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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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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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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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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43화

DUMMY

“최초의 꽃은 어떤 모양이었을 거 같아요?”


식물학자의 손치고는 심히 고운 데다가 살결이 보드랍다고 나나는 수중에 있는 그 커다란 씨앗 같은 손에 슬며시 감탄했다. 풀과 꽃이라. 행복은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하늘을 보면서 끊임없이 행복을 상징하는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인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최초의 꽃이요? 난데없이 풀에서 꽃이라니, 아무튼 최초의 꽃이라면 꽃처럼 생기지 않았을까요? 최초라고 해도 어쨌든 꽃이 갖추어야 할 요소는 다 갖추고 있었을 테니까요.”

“향기든, 색이든, 모양이든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나나 씨가 머릿속에 직접 그 꽃의 생김새를 그려보는 거예요. 정말로 그림을 그리듯이 말이에요.”

“모르겠어요. 흔히 자주 보던 꽃들밖에 떠오르지 않는데요.”

“그럼 최초의 꽃도 바로 그런 모양을 처음부터 가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 막 동면에서 깨어나서 모든 게 얼떨떨한 감각으로만 여겨지는 것처럼 나나의 표정이 둔해졌다. 자신이 동면에서 깨어난 일이 사실이 아님에 그것이 당연하듯이 분명히 꽃들에게도 계절이 있었을 테고, 하룻밤의 잠으로도 꼴이 몰골이 되었다면 꽃들도 분명히 그 계절 동안에 변화를 겪었을 테니 말이다. 아마도, 다윈은 변화가 아니라 진화라고 이야기하겠지만.


“아무래도 아닐 것 같아요. 잘은 몰라도 품종 같은 것도 계속 만들어지고 그러니······ 이전의 꽃이라면 뭔가 꽃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늠름하다고 해야 하나. 원시적인 걸 떠올리면 왠지 그럴 것 같아요. 아니면 그 반대려나. 아무튼 둘 중에 한쪽일 것 같아요.”

“아니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정답을 뒤에 덧붙였네요.”


주화가 아깝다는 듯이 눈가에 개구진 주름을 그렸다.


“더 작았어요. 더 연약했다고 해야겠죠. 믿겨져요? 사람들은 지금도 꽃이 너무 연약하다고 하는데 실은 사람들이 모르는 시절의 꽃은 지금보다도 더 가녀린 존재였던 거예요.”

“신기하네요.”


별다른 답변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듣기에는 흥미로운 소재였지만, 제 그림의 주제가 될 만큼 크나큰 발상을 안겨주지는 않아서였다. 사람은 한 가지의 고민을 할 때 열 가지의 사물을 가장 이기적으로 대한다는 것을 나나는 모르고 있었다.


“이건 대나무예요.”


주화가 침대 밑 발치에서 엿듣는 것을 좋아하는 화분을 가리켰다. 이름만을 말한다면 나나의 관심이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그녀는 마른 입을 한 번 더 열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대나무가 꽃을 피운다는 걸 알고 있어요?”

“알고는 있어요. 직접 본 적은 없지만요.”


대나무 묘목이 이렇게 여리고 가냘픈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나나가 이제껏 때때로 보았던 대나무는 모두 다 자란 것들로, 선물 상자를 포장할 때 쓰이는 녹색 가죽끈이 직립의 기능를 얻어 기념일마다 너무 쉽게 버려진 것에 대해 뭐라고 떠드는 것 같이 옹기종기 모여 이상한 위엄을 뿜어내던 인상이 그녀가 아는 대나무의 전부였다.


“맞아요. 한평생 대나무 꽃을 보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건 사실이에요. 그렇다면 대나무가 나무가 아니라는 것도 아나요?”

“나무가 아니라니, 이름 그대로 나무잖아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나무의 모습이 아니기는 해도 나무라고 하니까 나무인 줄 알았는데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대나무는 단지 풀에 지나지 않아요. 봐요, 나무보다는 벼를 더 닮았잖아요. 나나 씨가 이걸 보고 처음에 풀이라고 생각한 게 맞다니까요. 하지만 사람들 중 그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많지 않을 거예요. 진짜로 말이에요.”


알 것도 같았지만, 풀 이야기가 어떤 핵심을 짚고 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사람은 살아 있을 때 모두 풀이라는 거예요.”

“그건 아까도 말씀하신 거잖아요.”

“잘 들어봐요. 대나무는 풀인데 모두들 당연히 나무라고 여기죠? 하지만 내가 방금 나나 씨에게 말하기를, 그건 실은 나무가 아닌 풀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꽃은······.”

“최초의 꽃이 현재의 꽃보다 더 연약한 존재였다고 말이에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거예요.”


지식은 모두 습득 완료되었으나 그 지혜는 아직 닿을 도리를 몰라 헤매는 상태다. 주화의 손길이 있다가 떠난 그 목 언저리에 손바닥을 갖다 대며 나나가 방황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주화여야만 했다.


“나나 씨, 내 말은 처음의 생각을 믿으란 말이에요.”

“처음의 생각이라고요? 폴 세잔의 그림을 가져올 생각이었는데요! 하지만 못 그럴 것 같아서 지금 속이 말이 아니에요. 몇몇 그림이 눈에 훤하게 그려진다고 해도 손으로도 그만큼 그려지지도 않을 테고.”

“나나 씨가 직접 그리면 되죠.”

“그게 바로 다음에 생긴 대안이었는데 말이죠.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처음에는 미약해 보여도 언젠가 그럴듯한 꽃이 될 거예요. 그 약함도 자체의 아름다움만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고요. 그러니 의심하지 말고 우선 붓부터 잡아봐요.”


결국에는 영화의 한 장면이 멈춘 듯이 짜증스러운 긴장감과 참을 수 없는 책임감이 몰려들었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백면의 전시회가 될 텐데. 그림을 그려도 공로는 모두 그에게 돌아가는 게 되지 않던가. 혹은 악평이 쏟아진다고 해도 그가 뒤집어쓴다면 다행이겠지만 왠지 그것마저도 억울하게 느껴졌다.


“왜 다들 제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는 거죠?”


나나가 제게 들이닥친 갑작스러운 일들을 이해할 수 없음에 속상한 감정이 그렁그렁해진 눈빛으로 주화를 건너다보았다. 사라졌던 원근감이 돌아오자, 주화가 마치 저 머나먼 반대편에 앉아서 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나 씨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게 그거 아닌가요?”

“제가요?”

“그렇지 않고서는 꿈에서까지 그런 고민을 할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나나 씨가 그림을 그렸으면 하는 거예요.”

“그 백면 때문이 아니라요?”


왜 하필 그는 다시 태어나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간단히 그리다니. 그 영혼의 파편을 이렇게 월계 밖으로 떨어져, 불안에 떨며 그림을 두려워하는데. 나나는 자신의 존재가 있을 자리가 치워진 듯한 무력감을 느끼고 말았다.


“백면 때문이 전혀 아니에요. 만약에 정말로 그랬다면 말이죠······ 음, 나나 씨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게 아니라 당장 백면을 찾으러 갔을 거예요. 그리고 누가 됐을지는 몰라도 우리 중에 한 명이 반드시 백면을 데리고 오겠죠. 백면이 그림을 그리든 시를 쓰든, 솔직히 말해서 우리한테 그게 제일 급한 건 아니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나나가 힘없이 고개를 움직였다. 그 정도는 단번에 이해와 공감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에게 제일 먼저 필요한 건 백면이 아니라, 백면의 눈물일 테니까.


“그러니까 백면은 신경쓰지 말아요.”


주화의 위로에 나나가 용기를 얻어 힘겹게 질문 하나를 꺼낸다. 지난밤에 그림과 함께 자신을 은밀히 괴롭히던 것이기도 하다.


“만약 그 사람이 백면이면 저는 앞으로 뭐가 되나요?”


주화가 멈칫하며 나나를 주시했다. 지금까지 있는 그대로 마음을 표현하던 그녀가 주춤거리며 표정을 감추었는데, 나나가 한 질문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해버린 탓이다.


“저는 죽어버리게 되나요? 돌아갈 수는 있겠죠? 그런데 돌아가서도 죽어버리면요? 어떻게 해요?”


기억 속에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의 씁쓸한 감정이 서글픈 감촉이 되어 나나를 단번에 울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차라리 백면이 죽었다고 했을 때가 더 나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의 자리를 잃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 그가 살아 있다면 나는······ 거짓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인간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삶처럼 여겨졌다.


“나나 씨는 그대로 나나 씨일 거예요.”


주화가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되새기지 않더라도 본연의 색으로 돌아온 그녀의 두 볼이 그 변화를 짐작케 했다. 그녀 역시 한 떨기의 풀이기는 한가 보다.

뒤이어 아래에 손님이 온 것 같으니 얼른 내려가보자는 주화의 멀리서 들려왔다. 폴 세잔은 왜 원근감을 포기했을까. 나나는 그것이 문득 서러웠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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