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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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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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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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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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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42화

DUMMY

“벌써 일어났어요?”


웬 이상한 화분 하나를 갖고 들어온 주화가 기상천외한 안부를 물었다. 벌써라니. 자는 동안에 무슨 혼전을 벌인 건지 짐작할 수는 없어도 끝내 산발인 채로 일어난 자신의 상태로 짐작하건대 잠과의 사투에서 겨우 승리를 거머쥐어 깨어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음은 속설보다는 믿을 만한 추궁일 것이다.


“그렇게 늦잠을 잔 건 아니에요. 아직도 아침이고, 앞으로 몇 시간도 아침일 테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 그래요?”


표정만 보아도 상대방의 생각을 꿰뚫는 사람이 세계에도 더러 있다고는 해도 이렇게 직관적으로 마음을 들키는 일은 뜨문뜨문 나나를 경기하게 하곤 한다. 일어난 김에 이부자리를 정리하던 나나의 곁으로 주화가 묘목이 있는 화분을 내려놓았다. 밑바닥에 붙은 흙이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간질거리는 소리를 내자 나나가 들고 있던 겹이불에서 손을 떼었다.


“이게 뭔지 알아요?”

“이거요? 풀인 것 같은데요.”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손짓으로 나나의 동작을 저지시킨 주화가 침대 위에 털썩 앉으며 화분을 내려다보았다.


“풀은 풀이죠.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요?”

“모르겠어요. 꽃집에서 짧게 일한 경력 가지고는 도통 짐작할 수 없는데요. 어릴 때도 뭐 종종 억지로 뭔가를 심어보기도 했었지만······ 자의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경력으로 칠 수도 없을 거예요. 그래도 일단 뭔가 익숙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어요.”

“그냥 풀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좀 크단 생각이 들지 않아요?”

“좀 그렇긴 하네요.”


나무의 대를 괜히 툭 건드려보며 나나가 대답했다.


“무엇보다 그냥 풀이라고 여기기에는 세상은 온통 풀투성이잖아요.”

“그런가요?”


다음에는 좌우로 기지개를 켜는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며 그녀가 말했다. 주화가 나나에게 손을 뻗어 그녀의 아직 어루만져지지 않은 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쌌다. 감각이 다른 체온에 놀란 나나가 눈을 크게 뜬다.


“실은 이번 새벽에 나나 씨가 자는 동안 하는 생각을 들었거든요.”

“제가요? 자는 동안에 꿈이 아니라 생각을 했다고요?”


보호대를 찬 것처럼 목의 움직임이 뻣뻣하고 어설퍼진 나나가 그 커진 눈만을 연신 깜빡이며 타인의 온도에 너무 쉽게 스며드는 제 살가죽을 가장 어색하게 여기는 듯한 눈빛으로 주화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가끔 밤에도 생각을 해요. 밤만 되면 많은 사람이 그 생각을 사색이라고들 부르던데, 왜 그런 건지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요. 고작 시간에 의해 변할 생각이었으면 깨어 있느니 차라리 잠드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어쨌든 잠들어 의식이 끊기고 난 밤, 흔히 주로 새벽이 되는 그 시간에도 생각을 할 수 있어요. 모든 사람이 그런 것도 아니고, 누구나 항상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은 언제나 끊임없이 이야기하니까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을 거예요.”

“굉장히 그럴듯한 정보네요. 이번 건 바로 믿게 돼요. 그런데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데요?”

“뭐······ 기억을 못 한다고 해도 본인이 제일 잘 아는 거일 텐데요?”

“제가 제일 잘 아는 거요?”


콧방울을 꾹꾹 누르며 나나가 고민에 잠겼다. 그때 무의식적으로 화분에 시선이 꽂혔는데, 뚜렷한 초점을 두지 않은 채로 보다 보니 바닥의 색깔과 이어져서 이 풀이 화분에 담긴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방에 심어진 것 같이 보였다. 세잔의 그림처럼 순식간에 광경이 원근감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균형감을 잃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어디서부터 흙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은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림이겠죠?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맞아요. 엄청 심각하게 고민하더라고요. 깨워서 이야기 좀 하고 싶을 정도로요.”

“제가 뭘 생각했는데요? 혹시 괜찮은 게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알려주시면 안 돼요? 저 지금 제 꼴보다도 더 절박한 심정이거든요.”

“그 심정이라면 아주 제대로 듣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나나의 목을 두르고 있던 제 손바닥을 그대로 위로 올려 그녀의 볼을 살포시 문지르며 주화가 낮고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곧 웃음기를 거두고는 이제까지 보인 다정한 행동은 금방 도래할 어떤 고해의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는 듯이 그녀는 경건하게 두 손을 포개어 제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실은 어제 일 때문에 그래요. 어제 내가 너무 나나 씨한테 소란을 떤 것 같아서 말이에요.”


실로 말할 것 같으면 소란보다는 혼란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이를 지적하지 않도록 하며 나나가 입을 다문 채로 주화의 겨울바람을 맞아 붉어진 듯한 표정을 주목했다.


“너무 정황이 없어서 그랬어요. 백면이 살아 있다니······ 그런 건 그저 낭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나한테는 너무 큰 충격이거든요. 알잖아요? 사장님, 아니, 고 씨 집안의 일도 그렇고······. 그리고 천일나무를 살리는 일에 온 정신을 쏟아붓다 보니까 마음이 늘 불안정했어요. 우습지 않나요? 성인이라는 존재가 불안해하고, 실수를 저지르고 말이에요.”


고개를 끄덕일 수도 저을 수도 없는 이야기에 나나는 차라리 아까 제 목을 감싸던 손길이 떠나지 않았었으면 하고 은밀히 원했다. 그 대신에 주화는 그녀의 손을 끌어다 잡으며 말을 마저 이었다.


“사람들이 큰 착각을 하는 게 있어요. 성인은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나나 씨는 지금까지 우리를 가까이에서 보아왔기 때문에 잘 알겠지만, 우리도 그냥 사람이에요. 다른 점이라고는 다른 사람들이 숫자를 하나만 셀 수 있을 동안에 우리는 그다음의 수를 이어서 말할 수 있다는 것 정도뿐이니까요.”

“다음의 수요?”

“그래요. 누군가 하나를 말하면 우리는 백, 천, 그리고 일만, 천만······ 더 나아갈 수 있어요. 만약에 나무가 계속해서 존재한다면 말이죠. 고작 이 차이점 하나가 우리를 다른 이들과 다르게 만들어놓았고······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참. 내가 말하려던 건 풀에 관한 것이었어요. 세상은 모두 풀투성이라고요.”


나나는 주화의 얼굴을 보고서 대나무 묘목을 쳐다본 후에야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상대에게 보냈다.


“사람은 죽어서 흙이 되잖아요. 그건 월계에 있는 사람이나 세계에 있는 사람이나 똑같을 거예요. 그렇죠?”

“맞아요.”

“그렇다면 나나 씨는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뭐가 된다고 봐요?”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나는 지금 비유를 하는 중인 거예요. 나나 씨를 위해서.”


입술을 깨물고 철학적인 난제에 놓인 나나가 천장을 바라보다가 거기에 별다른 위대한 대안이 매달려 있지 않자 바닥에는 뭐가 없나 아래로 눈길의 방향을 바꾸었다. 사방을 살피다가 고작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선명한 초록빛이 번뜩이는 풀이 전부였다. 그래, 우리는 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지.


“풀 아닐까요? 세상은 풀투성이라고 하셨으니까.”

“맞아요. 사람은 죽어서는 흙이 되고 살아서는 풀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함부로 뽑지 말고 물을 주고 햇빛을 보게 하고 적당한 세기의 바람에는 홀로 맞서도록 도와줘야 하는 거예요. 그 절차만 잘 이루어져도 아마 모든 사람이 불행은 모르게 될지도 몰라요.”

“굉장히 이상적인 세상이 되겠네요, 그럼.”

“하지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두지 않도록 하죠. 우선 성인이라고 하는 나를 먼저 봐요. 그렇게 볼썽사납게 초조하게 굴었잖아요.”


이번에도 그 어떤 고갯짓도 할 수 없게 되자 조금 고통스러워진 나나가 눈을 찌푸리며 하하, 어색한 웃음 소리를 내었다.


“마음껏 웃어도 돼요.”


주화는 이에 조금도 개의치 않아 하며 제 처지를 반성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오늘 좋은 일이 있었어요.”


희망을 불러들이는 것은 절망임을 기억하자 그녀의 얼굴은 금세 화색이 돌았다.


“천일나무를 살릴 수 있는 방향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앞으로 계속 시도해봐야겠지만······.”

“백면이 살아 있다면 그냥 찾아서 데려오면 그만 아니에요? 자기 문을 열게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녀를 내내 앓게 하던 문제의 근본적인 목적을 아직 모르는 나나가 잔뜩 의아해져서 그제야 고개를 비스듬히 두며 물었다. 약간의 해방감은 덤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언제 또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조금 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싶어서 그래요.”

“다른 방식이 뭔데요?”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할게요. 중요한 건 아니에요. 중요할지도 모르지만, 그걸 매 순간 느끼어 아는 일은 쉽지 않으니까요. 지금은 나나 씨에게 하려는 말이 더 중요해요.”


머금고 있던 수분을 모두 그 하나뿐인 나무에 내어주느라 말린 잎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주화가 말했다. 입에 고인 침이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건지 바싹 말라서 입이 떨어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달뜬 얼굴이 그것은 불안에 의한 것이 아니며 기대에 의한 것이라고 비밀스레 나나에게 말을 걸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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