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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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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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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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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20화

DUMMY

특히 내 그림을 원한다면 나를 찾지 마.


쪽지에 적힌 문장을 곱씹을수록 나나는 눈을 치켜뜰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눈을 정상으로 뜨고서는 대근할 수 없는 통보였다. 이제야 이 문장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각자의 해석 방식이 달랐다는 걸 알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다른 방식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언어의 한계라면 한계일 것이다.


“그림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나를 찾지 말라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아요?”


간신히 인영과 눈을 맞춘 나나가 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평소 천 선생님의 화법을 생각한다면 말이죠.”

“별로 특이할 게 없는 화법이지 않아요?”


아무리 회상해 보아도 사라진 화가가 곧 생각과 사상 자체가 엉뚱할 사람일지언정 그의 설법에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나나의 의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옆에서 기현이 비소 같은 것을 은근히 흘렸다. 코를 훌쩍거리는 것 같기도 하여서 이에 대해서는 바로 의의를 발언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하죠. 남들이 오해하도록 말이에요. 하지만 중요한 건 부정적인 말은 언제라도 하지 않는 분이라는 거예요. 설령 표면적으로 들리기에는 좋지 않은 말씀이라는 게 틀림없다고 해도 말이에요.”


화가가 난관 앞에서 쉽게 물러서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저번 그림이 없는 그림 일로 어느 정도 암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과 글이 다르다고 자신이 조금 전에 말한 것을 떠올린다면, 인영은 자신의 주장에도 허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나는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도진에게서도 받은 부탁이 있으니, 이대로 너무 제 의견만을 굳히다가는 곧 선입견에 사로잡힐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신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준비해야만 했다. 일종의 대비라고 해두는 게 생각하기에 편하겠다.


“뭘 하기는요? 당연히 백나나 씨가 이번 전시회 준비를 도와야죠.”


제 결심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니 인영의 염치없는 지시에 굳이 놀랄 것도 없다. 하지만 나나를 놀라게 한 건 다음에 이어지는 기현의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만 일어나 가도록 하지요.”

“어머, 벌써 가시게요?”


덩달아 몸을 반쯤 일으킨 인영이 상냥하면서도 엉성한 자세로 기현을 쫓았다.


“원하신다면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들으셔도 돼요. 어차피 아시게 될 텐데요.”

“그러니 가는 겁니다. 원래 미리 알아채야 하는 존재가 예술가라면, 모르고 있다가 안다고 말하는 존재가 비평가거든. 내가 우 선생만큼 미술에 조예가 깊지는 않아도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알 거요.”

“그렇기는 하죠, 그렇다면 바래다 드릴게요.”

“숙녀분을 홀로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괜찮으니 나는 이만 가보겠어요. 오늘 산 그림은 약속된 시간에 갖다 주어야 한다는 것이나 잊지 않아 주면 고맙겠군요.”

“그럼요, 물론이죠.”


그래도 인영은 앞까지 달려가 기현을 배웅했다. 그가 떠나고 돌아서며 문을 닫을 때 그녀는 안도의 한숨 같은 것을 쉬며 한껏 후련해 진듯한 얼굴로 다시 나나 앞에 나타났다.


“기획단장이시라면서 그림 파는 일도 맡으시는 거예요?”


손잡이 안에 손가락을 걸어서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는 데 열중하고 있던 나나가 말했다.


“맞아요. 매우 중요한 업무기 때문에 오히려 이 일이 주는 중압감이 영광이라는 걸 알아야 할 정도예요.”

“자긍심이 대단하시네요.”

“그림을 사랑하니까요.”


비꼬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유가 너무 막연한 데다가 금방 꺼지지 않고서 줄곧 살아나는 열정을 마주할 때면 의지에 상관없이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러는 편이 더욱 그 열정을 더 존중하는 방도일지도 모른다고 나나는 생각했다.

아무런 반응도 없이 나나가 찻잔에만 몰두하자 인영이 머리 한쪽을 귀 뒤로 넘기고는 아까의 대화를 충분히 암시하는 화제를 불러들였다.


“자, 그렇다면 이제 백나나 씨에게 선생님이 하셨던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더 잘 알겠죠?”

“어떤 의미요?”

“이미 ‘사계절’이 담긴 그림을 보여주셨다는 건 이번 전시의 주제가 「사계절」임이 분명하다는 것 말이에요. 그리고 절대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 그림을 먼저 보여주시진 않았을 거예요. 그걸 명심해야 해요. 그러니까 백나나 씨가 본 그 ‘사계절’ 그림은 곧 작품의 제목이 「사계절」이라는 것이고, 그 「사계절」은 이번에 발표될 선생님의 모든 작품을 대변하게 될 거라는 거죠.”

“만약에 아니면 어떻게 해요?”

“그럴 리 없어요, 난 천 선생님을 아주 오랫동안 지켜봐 온 사람이니까. 물론, 이것 외에 더 살을 붙여야 하긴 할 거예요. 천만다행인 점은 선생님이 이미 인정받은 분이기에 선생님의 그림을 원하는 이들이 그리 많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겠죠. 그래도 살을 붙일 생각이에요. 아, 그래요. 백나나 씨, 괜찮다면 부탁이 하나 있어요. 물론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제공될 걸 먼저 약속하도록 하죠.”


이틀 연속으로 쏟아지는 부탁 공세에 나나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입을 다물기에는 버거운 터라 놀란 입을 벌리니 이에 맞추어 인영이 제 부탁을 먼저 공개해버린다.


“그때 봤던 선생님의 그림을 최대한 똑같이 재현해서 그려줄 수 있겠어요? 어려운 부탁이라는 걸 알아서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겠지만, 백나나 씨가 그림을, 그것도 천 선생님 밑에서 그리기 때문에 하는 부탁이에요.”


나나는 그동안 자신이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려냈다. 이들과 자신이 정설(正說)이라고 굳게 믿는 하늘의 풍경이라는 건 아주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


우산을 똑바로 들지 않은 데다가 자신을 배려하며 걷지 않는 태강에게 기분이 퍽 상한 초영이 그의 등을 세게 때렸다. 다행히 우산이 앞으로 엎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이 안쪽으로 튀지 않는 것도 아니었기에 별 의미는 없는 다행이었다.


“똑바로 좀 들어.”

“그럼 초영 네가 들면 되잖아!”

“이제야 너답네.”

“응?”

“철없는 애처럼 구는 게 이제야 너답다는 말이야. 물론 칭찬도 아니니까 너무 기뻐하지는 않길 바랄게.”


태강은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와 뻣뻣하게 정면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가 이 순간을 매우 불편해한다는 것을 느끼고는 초영 역시 본래의 톡 쏘는 자신의 말투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참 묘하게도 나를 찾아왔네. 그렇지 않아도 심연도로 돌아가려고 했던 참이었는데 어떻게 알고 날 찾아온 거래니?”


이에 아주 기분 좋게 응하는 태강이다.


“음, 아무래도 내가 초영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게 된 것 같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하지 말아줄래?”

“왜? 그럴 수도 있잖아? 그리고 어차피 이렇게 같이 가주고 있으면서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 나 되게 마음 여리단 말이야.”


태강이 히죽거리며 어깨를 으쓱대는 통에 하마터면 우산이 기울어져 초영이 쏟아지는 비를 된통 맞을 뻔했다. 두 손으로 우산을 모아 잡으며 겁먹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태강에게 이번에는 쏘아대는 눈빛을 날렸다.

그렇게 태강은 한동안 초영의 눈치를 보다가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을 즈음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초영.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정말 한 가지라고 자부할 수 있니?”

“음······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는데, 어쨌든 묻고 싶은 게 하나 있긴 하거든. 계속 하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딱 한 가지가 맞긴 맞아.”

“말도 참 어렵게 하네. 그래, 뭔데?”


두 사람은 자연스레 걸음을 멈추었다. 발걸음에 묻혔던 빗소리가 비로소 얻은 기회에 이들에게 더욱 웅장하게 다가섰다.

태강이 고민에 빠진 얼굴을 하더니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를 꾸짖을 거리를 찾으려고 초영이 그의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우산마저 똑바로 단단히 쥐고 있는 탓에 괜히 트집을 잡을만한 것도 없었다.


“뭔데 그러니?”


초영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신호탄이라도 되었던 양 태강이 이제야 초점이 또렷해진 눈으로 그녀를 응시한다.


“왜 그동안 제대로 능력을 쓰지도 않고 있었어?”


침묵에도 차례가 있는 모양인지 초영이 입을 봉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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