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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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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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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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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화

DUMMY

나나는 자신이 말했던 대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것도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장소인 이 아지트로 말이다. 돌아오는 골목이 그녀의 화를 돋우었다. 이어서 태강이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가르치려는 말투로 일러둔 말이 빗물에 추적거리며 귓가에 들러붙는다. 바짝 붙어서 하나가 되어버린 두 장의 책장처럼 떼기 위해서는 비가 멎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 것 같은 우울감과 조우하게 된 나나는 인상을 쓰며 도진이 들고 있는 우산 안에서 이탈하였고, 과감하게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세 사람의 역할 분담을 분명하게 해두기 위해서는 아직 더 대화가 필요하다고 두 사람은 판단했다. 뒤따라 들어오는 안수와 도진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헛기침하며 방으로 들어가 버리려는 나나를 눈치껏 불러세우며 무리로 끌어들여 세 사람을 완성시켰다.


“날씨도 좋지 않은데 저희, 차 한잔하는 게 어떨까요?”


도진의 제안이었다.


“좋지요.”


안수가 흔쾌히 승낙함으로써 세 사람은 거실 탁자가 아닌 식탁을 둘러앉게 되었는데 만병의 근원 같던 한 사람만 사라졌을 뿐이지, 이전의 상황이 그대로 연출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나 씨는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태강 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도진이 만에 하나 찔리더라도 아프지 않을 만큼 말속의 가시를 다듬어 상냥하게 이야기했으나 그가 원하던 효과는 볼 수 없었다. 나나는 묵묵부답이었다.


“전시회는 양이 아닌 질로 승부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 큰 부담은 없을 겁니다.”


말을 뱉고 나니 안수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나나의 근심을 위로하려다가 오히려 더 큰 바람을 일으켜 그녀가 간신히 붙잡고 모아둔 정신을 날려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나나의 어두워진 안색을 통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양으로 승부해도 괜찮고······ 다작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평단에는 얼마든지 많지요. 역사에 차고 넘치는 게 평론가 아닙니까? 하지만 예술가는 어느 시대에든 늘 부족한 법이니 나나 양,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나나가 식탁 가운데에 있는 스킨답서스와 레위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길을 안수에게로 돌렸다. 두 식물 모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하기야 자신은 애초에 이 두 화분을 잊은 지 오래였으니 그걸 보고 슬퍼할 자격도 제게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나의 표정은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더 차분해졌다.


“그럴 겁니다. 게다가 나나 양은 원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으니 실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겠지요.”

“오랫동안 그리지 않았는걸요. 그리고 그림이랑은 전혀 관계도 없는 일을 밥벌이로 삼던 중이었고요. 아마 지금쯤이면 무직이 되었겠지만. 해고수당이나 받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잡지 않은 오른손을 쥐었다 펴며 나나가 말했다. 그 남자가 정말로 백면이라는 저주받은 성인이 확실하다면 언젠가 그가 제 손안에 흰 물감은 말도 안 되는 일의 보답이라며 넘겨준 적이 있었다. 나나 자신이 좋아하는 물감이라고 한다면 코발트, 코발트 바이올렛 정도가 될 것이다. 다 지난 이야기이기는 하겠다만 어쨌든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도 제일 먼저 동이 나는 물감은 언제나 하얀색이었다. 선명하면서도 눈이 부시는 그림을 그리 좋아하지 않던 그녀였기에 어떤 물감이든 간에 쉽사리 흰 물감을 섞지 않고서는 어째선지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코발트와 코발트 바이올렛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빠진 색들이었다. 시원하면서도 차갑지는 않고 반듯하면서도 강렬하지는 않아서 흰 물감을 섞기에는 더없이 안성맞춤인 것들이었다.


“나나 양, 기억은 약해도 경험은 강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알던 것이 아닌 것 같아도 지나고 보면 처음 붓을 잡았을 때보다 훨씬 더 속도가 붙어서 금세 자신만의 방식을 회복하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겁니다.”


모두 다 차를 마시지 않고 있었는데, 그건 맥이 없어 보이는 나나를 위한 배려였다. 하지만 차가 식어버리는 것이 안타까운 안수가 그만 잔을 들며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나나에게 꽤 그럴듯한 조언을 건넸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혹시 예전에 그림 그려보신 거 아니에요?”


나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예술과 학문은 무엇이든지 하나로 통하는 법입니다, 나나 양. 인간은 모두 같은 고통을 겪기 때문이지요.”

“정말요?”

“그럼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요새 거짓말이라는 것의 매력에 대해서 조금씩 깨닫고 그러면서 배우고는 있지만 즐길 것이 되지는 않더군요. 뭐,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이 즐겨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이에 나나가 약간의 생기를 되찾으며 놓치기 아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렇게 꼭 해야 해요?”


안수를 보면서 말했으나 그녀는 도진을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은 그림을 그리라는 지시를 받은 게 전부였지만, 이들은 그보다 더 복잡한 임무를 받았기 때문이다. 가만히 놓고 보면 제 임무가 제일 쉬운 것일지도 모른다. 안수가 말한 대로 그는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하고, 도진은 책을 읽지 않고 지내는 일에 무능력하니까.


“어쩔 수 없지요. 솔직하게 말할까요?”


안수가 한창 짓궂고 방황하기를 즐겼을 적에 명훈에게 농담을 던지며 보이던 눈썹을 들썩거리는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차 한 모금이 단비와도 같아서 금방 세 사람 사이에는 활기가 돌게 되었다.


“네. 말씀해 주세요. 저 조금 기대가 되긴 하거든요.”

“그러도록 합시다, 그럼. 별거는 아니지만 나도 나나 양만큼이나 이 일을 무척 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어쩌면 나나 양보다 더할 수도 있어요. 나나 양은 그림에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부를 바치기라도 하였지, 내가 인생을 바친 쪽은 진실이지 거짓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확실히 그래 보여요.”

“그래서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데 태강 그분께서 자리를 뜨기 전에 아마 정색했던 것 같으나 한 번 나를 무섭게 쳐다보는데 어찌나 무섭던지, 정말로 성인이라는 존재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게 사실이라는 걸 느끼면서 하나 깨달은 게 있지요.”


이 이야기는 도진의 흥미를 끌기도 했다. 어느새 세 사람은 자신들의 매 순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게 뭔데요?”


나나가 두근거리는 심장처럼 손으로 식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


“그때, 일종의 회의가 끝날 때까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걸 말입니다.”

“네? 하지만 심연도에서 그렇게 별말씀 없으셨잖아요. 저는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거짓말이라고 생각이 들지도 않았는걸요.”

“나나 양, 거짓말이라는 건 반드시 말로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어찌어찌 말이 될지는 몰라도 반드시 처음부터 말로써 생기지는 않아요. 아까 들은 심증과 물증 이야기와 다를 게 없지요.”


나나가 인상을 구기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아까의 근심과는 다른 유의 고민에 빠진 것 같아 두 사람은 이것을 은근한 다행으로 여기며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그럼 잘 못하는 거짓말을 그래도 하시겠다는 거예요?”


먼저 들어오느라 아직 빗물이 묻은 옷의 어깻죽지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나나가 말했다.


“그래야만 하지요. 이미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거나 다름이 없으니······ 세상엔 불필요한 진리가 있기도 한다면 꼭 필요한 거짓도 있는가 봅니다. 그렇지요, 도진 군?”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며 도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저도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거짓말은 언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지 함께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이미 시작된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면 비가 그치고 나서 하는 게 어떨까요? 하루 아침에 끝날 일이 아니니 저희도 준비나 연습을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거든요.”


두 남자 간에는 불신이나 적대는 찾아볼 수 없이 동의와 협조만이 오고갔다. 거짓이 반드시 말로써 전달되는 것이 아니듯이 신뢰 또한 그러했다. 아니면, 신뢰가 그러한 것을 거짓이 사람을 속이려 그대로 따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좋겠군요.”


안수가 마음이 놓였는지 아까보다도 더 큰 한 모금을 들이키며 편안하게 웃었다.


“비가 바로 그쳤을 때야말로 비가 내렸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지 못할 테니 말입니다.”


그러고는 아예 잔에 있는 차를 다 마셔버렸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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