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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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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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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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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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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9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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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49화

DUMMY

“거짓말하지 마.”


자신의 팔이라도 필요하다면 자를 기세로 태강이 황호의 손길을 강하게 뿌리쳤다. 서먹하지도 그렇다고 겁을 먹지도 않은 얼굴의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도 달라서 태강은 문득 천규와 마지막으로 대화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는 일어서서 황호의 머리통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슬픔은 거짓말하지 않아.”


황호가 그를 쳐다볼 생각은커녕 등을 더 구부리며 낮게 읊조렸다.


“슬픔은 무슨, 넌 감정이 아니라 사람이야. 언제까지 널 그렇게 감정 취급하면서 살래?”


황호의 지나친 감상주의적 태도에 판단력이 흐려진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므로 태강은 스스로 마음을 단단히 굳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되새겼다. 한 걸음 더 물러서다가도 멈추어서 일부러 더 오만불손하게 보이도록 눈에 칼을 세웠다.


“태강, 널 사람 취급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 넌 기적일 뿐이지, 결코 사람이 아니야. 사람이 될 수가 없어. 죽지 않고 계속 사는 사람을 사람들은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아.”

“그래, 그래서 우리를 성인(聖人)이라고 부르는 거잖아. 그리고 우리도 죽어. 몇 번이나 죽었는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인간보다 더 많이 죽어.”

“그렇지······. 하지만 이름은 허물에 지나지 않아, 우린 그 허물을 벗어야만 하는 것이고.”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태강이 올라오는 화를 간신히 눌렀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네. 그러니까 녹수가 백면의 내생을 다 죽이려고 했다는 거잖아. 그건 말도 안 돼.”

“어째서? 너희들은 녹수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며 지금껏 의심하고 있었잖아.”


황호가 여름날의 공포를 연상케 하는 서늘한 비소를 흘렸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그거야 당연히 녹수가 우리 중에서는 그래도 제일 백면이랑 사이가 좋았었잖아. 그래서 그런 의심을 했던 거지.”

“지금은?”


동작이 결코 행동으로 보이지 않도록 황호가 아주 느릿하게 일어나 태강의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녹수를 의심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의심하지 못하는 건가?”


단순한 물음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욕적인 우롱을 당한 것처럼 태강은 황호의 서리한 시선과 부자연스러운 변사조(辯士調)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차라리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가 너무도 노쇠해져서 세월의 무사함에 분노를 느꼈다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할 정도로 그는 지금이 감정을 퍽 서툴게 느꼈다.


“내 말은 모두 사실이야. 내가 슬픔이건 사람이건, 어느 쪽이든 그게 나라면 나는 사실을 말하는 존재라는 거야. 녹수는 정말로 백면의 내생을 모조리 죽일 작정이었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그 애한테 더 나을 거라면서.”


황호가 돌아가 앉았다. 중간에 기침을 몇 번이나 한 것으로 보아서 그에게 살날이 그리 넉넉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녹수가 귀천에 간 게 백면을 죽이려고 간 거야?”


주먹을 쥐면서 땀에 나는 손바닥을 감춘 태강이 흙을 묻듯이 감정을 누르며 물었다.


“아니, 그래서 그런 건 아니야. 녹수는 죽었지. 귀천에서 죽었어.”


대답이 워낙에 간결해서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바로 확신할 수 없었다. 말이 제때 나오지 않아서 눈썹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얼굴을 찌푸린 후에야 그는 황호가 전한 소식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죽었다고? 녹수가 말이야? 방금 귀천에 있다고 그랬잖아! 아무리 나이가 들었을 거라고 해도 그렇지, 그럼 그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건데?”

“당분간은 내생 모두 무사히 자신의 인생을 알아서들 살겠지.”

“당분간이라니? 녹수가 바로 태어난다는 뜻이야? 하지만 지금쯤이면 홍연이 태어나거나······ 그래, 녹수가 죽는다면 머지않아서 다시 태어나기는 하겠네. 하지만 천일나무는 지금 꼴이 말이 아니야. 홍연조차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래. 천일나무에서는 그 누구도 태어나지 않을 거야.”


새어 나오는 기침 소리를 막지 못하고 울리는 가슴을 누르며 황호가 대답했다. 그는 너무 많이 지쳐 보였고, 또 그만큼의 슬픔도 가슴에 묻은 것처럼 처연해진 겉모습만으로 태강의 양심에 못을 박았다.


“왜 그렇게 확신해? 흑석이랑 주화가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어. 뭔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기는 했지만 뭔가 될지도 모른대. 비가 그쳐서 아쉬우니 나한테 비를 하루만 더 내리게 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거든.”


세월의 흐름은 자신이 소관할 수 없는 것이 명백하니 태강은 무죄를 주장하듯이 항변했다.


“······그건 잘 모르겠군. 하지만 천일나무는 죽을 거야. 백면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황호의 얼굴이 단번에 더 암울해졌다. 태강은 그 까닭을 좀처럼 짐작할 수 없어 답답함을 느낀 나머지 쓰러져가기 일보 직전인 집에 대한 배려도 않고 단순한 분풀이를 위해 바닥을 쾅 내리찍었다.


“백면은 돌아올 거라니까! 어차피 살아서 어딘가에서 지내고 있는 거라면, 잡아서 데려오기라도 하면 돼. 마음이 읽히는 게 흠이기는 하지만······ 나중에 정 안 되면 내생의 눈물을 전부 모으기라도 하면 되지.”


태강이 짜증을 부리며 말하자 황호가 역으로 그를 더 가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게 문제라는 거야. 그 사람이 백면이라면 더더욱 안 돌아올 거라고. 너희도 이제는 알고 있을 텐데! 백면이 그 여자 때문에 이런 판국을 만들었다는 것을! 판국인지 파국인지 모를 그럴 상황을 말이지.”


제 볼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쉰 태강이 이번에는 구두코로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이전 것이 워낙 사나웠던 탓에 그 소리는 거의 없는 것처럼 들렸다.


“알고 있어. 초영도 그것 때문에 고심하는 눈치였으니까. 전혀 몰랐대. 그 여자가 간절히 빌 때도 장난으로 넘기고 말았다고 하더라.”

“그래, 그때 초영이 제일 먼저 나서기만 했어도 아마 이런 일은 없었겠지.”

“성인은 매번 같은 삶으로 태어나고 인간은 전혀 다른 삶으로 태어나는데 그런 어설픈 소원에 나설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겠어?”

“너 말이야.”


어떤 동작도 없이 그저 노려보기만 하였는데도 태강은 황호의 눈길이 아까의 손길보다도 더 위협적이고 오싹하다고 생각했다.


“나? 나 그렇게 어설픈 애 아니야.”

“하지만 어설픈 마음에는 늘 동하기 마련이지. 네가 신중히 능력을 쓴 적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야.”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황호는 고개를 저으면서 기침을 계속했다. 그가 목을 가다듬고나서도 한참이나 태강을 주시하다가 가래가 들끓는 듯한 탁한 목소리로 말한다.


“무시하지 않아. 너의 그 기개를 높이 사서 너를 여기로 부른 거니까. 과연, 동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강하기는 한가 봐. 문제의 본질은 회피하기 바빴던 네가 용기를 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말이야.”

“천규 이야기는 하지 마.”

“아무래도 지금 아무 조건 없이 부탁하기만 해서는 네가 전혀 들어줄 것 같지는 않으니 조건을 하나 걸게. 일종의 교환인 셈이지.”


황호가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보였지만, 태강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더 거리를 두려고 목을 절박하게 뒤로 내뺐다.


“원래는 녹수가 죽었다는 것만을 알려주고 끝내려고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안 먹힐 것 같단 말이야.”


황호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그 웃음의 끝자락에는 아직 장마의 꿉꿉한 기운이 맴도는 것인지 비릿한 냄새가 풍기는 것도 같았다.


“그게 뭔데?”


태강이 먼저 물어오자 황호는 더욱 크게 웃었다.


“천규가 죽은 이유를 알려줄게.”

“뭐?”

“대신에 내 부탁을 좀 들어줘. 어때, 이만하면 괜찮은 조건이지 않아? 조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값진 정보라서 거래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 듯싶은데.”


어느새 황호의 코앞에 서서 그를 악독하게 노려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태강은 이 거래에 수락으로 응할 것인지 거절로 응할 것인지 결정한 상태였다.


“좋아.”


그의 목소리 같지 않게 대답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 동생의 목숨을 한낱 정보로 취급하는 황호의 비열한 태도에 분개한 것이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황호가 악수를 청하며 말하자 태강은 망설이지 않고 그의 손을 내쳤다. 연속되는 퇴짜에도 황호는 전혀 상처받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그는 태강의 반응을 즐기는 것처럼 약간의 기쁨이 서린 눈으로 태강을 대했다.


“이유를 먼저 말할 수 없어. 네가 먼저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하거든.”

“그래서 부탁이 뭔데? 빨리 말해.”


둘은 눈싸움만으로도 인간의 인격에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것인지 좀처럼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빨리 말할게.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야.”

“본론이 있을 거 아니야. 본론부터 이야기하라는 거야.”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다 든 황호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먼저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데도 자신의 승리를 만끽할 수 없는 태강이다.


“녹수를 살리는 걸 도와줘.”


다시 눈을 뜨며 황호가 그를 마주할 때, 태강은 승리는 영원한 것이 아니며 패배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서 하는 부탁이야?”


기가 찬 나머지 태강이 폭발과도 같은 탄식을 터뜨렸다.


“난 생명을 살릴 수는 없어. 그래서도 안 되고.”

“하지만 넌 천규를 살리려고 했었잖아.”

“그래, 하지만 처참히 실패해서 그 애를 놓아주어야만 했다고.”

“그럼 이번에는 성공하면 되겠네.”

“내가 무엇 때문에 천규도 아닌 녹수를 살려야 하는 건데? 백면의 내생을 죽이려고 하면 더 골치만 아플 텐데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는데?”


젊음에게서 쉬이 연민과 동정심을 구하는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온 황호가 입술을 고집스럽게 다물었다.


“그건 금기야. 우리라고 해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고.”


태강은 이제 질세라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백면이 먼저 이탈해버린 이상, 뭐가 문제인 건지 모르겠네. 네가 날 도와줘야 해. 그렇지 않으면 백면이 우리를 죽일 테니까.”


젊은이의 치기가 부러우면서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노인이 새로운 조건을 내걸며 협박과도 같은 부탁을 다시 청해왔다. 태강은 이 노인이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그가 지닌 슬픔의 깊이만큼이나 가늠할 수 없었다.


작가의말

페이지에 오류가 있었던 것인지,

계속 접속이 되지 않아 기다리다 이제야 올리네요.

죄송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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