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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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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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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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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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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7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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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48화

DUMMY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지난날의 풍상(風霜)이 까물거리기라도 하는지 상닿 골치 아픈 표정을 지은 태강이 황호의 폐허를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젊으나 늙으나 언제나 남루하기를 즐기는 이 슬픔의 씨앗 같은 성인은 전생에도 자신이 마찬가지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는지 의심이 들 만큼 초연하게 사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언제라도 장마 동안에 얼마간 씁쓸하게 바라만 봐야 하는 눅눅한 곰팡이처럼 행동하면서 은둔자처럼 굴었다.


“그렇지, 이렇지 않으면 황호가 아니지. 왜 사서 거지꼴을 하고 다녀?”


뒷짐을 지고서 들어온 태강에게서 품위를 찾아보기란 힘들었다. 워낙에 방정맞은 데다가 눈을 흘기며 초라한 가구 배치를 바라보는 시선은 계속해서 혀를 차는 탓에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도 앟았던 것이다.


“여전히 말은 네가 제일 많은가 보네.”


황호가 콜록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하필 이때 다리 하나가 부러지는 바람에 의자는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궁상맞기는 네가 제일 궁상맞고 말이야.”


태강이 그 의자를 구두 코로 툭툭 건드리며 종알거렸다.


“그래, 잘 지냈겠지? 너야 워낙 있는 걱정도 있는 줄 모르고 해야 할 생각도 해야 하는 줄 모르니까 말이야.”


황호가 그 의자를 태강의 발이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두며 말했다.


“뭔 소리야. 나도 고비가 참 많았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데 또 뭘 하자니 그건 더 심란스럽고.”


한숨을 쉰 태강이 주저하지 않고 침대 위에 몸을 맡겼다. 낡은 나뭇판자가 그의 무게를 어려워하는 소리가 민망하게 들렸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손님을 맞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집은 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렇겠지. 천규가 너를 두고 그냥 죽어버렸으니까 너로서도 많이 고생했을 거야.”


빗물이 아직 덜 마른 곳이 있어 이곳에는 물 냄새가 여전히 물씬 풍겼다. 실제로는 빗방울만이 내는 샘새가 아니라 각종 생물이 죽어서 만들어낸 유기물이 이 기회를 잡아 자신들이 존재했었음을 알리는 무언의 언어였으나 태강은 코를 킁킁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으며 황호의 말에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숨어 지내면서도 그런 건 또 다 알아봤나 봐.”


태강이 허리를 펴서 자세를 바르게 했다.


“알 수밖에 없지. 내가 놀려고 심연도를 나온 건 절대 아니야.”


책등을 더듬는 것으로 가지고 있는 책의 권수를 확인하며 황호가 말했다.


“그래? 그럼 왜 이제야 나한테 쪽지를 남긴 거야? 영월한테는 진작에 남겼으면서.”

“너무 섭섭해할 필요는 없어. 영월이나 야담을 제외하면 너한테 제일 먼저 쪽지를 보낸 거니까.”

“그러셔? 그런데 어쩌지. 나는 너 만난다고 하고 쪽지까지 다른 애들한테 넘겨주고 왔는데. 더 숨어야 한다면 다른 데 알아보거나 도망가는 게 좋을 거야.”


황호가 최종적으로 책을 훑어보고는 뒤돌아 태강을 쳐다봤다.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오가면서 이상한 신경전이 일기 시작했다.


“상관없어. 이제 거의 마무리되어가니까.”


황호가 무릎을 짚고 일어나서는 위에 있는 책 몇 권을 덜어내고는 그것을 그대로 가져와 바닥에 내려두었다. 못 쓰게 된 의자 대신에 앉을 도구로 사용하려는 것이다.


“그래? 뭐가 마무리되어가는데?”

“곧 알게 되겠지.”

“녹수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난 둘이 같이 있거나 그럴 줄 알았단 말이야. 녹수가 백면의 시집을 그렇게 찾아다녔다며.”


그 장면을 아주 기괴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태강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홀로 오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녹수에 대해서 알 수 없게 될 것 같아서 위험을 무릅쓰고 온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니 야담도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언젠가부터 녹수와 황호에 대해서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굴기도 했다. 도대체 이유가 뭐지?


“아마도 귀천에 있겠지.”


급히 용도가 변경된 책더미를 몇 번 두드려보고는 그 위에 앉으며 황호가 말했다. 둘이서 함께 지낸 줄 알았건만, 녹수의 존재에 대해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다.


“귀천에 있다고? 거기엔 지금 백면이 있을 텐데!”


태강이 화들짝 놀라 일어서며 황호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백면이라고?”


모든 사람이 오랫동안 입밖으로 가장 적게 부른 이름, 그러나 가장 머릿속으로 가장 많이 생각한 이름의 언급에 황호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아, 그런 게 있어.”


제가 쓸데없이 군말을 했다는 생각에 태강이 도로 앉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가 다시 앉을 때도 침대 바닥에서는 괴상한 소리가 나서 그의 귀를 성가시게 했다.


“백면이 아무래도 살아서 자유롭게 속세를 활보하고 다니는 모양이지?”


황호가 늙고 힘없어짐에 따라 추레해진 눈을 비비며 태강을 붙잡았다.


“아니,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시치미를 떼도 이미 늦은 시간이었으나 최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태강은 잡아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으니, 나한테 놀라운 소식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려줄게.”


등받이가 없어서 불편한 황호는 그대로 고목이 되어버린 책상 위에 있는 책 한 권을 들고 태강 옆으로 갔다. 그러고는 그에게 턱짓으로 비키라는 신호를 보냈다.

태강이 한 칸 띄워서 황호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말한다.


“그래? 그럼 난 왜 부른 건데?”


황호를 만나기에 앞서 망설였던 것은 어디까지나 백면 때문이었다. 그가 살아 있으리라는 추측이 기정사실화되면서부터 심연도에 머무는 성인들은 한바탕 큰 내적 혼란을 치러야만 했고, 또 이를 함부로 발설하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해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니, 도대체 황호가 어떤 열쇠를 쥐고 있는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일이다.


“뭔가 하나를 물어보고 싶어서 그러는데.”


씻지도 않은 데다 나이까지 들었으니 황호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향긋할 리는 만무했다. 그러므로 황호가 곁에 다가올 때 자연스레 거리를 두며 앉은 태강은 심상치 않은 악취를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황호가 손목을 붙잡는 바람에 도로 앉게 되었다.


“그럼 이건 좀 놓고 이야기하는 게 어때? 난 누구랑 살결 부대끼고 그런 취미는 없어서 말이야.”


질색과 기겁을 동시에 한 태강이 황호의 손가락을 차례로 팅기며 말했다.


“아니, 중요한 이야기라서 그래.”


황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태강의 손목을 더 강하게 쥐었다. 꼼짝도 못하게 된 태강이 오만상을 쓰며 어떻게든 거리라도 넓히려고 앉은 자세로 몸을 이상하게 꺾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뭔데?”

“백면에 대한 이야기지.”

“왜? 살아 있는지 아닌지 말고 뭐 더 알고 있는 거라도 있었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거야.”


쉬이 몸의 곳곳이 불편해지고 뻐근해진 태강이 마지 못해 원래의 자세로 돌아오며 팔자주름이 짙을 정도로 기분이 나빠 보이는 표정을 하며 황호를 대했다. 모자의 챙이 걷혀서 그가 사뭇 진지한 얼굴이라는 게 아주 잘 보였다.


“태강. 내가 널 부른 건 넌 기적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성인이기 때문이야.”

“알아······ 내가 대단한 건 잘 알고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것 좀 놔. 나 진짜 불쾌해서 그런다니까.”

“태강. 지금 하는 이야기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이고, 너는 어쩌면 이 중요한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만 할지도 몰라.”


자신의 콧대를 세우는 것을 아무리 좋아하는 태강이라도, 구태여 남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은 자신이라서 그는 황호의 이야기가 아주 낯설게만 들렸다.


“뭐, 뭔데 그렇게 거창하게 말해?”


간신히 황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태강이 초반에 말을 더듬었다.


“태강. 녹수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알아?”


황호가 짐짓 그의 손을 잡는 것을 포기하더니 말에 무게를 싣고는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무슨 짓이라니, 이상하고 음흉한 짓이었겠지. 나는 다른 애들만큼 잘 알지는 못해도······ 그것 정도는 알아.”

“그래, 맞아. 네 말대로야. 아주 정확해.”

“정확하다고? 내가?”


태강이 삿대질로 자신을 가리키며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네 말이 정확하단 말이야. 이상하고 음흉한 짓······ 녹수가 그런 짓을 하려고 했었지. 바로 백면의 내생을 모두 죽이려고 했단 말이야. 백면이 다시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그 영혼이 영원히 뿔뿔이 흩어지게 하려고.”


방심한 사이에 태강은 황호에게 다시 손을 붙들리고 말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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