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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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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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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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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7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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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화

DUMMY

귀천에 도착한 후에는 기적처럼 비가 개었다. 최적의 날씨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물우덩이가 우묵하게 고인 곳이 광장 거리에 구멍처럼 뚫렸지만 알아서 피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설령 부적절한 걸음으로 인해 거리 한복판에서 구렁에 발목을 통째로 먹혀버린다고 해도 재차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는 일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그건 거뜬히 감당 가능한 불행일 테다.

빵집 차양 밑으로 들어가 훨씬 써늘해진 풍경을 익히려고 나나는 눈을 바삐 굴렀다. 아무것도 흔들지 못하고 지나가는 나약한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가 올랑거린다.


‘귀천으로 간다고 했지. 일단 나한테서 여자에 대해 더 캐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야 해요, 아가씨. 이 친구가 다 미루고서 제 발로 보러 나선 그 여자가 누군지 나야말로 알고 싶어서 가장 목이 타는 사람이거든. 저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건 참 서글픈 거야. 간절하게 목이 마르다고 해도 목구멍까지 하늘에 맡길 수는 없지. 안 그래? 그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니까, 더군다나 이건 나아가서는 인권에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지. 일종의 생리적인 거니까. 혹은 종류가 없을 수도 있고. 종류가 될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지. 만약 사랑이 생리적인 문제라면 저 친구도 아마 그래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군······ 자존심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귀천에 가면 구경할 만한 곳이 정말 많을 겁니다, 거길 다 돌아보고 와도 좋을 텐데 몇 번을 가보기는 했다지만, 아직 나도 거길 다 둘러보지 못했어. 심신을 모두 돌보기에 안성맞춤일 정도로 정말 멋진 곳인데! 다 돌아보고 올 수 있다면 그러도록 해요, 만약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다면.’

‘그럴게요. 그런데 아직 어디로 갔는지 말씀해 주시진 않았는데요.’

‘참, 참······ 그랬지. 그러니까 천우 그 친구가 어디로 갔는지······ 정확한 행선지를 밝힌 건 아닌데 그래도 제대로 된 참고는 될 겁니다. 귀천은 꽤 넓은 곳인데, 그 누구도 도시라고는 부르지 않는 곳이지. 그렇다면 시골이냐, 그것도 아니지. 그만큼 번영된 장소도 없으니까.’

‘사설이 너무 길어요. 좋은 말씀은 감사하지만 어디인지 좀 먼저 말씀해 주세요. 지금 하시는 이야기는 그 뒤에 들을게요.’

‘정 그렇다면, 우리 서점에서는 지도 같은 걸 갖고 있지 않으니까 말로 설명하도록 합시다. 그게 대신 나침반 역할을 해줄 테니까. 오안 광장이 굉장히 유명해요. 거기에는 특산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자랑할 수 있는 먹거리가 많기도 하지. 이 친구는······ 그런 데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하필 거기로 간 게 의문이란 말이야. 그 왜, 냉장고에 오렌지 주스와 비스킷만 두고 목숨을 연명했던 피아노 연주자를 알고 있는가 모르겠네. 그 사람과 다를 바가 전혀 없는 친구였지. 그래! 건반을 마음대로 누를 수 없는 것과 마음대로 누를 수 있는 것의 차이만이 두 사람을 구별해줄 수 있는 유일한 특징일지도 모르겠네.’

‘오안 광장, 그다음에는요?’

‘오안 광장, 오안 광장! 거기가 왜 오안 광장인 줄 압니까? 바로 다섯 개의 눈이라서 오안(五眼)이라서 그렇지. 실제로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있을 리 없겠지만, 이게 관광 요소로 잘 먹히는 모양이에요. 하여튼 사람들은 말 같지도 않은 걸 부정하면서 정작 자신들이 말 같지도 않은 데에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는 걸 도무지 모른다니까······. 그 친구는 오안 광장에 있는 분수대 앞에서 여자를 만날 예정이라고 했어요. 모든 광장에는 분수대가 있고, 그 분수대는 모두 원형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가 앞이란 말인지. 저런, 내게 이제 더는 말할 것이 없네. 하나도 남지 않았어.’

‘······오안 광장 분수대 앞이란 말이죠? 감사해요.’

‘그래요, 다행인 점이 하나 있다면 이게 비밀인지 비밀이 아닌지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그 친구한테 있다는 거야. 누설인지 폭로인지는 그 친구한테 달렸다는 것이지. 이런, 이야기가 제 주인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네.’


기억이 영혼을 남겨두고 멋대로 달아나려고 한다. 과연 바람이란 건 무엇이라도 하나 흔들어놓고 가야 하는 법이다. 그것이 바람의 속성이다. 나나가 차양 밖으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오가는 사람들을 살피기 위해선데, 장마철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한적하기만 하다.


“들어오실 건가요?”


뒤쪽에서 소리가 났다. 각종 나뭇잎의 무늬가 연두색으로 그려진 앞치마를 입은 젊은 여자가 가게 문을 열고 그 안에서 나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쪽에서도 말을 걸기 위해서 한참이나 고민한 듯한 눈치다.


“아, 그게······.”


아직 배가 고프지도 않았던 나나는 강매를 당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퍽 곤란한 표정을 지었는데, 이 난색의 의미를 간파한 여자가 배시시 웃는다.


“괜찮아요, 굳이 저희 빵 안 사셔도 돼요. 누구 기다리는 분이 있으신 거죠? 안에 들어와서 기다리셔도 돼요. 날씨가 그렇게 좋은 날은 아니잖아요.”


평소에 이곳은 도대체 어떤 날씨를 갖고 있었길래 나나 자신은 나름대로 만족할 수 있었던 날씨를 두고 좋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의문은 호의를 거절할 수 없는 법이기에 나나는 들어오라는 여자의 손짓에 이끌려 걸음마를 배우듯이 매우 더듬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할게요.”

“천만에요, 모든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들어왔다 나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인데요. 얼마든지 편하게 있다가 가셔도 돼요. 차를 좀 드릴까요?”


공교롭게도 가게 안에 손님은 나나 말고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히 휴양지라고 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낮임에도 심각하게 한산한 분위기다. 빗물이 만들어낸 기묘하고 쓸쓸한 냄새가 더해져서 휴양지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아, 아니에요. 뭘 딱히 안 주셔도 돼요.”


작은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온 자신의 여행자답지 않은 행색이 과연 이토록 자연스럽게 섞여들 수 있다니. 나나가 표정 변화를 감추지 못하며 실내를 계속 둘러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가실 때 따로 청구하진 않을게요. 그냥 드리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여자의 과도한 친절도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것 중에 하나라고 묻는다면, 그렇다. 간판을 걸고 장사를 하는 사람이 물건을 내놓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니, 본디 휴양지라고 하면 휴식에 대한 사용료를 임금보다도 더 혹독하게 치러야 하는 곳이 아니던가. 알 수 없는 곳이다.


“정말 안 주셔도 되는데.”


이미 늦어서 소용없는 대답이었다. 여자는 차를 준비하기 위해서 안쪽으로 들어갔고,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는 것으로 짐작했을 때 그녀는 나나의 말을 아예 듣지 못했던 것이다.


“따뜻한 거, 괜찮으시죠?”

“······네, 감사해요.”


금색의 꽃잎 테두리가 세 줄 그어진 찻잔 안쪽으로는 연붉은 차가 원을 그리며 둥둥 떠 있다. 물이 떠 있을 수가 있나······. 하지만 가라앉은 것도 아닐 것이다. 바람처럼 물도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되는 물질인 것 같다. 특히, 그 안을 바라다보며 사색에 몰두하고 있는 제 얼굴을 금방 비추고 마는 물이라면 더더욱.

나나는 차의 이름도 묻지 않고 먼저 한 모금 들이켰다. 입안에 화기가 감돌았는데, 그방 미지근해지고 말았다. 그게 아쉬워서 한 모금을 더 마셨는데, 이때까지 그녀의 앞을 떠나고 있지 않던 여자가 마침 기대하는 눈빛을 던지며 나나에게 말을 건다.


“입맛에 맞으세요?”

“맛있네요, 그런데 이렇게 공짜로 차를 주셔도 괜찮나요? 제 의지로 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저도 손님이니까, 돈을 지불해야 한다면 지불할게요.”


여자가 나나의 결심을 극구 사양한다는 의사를 나타내기 위해 두 손을 다 내밀어 빠르게 휘젓는다.


“어후, 그러실 필요 없어요. 비가 오면 가끔 종종 이렇게 되거든요.”

“비가 오면 이렇게 된다고요?”


은밀하게 시작되어버린 이야기의 첫 문장에 여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나나의 앞쪽으로 가 의자를 끌더니 그대로 거기에 앉아버렸다.


“여긴 비가 잘 내리지 않거든요. 사막도 아닌데 그래요. 무슨 이유가 있다고는 하는데······ 빵만 만들 수만 있다면 그런 이유가 저한테 뭐가 중요하겠어요? 안 그런가요?”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상관없는 이야기니까요.”

“맞아요, 제 말이 바로 그거예요.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면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날씨라서 기분이 좋지 않아져요. 그렇게 되면 종일 맛없는 빵만 만들게 되는 거예요. 정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니까요.”


그럴 것까지야. 이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며 나나는 여자의 이야기를 제 목구멍 아래로 차 한 모금과 함께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렸다.


“그래서 좋은 수를 생각해낸 거예요.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풀어서 스스로 기분이 좋아지게 하자고. 그러면 기분이 좀 낫더라고요. 그래도 어제랑 오늘은 조금 견디기 힘들긴 했어요. 이틀 연속으로 비라니······ 그래도 견디기 힘들다는 건 결국에 제가 그걸 견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 노력 덕분인지 어제랑 오늘은 선의를 베풀 수 있게 되었네요.”

“하하······ 그렇네요. 제가 운이 좋았던 것 같네요. 감사해요.”


결국에 여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자신을 이용한 셈이다. 뭐, 실이 될 것은 없으니 군말을 더하지 말고 넘기자고 나나가 생각한 찰나에 여자가 다른 말을 꺼내놓는다.


“별말씀을요! 참, 어제는 어떤 화가 분이 그림 하나를 들고 와서 아까 저 자리, 손님이 계셨던 그 자리에서 똑같이 서 계셨었어요. 어떤 손님을 만난다고. 그래서 제가 안으로 데리고 왔죠. 참, 그러고 보니 여자분이시네요! 혹시 그분이랑 만나기로 하신 거 아니에요?”


나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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