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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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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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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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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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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8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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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18화

DUMMY

“혼자 가려고?”


나나가 물었다. 말하고 나니 아차 싶은 순간에, 자신이 책임을 지게 된 일에 대한 염려로 인해 도진에게 그 사정이 뭔지를 먼저 묻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가 떠올려냈다. 그리고 얼굴에는 즉각적인 생각의 변화가 순수히 반영되고 말았다.


“나나 씨는 남아야 할 이유가 있나 보네요?”


고의로 상대를 추궁하는 말투가 영 반드러운 데다가 잔밉기까지 해도 의도된 폄훼는 없는 탓에 도진의 활짝 핀 미소에 대고 나나는 실수로라도 투덜거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

대신에 그녀는 자신이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대답을 알고 있을 도진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내놓지 않았는데, 이를 호방하게 넘기려던 도진이 불현듯이 자신을 붙잡는 우감(偶感)에 얼굴에 엄정한 빛을 드러냈다.


“아,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부탁? 나한테? 네가 나한테 부탁할 게 있나?”


아무리 깊게 생각해 봐도 딱히 없다. 나나가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그 오뚝이 같은 동작이 꽤 오래 반복되는 동안에 도진은 금세 제 입술을 뜯적거리다가 우려스러운 눈빛을 나나에게로 추파처럼 던졌다.


“그분 말이에요. 천우라는 그 화가 선생님, 그분에 대해서 새로 알게 되는 게 있다면 알려줄 수 있을까요? 내가 다시 여기로 돌아왔을 때 말이에요.”

“왜? 이 일이랑 딱히 관련도 없는 것 같은데. 혹시 관심이 있어서 그래?”

“그렇다고 해야겠죠. 그러니까 부탁 좀 할게요.”

“어차피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것 같아. 아까 다 들었잖아? ‘사계절’을 그린 이유가 있을 거다, 그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잘 떠올려야 한다······. 내가 그린 것도 아닌데 뭘 어쩌라는 건지. 그럴 바에 경찰에 신고해서 찾는 게 더 빠르지 않아? 어이없다니까. 게다가 실은 말이지.”


나나가 두 번째로 멈칫거린 순간이었다. 금번에 그녀가 본능적으로 떠올린 건 폴 세잔의 작품 한 점이었다. 바로 그 「사계절」 말이다. 인영과 이야기하면서 그 화가, 아니, 이제는 천우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 그의 이름을 어쨌든 알게 되었으니까. 그 화가가 그린 ‘사계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소홀히 여겼던 그 원작품이 걷잡을 수 없이 시야로 달려들었다.

이 때문에 허공에 그림이 떠다니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선을 먼 데다가 둔 나나를 의아하게 여긴 도진이 나나를 집중시키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나나 씨?”


대답이 없다.


“나나 씨? 괜찮아요?”


어쩔 수 없이 도진이 활짝 편 손바닥을 앞에 대고 허우적거리니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듯이 나나가 어깨를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한 건 아니죠? 나나 씨한테까지 그런 부탁을 하고 가면 심연도에 가서는 아무 말도 못 하게 될 것 같거든요.”

“아, 미안. 그런 거 아니야. 그래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그 그림에 대해서 말이에요. 그리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나나 씨를 들볶는 거에 관한 불평을 하던 중이었죠. 또, 또 뭔가 말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게 뭐예요?”


나나가 이번에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래도 여름 중에 가장 서늘한 시기가 곧 시작되려나 보다. 그러니 너무 섣부르게 판단하지는 말자. 이렇게 지내다가 그 사고뭉치 같은 성인이라는 자가 돌아와 또다시 폴 세잔이 누구냐고 귀찮게 묻는 한이 있더라도 먼저 폴 세잔을 입에 올리지는 말자고 그녀가 결심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누구든 자신의 졸작을 들키고는 싶지 않을 테니까.


***


맞닿은 손이 서로의 체온을 공유한 지도 한참이나 지났다. 그래도 여전히 두 손이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존재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줄 만큼 한 손은 검버섯과 주름이 잡혀 있었고, 이와 대조적으로 남은 다른 한 손은 손마디마다 있는 잔결을 제외하면 희고 곱다.


“어떤가요?”


여명의 어머니, 금새문이 결국 기다리다 못하고 물었다. 옆에 앉은 여명이 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이다.


“쉿.”


초영은 노파와 포개지 않은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경고를 알렸다. 아직 눈을 감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비틀린 눈썹의 움직임에 그녀의 신경이 곤두섰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네 사람은 지금까지 식탁에 둘러앉아 한 줄기 빛이 될 기억 한 편을 고대하며 조금도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몇 시간이나 인내하고 있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역시 어릴 때는 꽤 귀여운 미인이셨네요.”


칭찬하는 것과 다르게 초영이 눈을 뜨며 한숨을 쉬었다.


“쑥스럽기는 해도 그렇긴 했지. 그렇지만··· 아무래도 역시.”

“맞아요. 별다른 이득은 없었어요. 그저 사람들이 흔히들 알고 있는 그 전설 같은 이야기가 다른 입을 통해서 반복되기만 하는 기억뿐이네요.”

“미안하게 됐구려.”


초영이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를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계속 날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요.”


동시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볼일을 마친 사람처럼 굴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만.”

“벌써 가시려고요?”


그녀를 특별히 배려해서 꽃집의 문까지 닫고 나온 여명이 허망스러운 낯빛을 감추지 못하고 서운한 어조로 물었다. 아무렇지 않게 문 쪽으로 걸어가려는 초영은 자신을 쫓는 세 사람의 시선을 아주 간단히 감당하며 여전히 머리를 매만진다.


“계속 있어봤자 당장에 새로 기억나는 것이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어요. 그래도 붙잡고 있는 건 순 고문이에요. 나는 그런 취향은 전혀 아니거든.”

“바래다 드릴까요?”


여명이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지만 사양하도록 하죠. 아마 당분간은 여길 떠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째서요?”


주어진 숙제를 하듯이 매일 같이 그녀와 손을 잡던 것에 나름의 재미와 보람을 느끼기도 했던 노파가 의자 등받이에 손을 걸치며 초영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꼴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나름의 힘을 쓰기 위해서 내가 본래 있던 곳으로 가야 하지 않겠어요?”


드디어 머리 매무새를 마친 초영이 노파를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본디 사람이라면 때가 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야 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지.”

“어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게 가까이 다가온 여명에게 살랑거리는 손짓으로 인사를 하고 돌아선 초영이 안쪽에까지 들리도록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난 사람들이 기다리는 그 때라는 걸 만들어주는 사람이거든요.”


호언장담하고 나온 것치고는 귀향길이 한없이 초라하고 성가시기만 한 것 같다. 밖으로 나온 초영은 이 여름날에 피부가 타지는 않을지 걱정되는 끝에 우산 모양으로 두 손을 이마 위로 올리고는 여명의 가족이 사는 아파트 건물을 완전히 빠져 나왔다.


“우산 만들어줄까?”


어딘가에서 기적 같은 목소리가 불청객처럼 다가왔다. 필시 태강임이 분명하다. 가는 길이 적적하지는 않으리라, 나름의 위안을 하며 그를 반길 준비를 했다.


“어쩐 일이야?”


어차피 근처 어딘가에 있는 게 확실하니 굳이 둘러보지 않고서 초영은 대충 앞에 있는 허공에 대고 물었다.


“당연히 보고 싶어서 왔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 얘가.”

“······그런가? 우산 만들어줄까?”


껄끄러워진 분위기를 되살리기 위해 같은 질문을 한 태강이 드디어 초영의 앞을 가로막으며 모습을 보였다.


“우산이 아니라, 양산이겠지.”


제 이마 부근에 있는 손을 그대로 쭉 뻗어 태강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절대로 밀려날 만한 세기가 아니었음에도 장난을 즐기는 태강은 일부러 뒤로 자빠지는 척을 하며 개구쟁이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뭐든 말이야!”

“쓸데없는 일 하지 마.”

“네 소중한 미모를 지키는 게 왜 쓸데없는 일이야?”


태강이 지금 자신에게 아부하는 건지 아니면 별안간 철이라도 든 것인지 분간할 수 없어진 초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태강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뭐니? 갑자기 왜 이래?”

“왜? 맞는 말이잖아! 초영 너도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면서!”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빨리 말해.”

“그런 거 없어!”


초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아까보다 더 약해진 힘으로 태강의 어깨를 건드렸다. 이번에는 과장스러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게 그를 더 수상히 보이게 만들었다.


“네가 그럴 리가 없어.”


이번에는 손가락 하나만 내밀고 삿대질을 하듯이 그에게 다가섰다. 태강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그 신중한 손을 낚아채며 말한다.


“아냐, 정말이야.”


어린애가 결코 죄가 될 수 없다고 믿는 자신의 실수를 고할 때의 표정이 아니다. 그가 지은 것 중 가장 기이하면서도 묘하게 아이답지 않은 구석이 느껴지는 표정이기도 하다. 태강이 쏘아대는 괴광(怪光)을 어렵사리 감내하며 초영이 입을 다물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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