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연재수 :
333 회
조회수 :
14,289
추천수 :
244
글자수 :
1,286,707

작성
21.01.14 23:59
조회
27
추천
2
글자
10쪽

224화

DUMMY

인영의 저번 불시 방문 이후로 입이 가벼운 줄로만 알았던 이 씨는 알고 보니 실로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안수가 왜 그리 이 씨의 서점에 들르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사실 그가 입이 무거운 사람이 아닌지도 모른다. 단지 그는 비록 그의 한계일지라고 해도 보통의 사람들은 모르는 중요한 사실의 가치를 아주 잘 식별하는 능력을 타고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대로 신뢰감을 얻을 수 있는 사람 말이다.


“그 여자가 누군데요?”

“그야 모르지.”


그 상대가 경원을 사는 존재인 것이 마땅한 것처럼 이 씨는 자신의 무지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저라도 대신 여자의 이름을 말하고 싶은 마음에 입안이 대번에 돌 부스러기를 삼친 것 같이 까끌거리는 것을 나나가 느꼈다.


“솔직히 사랑이라는 것도 어떤 사랑일지는 아무도 몰라요. 단지 표정이나 몸짓 같은 거로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지. 왜, 눈빛에도 언어가 있다면 내 이야기가 전혀 헛소리는 아니란 말이지요.”

“어떤 사랑이라니, 무슨 특별한 사랑이라도 되나요?”


우선은 뭐라도 주워 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 부스러기를 알알이 들여다보고 가치를 매길 여유 따위는 나중에 부리면 그만이다.


“특별한 사랑인 것만은 틀림없지. 그 친구가 여자와는 담을 쌓고 살기는 했거든. 게다가 성별을 떠나서 사람 자체에 그리 호의적인 양반은 아닌지라 자기가 아닌 누군가를 이야기할 때 신나고 들뜬 표정을 짓는 그 친구 얼굴을 본다면, 그건 특별한 사람에 관한 것이 틀림없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겠지요. 그런데, 여자를 직접 데려온 적은 한 번도 없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낯선 여자가 이쪽에 저 대단하신 화백 양반을 보러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단 말이지. 참 희한한 일이야. 후원인이기 때문에 일부러 거리를 두는 건가 생각도 해봤는데, 궁핍한 화가 생활도 청산한 지도 꽤 되었거든. 그야 행색만 그리 보였던 가난이기는 했다고 해도.”


이 씨는 서서히 억양을 잃어가더니 이내 무중력감이 느껴질 만큼 얌전한 말투로 중얼거린다.


“어쨌든지 희귀한 사랑이란 건 분명하겠지만, 내가 없었을 때 누군가와 밀회 같은 걸 가지지 않았다면 아마 그 친구의 화실에 개인적으로 방문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만큼 희한하지는 않을 겁니다. 정말로요. 그래, 아가씨를 빼놓고 이야기한다면 말이지!”

“저요?”


나나가 곁눈질하며 주변을 둘러본 후 자신의 심장 부근을 스스로 가리켰다. 총이라도 겨누어진 듯이 바르르 떨리는 긴장감이 혈관에 스며든 것 같다.


“아무리 유명한 예술가라고 해도 그 사람을 보러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아요. 환상이 깨지기 쉽거든. 더군다나 이 친구는 외부와의 교류는 거의 명월미술관을 거의 대리인 삼아가면서 그쪽에 맡기고 있는 터라 만나는 여자들은 모두 이 사람 얼굴보다도 그림을 먼저 본 사람들밖에 없는데, 그렇게 하나둘씩 제외하고 보면 아가씨만 딱 한 명이 남네. 참 신기한 일이기는 하군! 만약 아가씨도 안 보이게 되었더라면 나도 당연히 두 사람의 사이를 의심했을 겁니다.”


자신에게는 책임질 것이 추호도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정해두기 위해 이 씨는 현을 조율하는 악사처럼 신중한 손가락질을 보였다. 자신의 입이 비록 여물지는 못하다고 할지언정 경솔히 마르지도 않았다는 것을 일러두는 일종의 표시였다.


“그건 너무 황당한 거 아니에요? 저희는 전혀 접점 같은 게 없는 데다가, 그리고 아시잖아요! 제가 저기를 들락거렸던 건 그림 때문이었다는 걸요. 일부러 찾아가려고 해서 찾아간 것도 아니었거든요.”

“원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는 쪽이 확률적으로 더 많을 거요, 이거 하나만큼은 장담할 수 있겠군.”

“허······ 참! 아무래도 좋아요. 어차피 제가 사라진 것도 아니니까 그런 오해는 안 하시는 거잖아요?”

“그렇지요, 내 말의 요점이 바로 그거였는데!”


이 씨가 통쾌하고 개운하다는 얼굴로 입가에 심심한 미소를 걸쳤다. 이후 그는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는데, 이때 나나는 그가 주먹을 쥔 손 너머를 내다보며 묘안을 하나 찾아냈다. 여자가 누군지 모른다면 다른 것을 캐내면 된다. 그렇다면 여자가 누군지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그래도 이건 이 서점 사장의 말마따나 사생활이 아니었던가. 그것도 지극히 사적인 부분에 속하는 문제다. 비밀인지 아닌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순전히 개인의 영역이니까. 비록 화가가 도망쳤다고 해서 연애 사업을 파고드는 것은 그가 마땅히 임해야 할 책무를 회피한 데에 대한 벌로는 전혀 마땅하지 않다.

그래도 혹시라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알아두는 것도 좋을 수 있다. 나 역시 이번 도주 문제로 골칫거리를 떠안은 엄연한 피해자니까 어느 정도 파고들 권리는 있다. 탐정은 아니더라도 그 조수쯤의 자격은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이 씨의 이야기에 솔깃한 건 인정하지만, 굳이 나서서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애초에 화가의 이름도 굳이 궁금해하지 않았던 초기를 떠올려보면······.

망막에 맺힌 상이 비단 비 내리는 풍경과 저를 의아스럽게 쳐다보는 이 씨의 모습만은 아닌 것 같다. 문득 월계라는 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무언가 조치가 필요하다.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허풍을 떨 만큼 경론(輕論)한 것도 아니거니와 허락을 구할 만큼 심절한 눈빛을 보내는 것도 아닌 나나의 당찬 어투에 꽤 놀란 이 씨가 헛기침한다.


“아, 아니. 그런 건 왜,”

“좀 만나려고요.”


남이 말하는 도중에 끼어드는 무례를 범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나에게 있어서 이 씨가 다음으로 할 말은 불 보듯 훤한 것이었다.


“기다리면 언제 올 줄 알고요? 그림을 몇 번 보, 아니,”


그러다 보니 제 속을 들여다보는 일을 깜빡하고 말았다. 세잔의 그림을 제외하는 것을 그만 잊어버린 것이다. 목소리를 가다듬는 사이에 수상한 눈길이 느껴졌으나 애써 무시하며 태평하게 말꼬리를 붙인다.


“그림을 몇 번 본 것도 아니고 고작 한 번 본 건데 도대체 뭘 제대로 기억이나 하겠어요? 아까 당부하신 대로 절대로, 절대로 미술관 측에는 입도 뻥끗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던데다가, 아시잖아요. 그 부담스러운 눈빛.”


이 씨는 인영의 집요한 구석이 있는 눈길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그가 “아주 잘 알고 있지.”라고 하소연하자 이를 놓치지 않고 나나가 더욱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그 정도는 알려줘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림을 대충 베껴오기만 하면 되거든요. 저도 이 위기에서 이제 벗어나야죠. 계속 시달리고 지냈단 말이에요. 그리고 비밀이 아닌 것도 아니라면, 비밀인 것도 아니잖아요. 약속은 반드시 지킬게요. 정 못 미더우시다면 방금 한 약속을 지킬 걸 또 약속할 수도 있어요.”


이 씨가 곤란하다는 듯이 입을 다소 우악스럽게 다물었다. 고민은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잡념 중에 하나다.


“정말 약속을······.”

“지킬게요!”


빠르게 말을 가로채며 나나가 생긋이 웃었다. 일부러 제 우울과 번뇌를 쥐어짜고 비틀어서 입꼬리를 올린 것이어서 그리 화사하지는 않았다.

빠르게 말을 가로채며 나나가 생긋이 웃었다. 일부러 제 우울과 번뇌를 쥐어짜고 비틀어서 입꼬리를 올린 것이어서 그리 화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것은 날이 새고 나서였다.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이기도 하다. 서점에서는 진작부터 나왔으나, 인영에게 따로 고할 것도 있고 여차저차 길을 거니느라 어쩔 수 없이 시간이 더 소요되고 말았다. 비 오는 날의 거리는 흔히 생각하는 자의 것이기도 하니까 특권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퇴근 후부터 나름대로 좌불안석에 나나를 기다리고 있던 조이가 아이를 안은 채로 부엌에서 나오며 나나를 부른다.


“나나 씨, 어디에 있다 온 거예요? 비가 와서 혹시 어디서 넘어졌나 걱정이라도 했어요.”


다박다박 쏟아뱉는 말이 그리 성가시게 들리지 않은 것은 그 속에 다정함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기분 좋게 받아들인 나나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는 웃어 보였다. 아까보다는 훨씬 더 가볍고 진심 어린 미소다.


“오늘은 좀 늦었어요. 무슨 일 있던 거예요?”


조이가 그 미소를 순수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근심스럽게 물었다.


“이걸 구하느라 좀 늦었어요.”


나나가 꽤 커다란 종이 봉투 하나를 위로 들어 보이며 킥킥거렸다. 장난을 꾸미는 것 같지는 않은 듯한 기색에 조이는 약간 겁을 먹으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왔다.


“그게 뭔데요?”


제법 침착하게 말하기는 했으나, 눈가에 서린 근심은 완전히 걷어낼 수 없었다. 조이가 목을 빼꼼히 내밀며 눈에 주름이 질 만큼 봉투를 집중해서 쳐다보자 나나는 그 봉지 안에 든 거이 실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아주 거침없는 솜씨로 그 안을 헤집으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상한 건 아니에요, 그냥 작품집이거든요.”


누구의 것이냐고 묻기도 전에 나나가 표지를 내보이는 통에 조이는 귀찮게 입을 열 필요도 없었다. 나나가 책을 요리조리 굴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제대로 읽지 못할 뻔했지만, 마침 그녀가 책등을 보이며 멈추었기에 그 위쪽에 쓰인 『천우』라는 제명(題名)이자 인명(人名)인 이름을 읽었기 때문이다.

나나가 일단은 외상으로 이 씨에게서 뜯어내 가져온 것이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달이 만든 세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47 246화 21.02.05 28 2 9쪽
246 245화 21.02.04 28 2 9쪽
245 244화 21.02.03 28 2 10쪽
244 243화 21.02.02 35 2 9쪽
243 242화 21.02.01 27 2 10쪽
242 241화 21.01.31 28 2 9쪽
241 240화 21.01.30 38 2 9쪽
240 239화 21.01.29 26 2 9쪽
239 238화 21.01.28 28 2 11쪽
238 237화 21.01.27 29 2 9쪽
237 236화 21.01.26 32 2 9쪽
236 235화 21.01.25 29 2 9쪽
235 234화 21.01.24 30 2 9쪽
234 233화 21.01.24 26 2 9쪽
233 232화 21.01.22 33 2 10쪽
232 231화 21.01.21 29 2 9쪽
231 230화 21.01.20 28 2 10쪽
230 229화 21.01.19 34 2 9쪽
229 228화 21.01.18 29 2 10쪽
228 227화 21.01.17 30 2 10쪽
227 226화 21.01.16 84 2 10쪽
226 225화 21.01.15 27 2 10쪽
» 224화 21.01.14 28 2 10쪽
224 223화 21.01.13 28 2 10쪽
223 222화 21.01.12 31 2 9쪽
222 221화 21.01.11 27 2 9쪽
221 220화 21.01.10 28 2 9쪽
220 219화 21.01.09 30 1 10쪽
219 218화 21.01.08 33 1 10쪽
218 217화 21.01.07 28 1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