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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공장 님의 서재입니다.

격동의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창작공장
작품등록일 :
2021.11.22 10:37
최근연재일 :
2022.03.2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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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8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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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 시즌1 - 172화

DUMMY

강태수는 장현영을 처음 보았던 날부터 생각했던 질문을 꺼내 놓았다,


“이토록 많은 아이들의 어머니로 살고자 마음먹은 이유가 무엇이십니까?”


장현영은 아주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강태수의 질문에 대꾸했다.


“어미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이렇게 많고, 나는 마침 시간이 돼. 시간도 되고, 아이들도 좋아하지. 그런데 말이야, 태수 청년. 아이들이 나를 어미로 보고 있다고 생각해서 묻는 건 아니지?”

“···.”

“아이들의 눈빛을 봐. 그 어떤 아이도 자기 어미를 저런 눈빛으로 보지는 않아.”


강태수는 지금 강태수가 보고 있는 아이들의 눈빛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거리를 거니는 아이들의 눈빛 역시도.


“공허하고, 텅 비어 있고···. 가끔은 지루함마저도 느껴지지. 그토록 원하던 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말이야.”


강태수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장현영의 목소리가 더욱 공허한 듯하다고 생각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장현영은 빈 그릇을 쥔 채로 빤히 안을 들여다보는 아이를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의 대화 소리는 작았고, 소음에 거듭 묻혔지만 강태수는 오늘의 대화를 꽤 오래도록 잊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배고픔이 제일 크게 주는 영향이 뭔지 아나?”


대수롭지 않은 일을 묻는 것 같은 어투는 강태수와 닮아 있었고, 강태수는 늘 그랬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강태수도 뼈저리게 알고 있는 감각이자, 영향이었다. 장현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성의 없이 넘겼다.


“맞아. 배를 주리면 배를 채우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못 하게 되지. 배를 주리기 이전에 얼마나 지적인 사람이었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아. 굶주림이 계속되다가, 이러다가 아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정신이 먼저 나가는 거지.”


여름의 햇빛은 무더웠고, 강태수는 간이천막 아래서 허겁지겁 면발을 씹지도 않고 삼키기 바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모든 감정을 덜어내고, 어떻게든 동정의 눈빛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성인마저도 그렇게 되는데, 아이들은 어떻게 되겠어. 울어야 할 나이의 아이들이 울지 않아. 울어 봤자 배만 곯는다는 걸 깨닫기 때문에.”


장현영은 갓난아기를 불편하게 안고 라면을 먹고 있는 빼빼 마른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기운 천으로 만든 포대기에 쌓인 아기를 안아들었다.


“응, 우웅.”


장현영은 울음을 터뜨리려는 아기를 능숙하게 달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라네.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제일 크게 들었지만.”


강태수는 종종, 여름이 겨울보다 무겁다고 생각했다. 물이 가득 섞인 공기와 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갈 때면, 온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여름보다 잔인한 것이 겨울일지언정, 무거운 건 여름이라고.

그렇다면 이 불볕더위에 가마솥을 끓이고, 불 앞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여인의 속은 얼마나 뜨거운 것일까 생각했다.


*


지나간 일을 되짚어 보았을 때면, 무엇을 실수했는지 볼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있었다. 강태수는 지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평생 동안 시간을 쏟았고, 그의 그런 생각은 언제나 강박이 되어 강태수를 옭아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관은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태수는 장현영을 만나고 강인수와 함께 살던 집이 아닌, 신혼집으로 향했다. 시끄러운 머리를 잠시라고 조용히 식히고 싶었다.

하지만 강태수의 그러한 바람과는 달리, 고요는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는 머릿속의 목소리가 제일 큰 법이었다.


스윽.


미간을 찌푸리던 강태수의 시야에 손바닥 조금 큰 액자가 들어왔다. 결혼 전, 성예진과 군산의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강태수는 가만히 엄지로 성예진의 얼굴을 쓸어 보았다.


‘결혼하고 나서도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신혼일 때부터 떨어져 지낼 줄은 몰랐는데.’


위협을 제거하며 사는 것이 강태수의 일이었으나, 사랑은 강태수가 해 오며 산 것이 아니었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역시 그 모든 그리움이 향하는 이는 성예진이었지만,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낳은 그리움과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만드는 그리움은 조금 결이 달랐다.

강태수는 가볍게 생각하기 위해 애를 썼다. 스스로도 생각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이번만큼은 덜어 내고, 다시 덜어 내기 위해서 기를 썼다.


‘박정필의 발이 묶여 있는 지금이 적기다.’


때때로 때는 찾아오는 법이었으나, 가끔은 만들어야만 할 때도 있었다.

배경목을 찾기 위해 사람을 수차례 풀어도 이미 증발한 것처럼 깨끗했다. 가끔 무언가를 찾아도 흔적일 뿐이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자취를 정리할 수 있다는 건 아무래도 박정필이 데리고 있다는 얘기일 테고. 본인만 볼 수 있는 곳에 숨겨 두었겠지. 그런 그놈을 꺼내려면···. 성급하게 굴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 지저분하게 굴 생각도 없었고.’


강태수가 눈앞에 놓았던 종이들을 다시 집어 들었다. 강태수는 상당한 두께를 자랑하는 종이들을 이미 외울 만큼 외운 뒤였다. 몇 개월 동안 차근차근 심혈을 기울여 모은 정보였으니 당연했다.


‘저쪽에서 협조를 안 해 주니 별수 없군.’


강태수는 많은 자료들을 다시 한 번 슥 훑었다.


*


강태수는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본래 나가던 시간도 이른 시각이었으나, 오늘은 조금 더 서둘러야 했다. 따라붙은 기운들이 대놓고 기승을 부렸다.


‘오늘 유독 심하군. 오히려 잘 됐어.’


강태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듯이 지프를 운전해 중앙정보부로 향했다. 강태수를 쫓던 이들은 강태수가 지프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했다. 분명 강태수가 들고 탔던 가방을 봤는데,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령님께 보고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라진 게 뭔지도 모르는데 보고를 드리면, 그때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냐?”

“한순간도 눈을 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젠장, 지독하게 깨지게 생겼군.”


강태수는 자신의 지프에서 어슬렁거리는 미행들의 얼굴을 확인한 후에 기척을 숨기고 걸음을 옮겼다.

강태수가 무엇을 빼돌렸는지 박정필이 확인하기도 전에, 강태수는 선수를 쳤다. 다음 날, 사상계 8월호가 대한민국을 다시 한 번 흔든 것이었다.


[모든 정권은 왜 부정 축재를 해결하지 않는가]


기고한 이를 무명으로 밝힌 글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이 글을 쓴 이가 누군지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군사 정권은 장면 정부가 부정 축재를 해결하지 못했기에 자기들이 들고 일어났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삼 개월이 지난 지금, 해결된 것은 무엇인가.]

[‘형제’의 강인수 사장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했다. 국민들이 알고 있는 다른 이름들은 어째서 수면 위로 머리를 들이밀지 않는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눈뿐이다.]

[수없는 부정 축재, 여기 그 증거가 있다. 이 증거를 두고도 속히 해결되지 않으면 국민은 생각할 것이다. 이번 역시 똑같구나. 말만 번지르르했구나.]


수많은 회사의 이름과 함께 그들이 얼마나 부정 축재를 쌓았는지 쭉 열거된 장들이 계속 이어졌다. 사상계 8월호는 수많은 회사들의 장부 그 자체였다.


[우리는 그들이 목숨을 걸겠다는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견고하던 벽도 모래 한 알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붕괴하기 시작한다.]

[국민들은, 우리는 군인들이 나라에 충정을 바치겠다고 했던 말을 몇 번씩 다시 생각한다. 전쟁 때 이 나라를 지켜 주었던 그들이 하는 말을 의심하는 사람도, 의심하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모래 한 알. 늘 그 한 알이 시작이다.]


사상계 8월호가 발간되자마자 중앙정보부가 한 차례 뒤집어졌다. 박정휘는 바로 강태수를 불러 고함쳤다.


“이게 무슨 일인가! 강태수 대령이 본인 입으로 사상계는 해결한다고 큰소리 떵떵 치지 않았어! 왜 나를 이렇게 실망시키나!”


강태수는 박정휘가 지금 자신과 박정필을 동시에 질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박정휘가 화를 쏟는 내내 강태수는 침묵했다. 박정휘는 곧바로 돌아오지 않는 죄송하다는 말에 더욱 미간을 찌푸리며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쾅!


강태수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벽에 부딪힌 재떨이가 유리 조각을 사방에 뿌리며 깨졌다.


“입 닥치고 있으면 다야! 그 글 투고한 놈부터 잡아와! 장부 퍼뜨린 놈도!”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고함이었건만 강태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제가 시킨 일입니다.”


하루아침에 여론이 흔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고저 없는 덤덤한 목소리였다. 그 순간 박정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강태수의 동태를 보고 받는 것은 박정필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박정휘가 박정필보다 더욱 집요하게 강태수를 쫓고 있을지도 몰랐다.

강태수가 보이는 충정은 박정휘가 아닌 이 나라에 향했다. 그런 강태수는 박정휘에게 가장 날카로운 무기인 것과 동시에 두려운 존재였다.

그러나 오늘 일어난 일에 강태수가 연관돼 있다는 말은 그 어떤 것도 듣지 못했다. 박정휘 또한 정보 장교 출신이었다. 정보가 어떻게 사람의 목을 조를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임자, 지금 임자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하는 거야?”


조금 전까지 다시 강태수를 강태수 대령이라 부르며 분을 표출하던 박정휘가 당황과 함께 강태수를 다시 임자라 칭했다.

강태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강태수의 반응에 박정휘도 점점 열이 가라앉았다. 강태수가 만들어 온 이미지는 그런 것이었다.

단단한 모습으로 상대를 지나치게 동요하게 하거나, 상대의 동요를 꺼뜨리거나. 어느 방향으로 보아도 흔들림 없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상대를 가볍게 흔들었다.

강태수는 박정휘가 분을 어느 정도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렸다. 거친 숨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밖에서 쏟아진 빛은 바닥에 퍼진 유리 조각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털썩.


“이야기해 봐.”


박정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강태수는 그동안 몇 번이고 입안에서 다듬었던 말을 꺼냈다.


“이 문제를 올해가 가기 전까지 해결하지 못한다면 분명히 역풍을 맞을 겁니다.”


올해라고 해 봤자 이제 한 분기만을 남겨 두고 있었지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태수는 그 누구도 진정으로 이 일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던진 승부수였다.

강태수는 발치 앞에 어지럽게 튄 유리 조각을 짧게 응시하고 다시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그 역풍은 다시 ‘우리’를 휩쓸어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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