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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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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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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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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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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32화

DUMMY

아무에게도 걱정을 끼치거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무연고자의 가장 큰 장점이자 서글프게도 유일한 장점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버림받은 신세도 썩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다만 열성을 자랑하며 뜸을 들이는 황호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데려온 곳은 수도의 소속이라고 보일 수 없을 만큼 외곽에 자리한 허름한 판잣집이었다. 궁상맞고 왜추한 그 외관에 노인마저 보잘것없어 보여야 할 따름인데, 하늘의 입보다 작고 바다의 혀보다 가벼운 만고의 애수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 같아서 도진은 결코 비웃을 수 없었다.

자리한 이슬이 나뭇잎만큼 우거진 떡갈나무 숲으로 길을 안내한 노인은 초라한 행색으로 줄곧 도진에게 이상한 책더미만을 건넬 뿐이다. 아무리 독서 삼매경이 도진에게 있어 가장 도달하기 쉬운 비경(祕境)이라고 하더라도 까닭도 모른 채 이야기의 주제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며 그는 영문을 모르며 책장을 넘기는 자신을 위로해 왔다.

나나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겠지만, 비가 그친 곳은 비단 귀천만이 아니었다. 감천이라도 된 것처럼 풀 냄새와 흙냄새는 물방울이라는 향신료를 얻어 감칠맛을 있게 향긋한 냄새로 도진의 시선을 외부로 돌려놓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 그는 움직일 때마다 삐걱 소리가 흉측스럽게 들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곧 쓰러진다고 한다면 이미 쓰러진 것이 아니냐고 모두가 되물어올 만한 고물 책상 앞에 앉은 황호는 허리를 반달 같이 굽히고 종잇장을 넘기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변변한 책장이 하나도 없어서 어딘가에 쓰레기로 버려진 것을 주워 그대로 가지고 와 요긴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나무 받침대 위로 책이 층을 이루며 누워 있다.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도진이 다가오자 황호는 서둘러서 책을 덮어버렸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에 호기심 한 방울이 더 떨어져서 그대로 녹아 사라질까 싶은 두려움으로 도진도 이쪽을 굳이 쳐다보지는 않았다.


“뭐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지?”

“시집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으면서······ 자꾸 미루고 계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는 여기에 책을 읽으려고 황호 님을 따라온 게 아닙니다.”


여름 공기의 무게와 정확히 일치하는 정도의 가벼움으로 황호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가사 없는 노래를 끝내고는 이제야 가사를 들려줄 작정으로 입을 연다.


“내가 보여준 책은 다 읽었나?”

“네, 읽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 알겠군.”

“알겠다니, 뭘 말이죠? 제가 읽은 것이라고는 시간의 순서,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서 서술된 규방문학의 역사가 전부입니다.”

“그러니 이제 다 알겠다는 것이지.”


본래 성인(聖人)들이란 결코 확실하고 명확한 지식을 그대로 던져주지 않는다. 만약에 그런 자가 성인이라고 한다면 그는 그저 나이만 먹은 성인(姓人)에 불과할 것이다. 도진은 자신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아직 감을 잡지 못한 채로 황호의 의자 등받이에 팔을 받쳤다. 워낙에 부러진 곳들이 눈에 훤하게 들어와서 완전히 의지하지는 못했지만.


“뭘 말입니까? 규방문학에 대해서······는 아닐 것 같은데요.”

“좋게 넘어가도록 하지. 백면 그 녀석도 그리 똑똑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래, 좋아. 너를 여기에 너무 오래 묶어두면 다른 녀석들이 나를 의심하려 들 거야. 내가 어떤 고생을 하고 있는지 아직 다들 알지 못하거든. 슬픔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어? 행복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은 있어도 슬퍼지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으니 나의 노력을 알아주는 이도 아무도 없는 것이지.”


그에 대한 보상인지는 몰라도 황호는 도진의 등을 자신의 가슴팍이라도 내리치는 것처럼 힘껏 토닥거리며 그를 밖으로 이끌었다. 숲의 시원스러운 향기가 스며 물결처럼 목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주었다. 이 둘은 그리 멀지 나가지 않았는데 이 탓에 노인의 오막살이집이 풍기는 케케묵은 악취도 자신에게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논문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생각하는 논문은 뭐인지 그 의견이 듣고 싶은데. 너는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인간의 마음에서 감정을 읽어내지 생각을 읽어내지는 않으니까 괜한 지문이 아니라는 걸 염두에 두고 진지하게 대답해줬으면 해.”


놀랍게도 긴장한 나머지 도진이 헛기침을 했다. 그는 너무 깊은 생각은 독이 되어 혀를 마비시킬 뿐이라고 느끼는 바람에 우선은 입부터 벌리기로 결심했다.


“진리는 아닐지라도 진리에 가까운, 그러니까 진실을 서술하는 하나의 이야기 방식이 아닐지 싶은데요.”

“두루뭉술하기는 해도 아주 완전히 틀린 소리는 아니네. 아무래도 좋아. 그렇다면 너는 정안수의 이번 논문이 어떤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예? 어떤 이야기······.”


끝끝내 계략에 걸려든 어린 양처럼 도진은 말을 잃고 말았다.


“네 주장에 따르면 그 논문에는 진실이 없을 거 아니야!”


난데없는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들고 도진은 자신의 처지를 새롭게 자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으나, 아니면 이미 아실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다른 분들도 백면의 이름이 한 번 더 세속을 떠들썩하게 하는 걸 원치 않으셨고.”

“홍연이 죽은 건 우연이 아니었어.”


나나가 처음 월계에 왔던 날, 붉은 안개가 시야에 자욱했던 날의 시점(視點)을 되새기며 도진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여름에서 갑자기 겨울로 건너 뛰어버린 듯한 시점의 변화였다.


“전부 다 우연이 아니었지. 천규도 죽었다지? 그리고······ 아무튼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해야겠어. 너와 나 사이에서만 둘 문제가 아니어서 그래.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러니까 내 말의 요지는 그 논문도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이지.”

“우연이 아니었다면 황호 님께서 당연히 그 내용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시겠죠?”

“녀석들이 어디까지 꿰뚫어 보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게 가장 아쉬워.”

“방금 말씀하신 녀석들이라면?”

“당연히 내 형제들이지, 누구겠어. 전부 다 얼뜨기에 머저리들에 불과해. 명예를 안겨주려거든 목숨이 아니라 삶이 영원한 인간들에게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름을 붙일 것이지. 천일나무가 썩어버리면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아무도 몰라!”


노인이 입술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부리는 결기에는 영원한 젊음 같은 것이 맺혀 있어서 도진은 그것의 실체가 깊고 넓은 슬픔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신비로움이 황호를 더더욱 별개의 존재로 만들어준다는 것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너를 하루 정도 붙잡아둔 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두지. 변명은 아니야. 지금 내 꼴이 꼴불견일 만큼 늙고 추하기는 해도 그렇게까지 궁색하지는 않으니까.”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주변을 둘러보며 도진이 말했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바로 이 시점에서 황호는 굳이 도진의 꿍꿍이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인물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지 식은 죽 먹기처럼 잽싸고 간단하게 눈치채버렸다.


“소용없어.”

“소용없다니요?”

“네가 누구를 찾고 있는지, 또 그리고 왜 그 행방을 궁금해하는지 알고 있는데 그건 네가 책임질 일도 아니니까 부담감에 곤란한 일에 끼어들지 마. 다시 하던 이야기로 마저 돌아가는 게 더 낫겠군. 요즘 인간들은 한 이야기에 몰두하는 법이 없다니까,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하나의 목숨으로 여러 인생을 살 것처럼 굴지만 자신의 이야기조차 모르는 가련한 영혼들. 그래, 다시 돌아가도록 하지.”


이에 황호는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도진의 등을 안으로 떠밀었다. 시답잖은 세월의 냄새가 궁하게 풍겨 왔다. 도진은 마땅히 앉을 자리가 없는 터라 그저 문 근처에 서서 자리에 앉는 황호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하시던 말씀을······.”


도진이 청을 제대로 끝내기도 전에 황호는 의자를 도진 쪽으로 두어 그를 정면에서 응시할 수 있게끔 그 방향에 충실한 자세로 앉았다. 그리고 도진의 말을 잘라먹었다.


“정안수의 논문은 전부 사실이야.”

“예? 사실이라니, 그건 교수님께서 지어내신 것인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 뜻은······.”

“그렇지. 그 시집은 실은 백면이 쓴 게 아니야. 아니지. 백면이 쓴 것은 맞는데 백면만이 쓴 게 아니라고 해야겠군.”


도진이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이에 황호는 입이 바짝 마르는 통에 네 번이나 입을 닫았다가 열었다.


“그럼, 그럼 제가 지금 생각하는 게 맞습니까?”


시간이 꽤 흐른 후에 도진이 물었고, 황호는 구태여 움직일 필요도 없는 턱관절을 습관인 양 움직이며 고개까지 함께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그런 수고를 들였던 것이지.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 같지만, 그게 내 일이니까 어쩔 수 없었어. 제 몫에 충실한 것은 실은 행복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걸 모든 인간이 깨닫는 날이나 되어야 알아줄 고된 수고였지.”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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