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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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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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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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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화

DUMMY

머리를 얹은 베개가 사르르 무너졌다. 시간과 결탁한 계절이 어떤 흉계를 꾸미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다. 그런 것들을 종종 날씨라고 부르던데, 만약 계절이 한 명의 인간이었으면 자신의 감정 하나 다스릴 줄 모른다고 단단히 혼쭐이 났을 듯하다. 나나는 손을 뻗어 화집을 가져왔다. 크기도 무게도 모두 손목 하나가 버티기에는 각각 위엄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러는 동시에 몸을 일으켜 품에 안았을 적에 책은 두 손으로 공손히 든 상태였다.

이번에는 몰락했다고 해야겠다. 폭삭 주저앉은 베개는 화집의 존재감에 짓눌려 자취를 감추었고, 그 몰골조차 없는 참혹한 형상에 연민의 인사를 건넨 것은 절뚝거리는 상이군인의 뭉클한 행진 같은 빗소리가 전부였다.


“이건 터너가 분명한데.”


해묵은 기억이 가벼운 푸념과 헛된 희망을 뚫고 현재로 뻗어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가 분명하다. 돈이 되는 그림을 두고 예술의 가치를 찾는 이들이 더러 있기 마련이지만, 말 그대로 돈이 되어버린 이 그림은 확실히 터너의 것이다. 산업혁명의 상징이라고 하는 증기선이 그의 화풍으로 그려졌으니 의심의 여지를 찾으려면 진위 여부를 따져야만 할 것 같을 정도다. 확신에 찬 나나는 방금 떠올린 제 의견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호가스야. 그러니까 이건 그림 제목이······.”


말을 마저 잇기 위해서는 그림을 더 꼼꼼히 관찰해야만 했다.


“뭐였더라? 그러니까, 이건······ 「맥주 거리」!”


윌리엄 호가스의 동판화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맥주 거리」와 쌍을 이루는 「진 골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중요하게 여긴 논점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경은 온통 「맥주 거리」에 쏠려 있었다. 갑작스러운 추위를 느낀 나나가 닭살이 돋은 제 팔의 피부를 어여삐 문지르며 재채기를 터뜨렸다.

도대체 무슨 우연일까? 어떤 신호였던 것인지는 몰라도 이 천우라는 화가의 그림은 전부 다 자신이 알고 있는 화가들의 작품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이다. 모조작이라고 해도 흠잡을 데가 없어 보인다. 화집을 덮기 전에 의구심을 떨치고자 책장을 마구 뒤적거렸는데, 그때 발견된 것은 지슬라브 백진스키의 제목 없는 그림 한 점이었다. 이렇게 부르면 화가에게 예의가 아니겠으나, 익숙한 쪽으로 마음이 쏠리는 것은 과학으로도 논할 수 없는 법칙이니 어쩔 수 없다.

해골인지 사람인지 모를 두 형체가 서로 입을 맞추고 있었다. 연인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것 같은 느낌에 왠지 민망해진 나나는 그대로 책을 뒤집어 덮었다. 병에 든 잔여물이 얕은 파도를 치며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하필이면 왜 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인 거지?”


폴 세잔의 「사계절」을 따라한 남자의 그림은 우연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기가 막히게 재연해낸 바람에 그렇게 믿지도 않았지만. 그러나 그가 시작일 줄은 몰랐다. 가장 최근에 잠시 마음에 두었던 윈슬로우 호머의 그림이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터너, 호가스, 백진스키 모두 한때 그녀가 푹 빠졌었던 화가들이다. 당연히 세잔을 포함해서 말이다.

책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얼굴을 뉘였다. 스적거리는 소리가 귓구멍으로 엄숙하게 파고들었는데, 그때 새로운 이름이 하나 떠올랐다. 스콧! 윌리엄 스콧의 그림도 있는 것은 아닐까? 급히 어깨 부근에까지만 급격한 경사를 만들어 몸을 일으킨 나나는 떨쳐버린 화집을 다시 주워 와서 곧 그 사이사이를 헤적대기 시작했다. 도로 그녀는 녹초가 되고 말았다. 스콧의 그림은 없었다. 하기야 스콧은 아주 잠깐 좋아했던 화가이니 있을 리가 없다.

남자의 그림을 먼저 보고 그를 만나러 간 것이 실수였던 것도 같다. 자의든 타의든 어쨌거나 그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순간이 위기처럼 이르고 말았으니 그 도래한 운명을 앞두고 남자가 과연 어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지 제대로 알고 싶어서 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 바람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이 느낌을 굳이 표현해야만 한다면······ 허무일 것이다. 남자의 그림은 참으로 화려한 전력을 자랑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각양각색의 매력을 보였다. 그런데 그에게 과연 그만의 화풍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좋은 그림들이기는 했지만, 한 사람이 전부 독차지하기에는 각자 개성이 매우 강한 작품들이었다.

가출 같았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도진이 새로이 꺼냈던 이야기도 한 폭의 그림이 되더니 그 옆자리에 그려져서 불길한 예감을 증폭시켰다.


“백나나 씨!”


도진이 부르는 소리는 아니다. 그는 이상하게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자신에게 다정한 태도를 유지해온 탓에 성을 떼고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 앙칼지고 성가신 음은 분명히 그녀의 것이다. 나나는 일부러 잠에 든 척을 하려고 눈을 감았다.


“백나나 씨! 안에 있는 거 다 알아요!”

“혹시 지금 잘 수도 있으니까······.”

“무슨 대낮에 잠을 자요? 그리고 설령 지금 자고 있다고 해더라도 깨워야 해요. 백나나 씨!”


도진의 말을 끊고는 알아서 대화를 마무리지은 다음에 문에 대고 목청을 뽑는 장면이 그려지는 것은 경험에 의한 것인지 상상에 의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림을 너무 오래 쳐다봐서 그만 장면을 화면으로 오해하는 것일 수도 있다. 돌아온 뒤로 너무 침울하게 굴기는 했다. 그야 그럴 만도 하다고 이 아지트에 사는 식구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는데, 부담감을 떨치려닥다 책임감을 떠안게 되어버린 나나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서 그렇다.


“백나나 씨! 자고 있으면 좀 일어나 봐요!”


달아나고 싶어졌다. 그런데······ 어쩌다가 여기에 발이 묶이게 되어버렸지? 사막에서는 길의 방향을 찾을 수 없어서 길을 잃는 것일까? 이곳으로 이끈 거울이 사라진 판국에 다른 방도가 없는 나나는 결국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고 있었어요.”


지나치게 똘망똘망한 눈을 하고서 문을 여니 그 틈으로 곤란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도진의 불쌍한 처지가 제일 먼저 들어왔고, 그 밑으로는 부쩍 단발머리의 날이 더 반듯해지는 듯한 인영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나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알 방법이 있어야죠. 안 그래요? 그림은 그렸나요? 대충이라도 좋아요. 크로키라도 있다면 아주 중요한 참고가 될 거예요.”

“그림은 안 그렸어요.”

“안 그렸다니요? 완성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나는 되도록 일을 제대로 처리하고 싶어서 그 중간 과정만이라도 알고 싶은 마음에 백나나 씨를 찾아온 거예요.”

“음······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완성되지 않은 그림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는 않을 텐데요.”


이미 인영이 제멋대로 나나의 방에 들어온 직후였다. 너무나 예의를 차리느라고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기를 자처하는 불안한 얼굴의 도진을 무심히 훑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두 여성이 서로를 마주하면서 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건 맞네요. 백 번이나 말해도 백나나 씨의 말이 옳아요. 하지만 백나나 씨는 지금 화가가 아니라 이를 테면······ 조수 같은 자격으로 천 선생님의 전시회 준비에 참여하고 있는 거니까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예민한 건 알겠지만, 이쪽의 사정도 헤아려줬으면 해요.”


자연스레 침대 위에 삐딱하게 놓인 천우의 화집을 집어 들며 인영이 말했다.


“하지만 그분은 조수 같은 거 안 둔대요.”

“······그러면 애정하는 제자로서 참여하는 건 어때요?”


나나의 딱딱해진 말투를 눈치챈 그녀는 어르는 듯이 다시금 권유했다.


“애정하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요. 저희는 그런 사이 전혀 아니거든요.”

“알아요. 하지만 백나나 씨가 천 선생님께 중요한 존재인 것만 분명해요.”

“어째서요?”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나요? 선생님은 좀처럼 그런 분이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그렇다는 것은······ 뭐가 됐든 둘 사이에 뭐가 있긴 있단 뜻이죠.”


하도 지겨워져서 그런지 화를 낼 힘도 없어졌다. 혹은 그림이 안겨주는 황홀감에 못 미치는 현실이 지루해져서 그런 것도 같다.


“그림을 구해올게요.”


그래서 홧김에 던진 말이 자신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지 나나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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