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연재수 :
333 회
조회수 :
14,315
추천수 :
244
글자수 :
1,286,707

작성
21.02.06 23:59
조회
37
추천
2
글자
10쪽

247화

DUMMY

포부와는 다르게 비는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치고 말았다. 지난날의 다짐이 다소 부끄러워지는 경향이 있을 만큼 장마는 금방 물러간 것이다.

그러나 나뭇가지와 잎들은 전적으로 날씨의 뜻에만 따를 작정인지 날이 무더워진 이래로 저들이 살랑거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순종은 언제나 최후의 행복을 만끽하게 되니 왕벚나무가 만드는 그늘 안으로 들어가 두 명의 고행자들은 한숨을 쉬었다. 안수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기도 했다.


“괜찮겠나요, 도진 군?”


자신이 더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안수가 손수건을 접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보다 더 심한 일도 겪었는데요.”

“아니, 더 심한 일이라니.”


흉곽으로 호흡하며 긴 숨을 들이마신 안수가 조금 누그러진 듯한 낌새를 보인다.


“나나 씨는 처음 만났을 때 저를 때리려고 달려들었는걸요.”


도진이 장난스럽게 웃어넘겼다.


“그것 참 재밌는 만남이군요.”

“예, 그렇게 됐습니다.”


도진이 옆머리 정리를 마치자마자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고, 인간에게 있어 언제나 자유와 선택은 같은 것임을 강조하는 갈림길을 지나 인문대학으로 들어갔다.


“그러니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건물의 가장자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5층에 이르러서 그들이 들이닥친 곳은 권기현의 연구실이었다. 사전에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며 안수가 약속을 잡은 터라 기현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정 교수, 아무리 내가 그 부탁을 들어주고 또 아무리 정 교수가 부탁하는 건이라고 해도 그건 좀 곤란합니다.”


거북스레 대답하며 기현은 자신의 거절 의사를 에둘러 전했다. 하지만 이것은 방에 틀어박혀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나나조차도 예상 가능했던 일이기에 두 사람 역시 각오하고 있던 터라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에 목소리를 더 애달프게 들리도록 꾸몄다.


“그렇지만 학문에 학벌 같은 연고가 중요하겠습니까? 또한, 스승과 제자 사이에 같은 뜻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같은 이름이 있어서는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하려고 학문이 인간이 있는 한 계속해서 다른 이름으로 같은 이론을 전해온단 말입니까?”


안수는 이제껏 기현이 본 모습 중에서 가장 대담했다. 그만큼 뒤에서 만반의 준비를 위해 과감한 결심을 했다는 것을 알 리가 없는 기현은 안수의 말을 듣자마자 당혹하고 말았다.


“정 교수의 이야기가 백 번 옳습니다. 그런데 세간에서 누가 그 백 번을 다 기다린단 말입니까? 한 번 들어서 아니라고 판단이 들면 그대로 집어치우는 게 인간의 본모습이니······.”


딱히 가려운 곳은 없어 보임에도 기현은 팔로 자신의 가슴께를 감싸며 반대쪽의 팔뚝을 긁었다. 남아 있는 습기가 꿉꿉하게 그를 괴롭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역시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짐작할 만한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기현을 마주하고 앉은 안수의 뒤에서 도진은 정답이 뭔지 조금만 더 지나면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세간의 시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지난번 『경국』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고 난 뒤 논란이 일기는 했어도 논란 속에서 저절로 이론이 싹텄고, 또 그렇게 되면서 그 시집에 대한 해석이 가지각색으로 참으로 다양해지고 풍부해졌지요. 여성적 어조라는 데 관심을 보이는 분들도 참 많았다는 걸 모르시진 않을 겁니다.”

“다 쓸모없는 소리일 뿐, 근거도 없었지요.”

“최초로 인간의 자아를 찾아내려고 한 시집이라는 데에도 근거가 없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역사적으로 입증된 건데 아무리 정 교수라고 해도 그런 소리는 함부로 할 게 못됩니다.”

“아닙니다. 모두가 그렇다고 믿을 뿐이지, 후에 그보다 앞선 최초의 자아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때 그 지위를 넘겨주면 될 일입니다.”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는 상대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안수는 마른세수를 하면서도 포기의 기미나 절망의 기색은 단연코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도진은 자신이 언제든 묵묵히 고난을 받아들일 다짐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거든 이만 돌아갔으면 합니다. 정 교수, 내일 있을 학회 발표 때문에 나도 지금 근심과 걱정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서 한마디도 듣지 않기 위해 기현은 대화의 싹을 자르려고 했다. 기회는 곧 마지막일 것 같은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니 이를 틈타서 기현이 본론으로 돌아왔다.


“예, 물론 저 역시 곤란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가 학회장님의 밑에서 배웠으면 한다고 며칠이나 제게 간청을 하더군요. 도저히 모르는 체하며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청년입니다. 늘 책을 끼고 살지요.”

“정 교수, 학문은 책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알고 말고요. 하지만 대부분의 학문이 그렇듯이 마침내는 말과 글로 돌아가는 게 학문이라고 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됨됨이가 된 젊은이가 학회장님의 논문을 전부 읽고 여기까지 찾아와서 감히 이 연구실의 문을 두드렸겠습니까?”


자신의 논문을 전부 읽었다는 데에 솔깃해진 기현이 그제야 도진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존경에 가까운 관심을 내보이며 도진은 그를 피하지 않았다.


“농담 아닌지요?”


기현이 허탈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는 방금 들은 안수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잠깐 천장을 바라보았다.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전부 학문적 가치가 있으며 학회장님의 명예에 걸맞은 내용을 갖춘 것들일 텐데요. 저 역시 그리고 우리 대학에서 인문학을 하는 전공자들은 다 학회장님의 논문을 한 번 그 이상으로 자료로 참고했을 겁니다.”


잠시 기현의 턱 밑이 보이는 사이에 안수와 도진은 기현이 어떤 반응으로 나설 것인지 눈대중하며 그의 목젖이 그르렁거리듯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래, 이 청년은 원래 뭘 하던 친구입니까?”


기현이 얼굴을 들더니 도진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것저것 공부를 계속 해오고 있었습니다.”


도진이 맞잡은 두 손을 일부러 더 앞으로 내보이며 자신의 예의를 과시했다.


“이것저것이라······ 그렇다면 일은 하지 않았고?”

“예. 적성에 맞는 일을 찾고 싶어서 지금까지 미루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여쭤봐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올해 서른입니다.”


기현이 무언가가 탐탁스럽지 않은지 긍정인지 부정인지 구분할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배움에는 때가 없습니다.”


혹시라도 도진의 나이가 걸림돌이가 될까 싶어서 안수는 자신이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요즘 누굴 가르칠 만한 저력이 없습니다. 학회 일로도 대학 일로도 정신이 없고······ 여러모로 바쁩니다.”


말을 끝맺기까지 기현은 미묘한 표정 변화를 보였다.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서른인 만큼 그동안에 배워온 것이 있으니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바라는 것은 이번에 하고 계시는 대학원 강의를 청강하는 것입니다.”


도진이 뚜렷한 목소리로 적극적으로 나서는 반면에 기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여전히 소극적인 견해를 내비치며 고민하는 소리를 내었다.


“나야 상관없는 일입니다. 나야······ 배우려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더 좋은 것이고 한데, 함께 듣는 다른 학생들도 고려를 해야지요.”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가만히 듣기만 하겠습니다.”


도진이 확신에 가득차서 그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댔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라.”


도진이 말한 문구를 천천히 되새기는 동안에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기현이 뱀의 혀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걸 들어서 무엇에 쓰려고?”


의자를 책상 안으로 들이밀어 안수와 도진에게로 바짝 붙은 그는 지금의 순간이 갑자기 흥미로워졌는지 박수를 칠 때 나는 큰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깍지를 꼈다.


“책을 쓰려고 합니다.”

“책이라니! 어떤 책인지 물어도 되겠지요?”

“저에게서 허락을 구하실 건 없습니다. 다만 제가 쓰고 싶은 것은 아직 정해진 게 없습니다. 교수님께서 영감을 얻는다면 뭔가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꼭 교수님께 가르침을 구하러 뵙게 된 겁니다.”


콧등을 찌푸리며 기현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사냥감을 발견한 것처럼 번뜩이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사로잡았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요.”


승강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에 안수가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하기에는 어쩐지 가슴이 벅차서 각각 다른 곳을 쳐다봤다. 도진은 한쪽 면에 달린 코르크 보드를 유심히 살폈다. 찢기고 누렇게 변색된 종이 두 장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 생각에는 잘될 것 같습니다.”


언제든 책을 제멋대로 찢던 습관을 토대로 능숙하게 그 종이을 빼낸 도진이 말했다. 그는 종이를 구겨서 뒷주머니에 넣고는 1층에 도착했을 때 한 걸음 물러서 안수가 먼저 내리기까지 기다렸다. 승강기에서 완전히 내린 후에는 그 뒤를 무심코 응시하더니 문이 닫히기 전까지는 안수를 쫓아가지 않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달이 만든 세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47 246화 21.02.05 29 2 9쪽
246 245화 21.02.04 28 2 9쪽
245 244화 21.02.03 28 2 10쪽
244 243화 21.02.02 35 2 9쪽
243 242화 21.02.01 27 2 10쪽
242 241화 21.01.31 28 2 9쪽
241 240화 21.01.30 38 2 9쪽
240 239화 21.01.29 26 2 9쪽
239 238화 21.01.28 28 2 11쪽
238 237화 21.01.27 29 2 9쪽
237 236화 21.01.26 32 2 9쪽
236 235화 21.01.25 29 2 9쪽
235 234화 21.01.24 30 2 9쪽
234 233화 21.01.24 26 2 9쪽
233 232화 21.01.22 33 2 10쪽
232 231화 21.01.21 29 2 9쪽
231 230화 21.01.20 29 2 10쪽
230 229화 21.01.19 34 2 9쪽
229 228화 21.01.18 29 2 10쪽
228 227화 21.01.17 30 2 10쪽
227 226화 21.01.16 84 2 10쪽
226 225화 21.01.15 27 2 10쪽
225 224화 21.01.14 28 2 10쪽
224 223화 21.01.13 28 2 10쪽
223 222화 21.01.12 31 2 9쪽
222 221화 21.01.11 27 2 9쪽
221 220화 21.01.10 28 2 9쪽
220 219화 21.01.09 30 1 10쪽
219 218화 21.01.08 33 1 10쪽
218 217화 21.01.07 28 1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