤로 느껴지는 뜨거움에 몸을 틀었다. 언제나 때를 기다리는 맹수처럼 살았으나 강태수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 또한 역시 평화로운 삶이었다.

해묵은 결핍은 강태수를 이렇게까지 끌고 왔다. 무언가를 해야만 잠시 동안 해갈되는 결핍. 속에서 치미는 분노와 구멍 난 결핍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강태수가 언제나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가족···.’


언제까지고 그리워할 부분이자, 어떻게 할 줄을 몰라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는, 가족.

그런 강태수에게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여인이 생긴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성예진의 사진을 보며 성예진의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강태수를 반겼다.


[태수 씨? 아! 바로 받아서 다행이다! 바보같이 집에다가 전화를 걸었지 뭐예요. 너무 놀라서, 그러니까.]

“예진 씨, 무슨 일입니까? 군산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지금 당장이라도 서울에 가서 직접 보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는데, 일 분 일 초가 아쉬워서요. 태수 씨, 놀라지 말고 들어요.]


숨찬 듯한 목소리는 다급한 듯도, 기쁜 듯도 했다. 막연한 불안감이 치밀었다.


“예진 씨,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내가 지금 군산으로,”

[태수 씨. 진정해요. 나쁜 일 없어요. 그래도 내 말 집중해서 들어야 해요, 알았죠.]


몇 번 심호흡하는 성예진의 목소리에서 웃음이 섞여 들렸다. 익숙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자 강태수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크게 심호흡한 성예진이 맑게 웃으며 폭탄을 터뜨렸다.


[태수 씨 이제 아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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