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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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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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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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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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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19화

DUMMY

“어서 와요. 비가 와서 오는 길이 좀 편치는 않았죠?”


사무실 문을 열어주는 인영의 뒤쪽이 조금 부산스러운 것 같다. 인영의 공간에는 창문이 없으니 빗소리 때문은 아닌 듯하다. 나나는 걸음질을 하기에 앞서 상체만을 앞으로 기울여서 그 안을 살피려고 했다. 사람의 것이 분명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손님이 또 온 모양이군.”


손님이 또 왔다니? 나나는 목소리가 주는 익숙한 불쾌감에 제 입술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별다른 말을 하지는 못하고 인영이 이끄는 대로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또 보게 되는군요.”


태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기현이 악수를 청해왔다. 손에 새겨진 주름이 결코 무고한 세월의 것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나나는 아무것도 못 본 척 그를 외면하며 애꿎은 벽만 둘러보았다. 일부러 벽면에 걸린 인영의 초상화에 관심이 있는 듯한 깊은 눈빛을 보내며 말이다.

하운드투스 체크무늬의 천소파에 도로 앉은 기현이 헛기침을 했다. 나나는 그마저도 못 들은 척을 하며 아직 문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상태다. 사무실 책상 뒤 구석에 단출하게 마련된 작은 슬림 테이블로 가 새로운 손님 몫의 차를 준비한 인영이 소파로 돌아와 차를 내어놓았다.


“앉아요.”


마치 기현은 애초부터 이곳에 없는 것처럼 나나는 인영의 부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슬그머니 인영의 옆에 앉았다.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할 것을 염두에 두었던 인영은 인상을 쓰며 손짓으로 기현의 빈 옆자리를 가리켰다.


“웬만하면 저쪽으로 가줄래요? 이야기는 서로 마주 보면서 해야죠.”

“역시······ 역시 그렇겠죠?”


오히려 꼴이 더 우스워진 것 같지만, 경련이라도 일어난 양 얼굴근육에 어떻게든 힘을 주어 웃은 나나가 아주 더디게 기현의 옆으로 갔다. 그리고는 그와 두 뼘은 족히 넘는 거리를 두며 아주 더디게 무릎을 접으며 소파에 앉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잘 왔어요. 이걸 교수님께 먼저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아니면 나름 선생님의 유일한 제자인 백나나 씨한테 알려야 할지 어제부터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두 사람을 제 앞에 동시에 두고 이야기할 수 있다니 정말 운이 좋지 뭐예요.”

“이야기라고요?”


중간에 끼어든 나나의 질문은 사뿐히 무시한 채 인영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어떻게든 잘 해결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흐음. ‘어떻게든’이라니 분명히 우 선생이 제일 먼저 중요한 소식을 낚아챈 것 같군요.”

“맞아요, 역시 예리하시네요.”


인영의 박수 소리와 기현의 웃음소리가 나나에게는 이들이 작정하고 자신을 소외시키려는 듯이 매정하게 들려왔다.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그리 좋은 표정을 보여주고는 있지 않을 게 뻔하다. 아무래도 도진을 따라서 갔어야 했나 뒤늦게 후회가 들기도 했다.


“혹시 백나나 씨는 따로 전해 받은 이야기가 있나요?”

“저요? 누구한테요? 일단 없는 것 같은데요.”


도진과 바로 어제 나누었던 대화를 가리키는 건 아니라는 게 너무도 분명하니 나나는 결백한 고갯짓을 보여야만 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것이 인영의 들뜬 마음을 조금 가라앉게 만들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정오부터 무통보로 쏟아진 비에 영향을 받지 않은 건 인영과 기현 둘뿐인 듯하다.


“내가 어김없이 매일 선생님 작업실을 들른다는 건 알고 있죠?”

“네, 뭐.”


실은 이에 관해서 이야기도 나눠본 적 없지만, 그럴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 인영의 물음에는 아주 쉽게 긍정할 수 있었다.


“어제는 조금 늦게 찾아가게 되었어요. 원래라면 아침부터 죽치고 기다릴 생각이었거든요. 사람이 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리고 그 감은 대개 여자들 것이 더 좋은 편이죠.”

“그렇지.”


이 순간에 맞장구를 치는 기현의 태도가 하도 생뚱맞아서 나나는 저도 모르게 그를 흘깃 쳐다보고 말았다. 하지만 턱을 천천히 쓸며 인영의 이야기에 심취하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만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런 감이 들었거든요. 바로 어제요. 하지만 회의가 잡혔는데 도저히 빠질 수 없는 회의였어요. 관장님께서 참석하시게 되면 아무리 쓸모없는 회의라고 참석해야 하거든요. 명예가 가치로운 것은 맞는 것 같아요. 그저 의례적 행사에 불과한 회의일지라도 그 명맥을 계속 이어나가게끔 거기에 가치를 불어넣잖아요. 어휴, 조금 더 일찍 가면 좋았을 거긴 해요. 그건 확실하죠.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야 그랬겠지요. 우 선생도 워낙 천 선생의 그림에 푹 빠져 있지 않나?”

“맞아요. 그래서 제가 그런 직감을 가지게 된 걸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퇴근 후에 선생님 화실을 찾았을 때 선생님이 따로 쪽지를 남겨두셨거든요.”

“쪽지를?”


소파에 기대어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던 기현의 여유가 순간적으로 온데간데없어졌다. 그는 등을 곧게 펴며 몸을 조금 더 앞쪽으로 당겼다.


“네, 정말로 아쉽긴 해요. 더 일찍 갔더라면 분명히 쪽지가 아니라 선생님을 낚아챌 수 있었을 거예요.”


인영이 머리가 아픈지 손가락 끝으로 이마를 짚었다.


“쪽지에 뭐라고 쓰여 있었지?”


자신도 대화에 끼려고 나나가 입을 벙긋거리는 순간에 기현이 다급한 어조로 그 기회를 새치기했다. 단순히 천우인지 천 선생인지 그렇게 불리는 인물이 내놓는 예술의 애호가라고 하기에는 과민 반응이 아닌가 싶어서 인영의 사무실로 들어온 이래로 나나는 처음으로 기현의 옆얼굴을 뚫어질세라 오래 바라다보았다.


“그동안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느라 많이 부담스러웠으니, 그 부담감에 대한 책임감을 지기 위해 잠시 어디를 좀 다녀온다는 내용이었어요.”

“어디를 간다는 이야기는 따로 없었나?”

“그게 가장 아까운 부분이에요. 목적지는 전혀 밝히시지 않았거든요.”


인영이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번에 보았던 구두보다도 더 높은 것을 신은 탓에 그녀를 올려다보기란 꽤 목이 아픈 일이다. 그런데도 두 손님은 어떻게든 인영의 행동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그녀의 움직임마다 눈알을 요리조리 굴렸다.


“이 쪽지예요.”


두 찻잔 사이 정확히 가운데가 되는 지점에 인영이 자신의 책상에서 가져온 쪽지를 놓으며 아주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그림이 너무 부담스러워졌어. 잠시 그만두려고 해. 나를 찾지 마, 특히 내 그림을 원한다면 말이야.]


휘날린 글씨체기는 해도 퍽 그 이미지에 맞는지라 나나는 그 필체가 누구의 것인지 의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나나는 쪽지를 두어 번이나 더 읽은 후에야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을 들어 보였다.


“말씀하신 거랑 완전 다른 내용이잖아요!”


하도 어이가 없는 통에 끝에 가서는 언성이 높아졌다.


“그게 그 소리죠. 그렇지 않나요, 교수님?”


인영이 끝이 일정하게 맞아떨어지는 단발머리를 경사지게 기울이며 기현의 정수리를 쳐다봤다. 곧 그가 쪽지로부터 멀어져 소파 등받이에 몸을 맡기며 말한다.


“확실히 긍정적인 것 같기는 하다만.”

“역시 그렇다니까요. 그래도 무소식보다는 이런 희소식이 낫죠.”


나나가 쪽지를 집어 들었다.


“이게 어떻게 희소식이에요? 무소식이 더 나을 판인 것 같은데, 어딜 봐서 긍정적인 것 같다는 거예요? 그만둔다잖아요?”


제 알 바가 아니라고 되도록 간선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나나가 화가의 잠적 사건에 가장 깊게 개입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제대로 읽어봐요.”


인영은 그 쪽지를 빼앗으려는 것처럼 거칠게 팔을 뻗었는데, 그러지 않고 손가락으로 쪽지를 가리키며 나나에게 다시 정독할 것을 권유했다.

혹시 제 눈이 잘못된 걸까 싶어 몇 번이나 읽어보았던 나나는 그래도 예의상 그녀의 장단에 맞추어 쪽지를 다시 쳐다봤는데, 그래도 같은 내용임에는 변함없다.


“아무리 읽어도 아까 이야기하신 거로 들리진 않는데요?”

“아니에요, 그만둔다고 하신 건 맞지만 ‘잠시’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곧 돌아오신다는 의미예요.”

“그게 도대체 언제인 줄 알고요?”

“아마 전시회 당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곧이겠죠.”

“그다음에 찾지 말라고 적힌 말은 그럼 저만 읽을 수 있는 거예요?”


나나가 성미를 참지 못하고 던지듯이 쪽지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인영이 그것을 금세 주워가서는 나나 앞에 내밀었다.


“제대로 읽어보라니까요.”

“제대로 읽었어요. 저도 글을 읽을 줄 알거든요.”

“아닌 것 같은데요?”

“뭐라고요?”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인영의 시치름한 태도에 나나가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기현은 제삼자가 되기를 자처하며 이 대화에는 좀처럼 난입하지 않고 있었다.


“백나나 씨, 당신이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무시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오히려 나 같은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존경하거든요. 하지만 말과 글이 다른 것처럼 글과 그림도 다를 수밖에 없어요. 아마 백나나 씨는 글을 읽을 수는 있어도 제대로 읽지는 못하는 것 같네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사람을 오해해도 정도가 있지, 여기 적힌 걸 보면 찾지 말라고 못까지 박아놨잖아요.”

“선생님이 확실히 조건을 붙이시긴 했죠.”

“조건이라고요?”

“선생님의 그림을 원한다면 선생님을 찾지 말라고 말이에요.”


벙찐 나머지 나나는 되는 대로 제 입을 다 벌릴 수밖에 없었다. 어금니까지 훤히 내보이고도 우습게 벌린 입을 다물 수 없던 건 화가의 쪽지를 두고 이들과 자신의 해석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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