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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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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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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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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3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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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44화

DUMMY

“백나나, 얼굴이 왜 그래?”


옆자리에 앉으며 태강이 성가신 겨울 아침처럼 군다. 헌데 지금은 여름 중에서도 한여름이니 그의 언행이 상당히 불미스러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을 텐데 그러한데도 저런 태도를 보이는 까닭을 모르겠다고 나나는 올라오는 성질을 누르며 눈을 흘겼다. 이내 차라리 안 보고 말자는 생각이 들어 눈감아 참아보아도 화끈거리는 마음은 시각의 것이 아니었는지 여전히 미간이 좁혀졌다.


“아니지, 얼굴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다시 물을게. 꼴이 왜 그래?”

“자다가 일어났을 뿐이거든요.”


그런데도 그 일부가 아니라 전체가 놀림감이 되고 말아버린 데에서 화를 가라앉힐 수 없는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 이 대화가 제공하는 불편한 심기는 거뜬히 극복 가능한 것처럼 태강이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며 자신이 직접 데려온 손님을 소개한다.


“자, 인사해. 백면의 내생끼리 말이야.”

“뭔 소리예요? 저희 이미 구면이거든요.”


그 걸리적거리는 팔을 떨치며 나나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러고서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날렸던 화가의 명작을 보는 것 같이 익숙하지만 경이롭게 맞은편의 안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거렸다. 저쪽에서도 응답이 왔다. 영문을 모르기는 피차일반인 듯하다.

태강이 말한 대로 서로 초면인 것처럼 안수와의 어색한 인사가 끝난 후에 나나는 제 옆에 앉은 도진을 몰래 눈짓으로 살폈는데, 그는 편지 봉투에 들어가기 위해서 생긴 나이테 같은 자국이 십자가 모양으로 선명한 종이 한 장에 온 신경을 빼앗긴 채였다.


“대단한 협박이군요.”


한참이나 있다가 도진이 아직 놓지 않은 손으로 종이를 조심스레 탁자 위에 놓으며 말했다. 이에 훔쳐보는 게 훨씬 더 수월해진 나나가 몸을 그가 있는 방향으로 기울이려고 했고, 그녀는 곧 다시금 어깨동무를 걸어오는 태강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팔 하나가 사다리라도 되는 양 태강은 불쑥 얼굴을 들이밀어 나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내가 실은 말이지. 거리를 좁히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거든.”

“뭔 소리예요? 무거우니까 떨어져요.”

“아, 오랜만에 봐서 반가워서 그래. 우리는 엄청나고 무시무시한 고난을 함께 이겨낸 동지 아니야?”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고난이네요.”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제 목 부근에 허락도 없이 함부로 다른 체온과 살갗을 들이미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나는 제 오감이 점점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는 것 같은 느낌에 오명에 막대한 토지를 잃기라도 한 것처럼 우발적인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이 감정은 금방 잠잠해졌다.


“난 너한테 도움이 되라고 하는 소리였어.”


헛된 수고였다. 그만큼이나 허무의 힘은 강했고, 그것이 소리가 되어 자그마치 헛소리가 되어 돌아왔을 때 나나는 드디어 암투극의 마지막 장에 이른 주인공처럼 격의를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혀 도움 안 되거든요. 그리고 도움도 필요하지 않고요.”

“정말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 중 하나가 낸 것은 아니었다. 옆을 쳐다보니 쥐고 있는 편지를 국기처럼 펄럭거리며 경건한 얼굴의 도진이 관심을 얻으려고 일부러 목청을 가다듬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말씀드렸기는 해도 혹시 못 들으셨을 수도 있으니 한 번 더 제 소감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아, 들었어. 들었지, 내가 그 정도로 정신을 놓고 있었을까 봐? 대단한 협박이라고 했지? 그런데 천만에! 어설픈 공갈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야. 두고 봐. 대단하다는 말은 그 표절을 당한 사람한테나 써야 할 거야.”


자신의 변호에 심취한 듯이 떳떳하면서도 방자한 구석이 있는 웃음을 흘리며 태강이 떠들었다.


“도대체 뭔데 그래요?”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오는 한 장의 종이가 역시나 편지였음을 확인하게 되자 나나는 그것을 자신에게 넘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내민 팔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도진은 아쉬움 없이 바로 나나에게 편지를 건네주었고, 드디어 그녀가 눈앞에 편지지를 들이밀던 찰나에 그녀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나의 어깨에 올려두었다가 풀어버린 팔로 잽싸게 편지를 채간 태강이 눈을 가늘게 뜨며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 진짜 무서운 인간이라니까. 너무 무서운 인간이야. 어떻게 이런 말을, 이런 생각을 할 생각을 할까? 나는 말이지. 인간이 제일 무서워. 지금 이 순간에도 남을 등쳐먹으려는 꿍꿍이나 만드려고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영혼은 계속해서 삶을 살겠지만, 인생은 단 한 번이라고. 그런데도 어떻게 매번 이런 인간들이 나타나는지 모르겠다니까. 백나나 너도 알지? 인간이 제일 무섭다는 거.”

“이리 내놔요. 제가 읽고 있었잖아요. 순서라는 게 있다니까요?”

“순서가 뭐가 중요해? 왜, 다들 죽는 데 순서가 없다잖아. 그럼 읽는 데도 순서가 없는 거지. 너는 책 같은 거 읽을 때 작가 나이 순서대로 읽어? 연장자 우대를 하냐는 말이야.”

“세상에 그렇게 책을 읽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이렇게 된 이상 당당하게 도로 뺏어 오겠다는 심보로 나나가 팔을 뻗었다. 그러자 태강은 창가가 있는 방향으로 편지를 날려버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이는 건 이중에서 그 한 사람이었다.


“왜 없어? 있어. 분명히 말이야. 시대순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역사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데, 그런 사람이야 널리고 깔렸지.”

“그래서 지금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거기에 무슨 제 험담이라도 적혀 있어요? 뭔 내용인데 그래?”


나나는 펄펄 날리다가 눈이 녹듯이 바닥으로 자취를 감춘 편지를 보고 급히 뒤돌아 구원을 원하는 눈길로 도진과 안수를 쳐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편지를 가지러 가기 위해 일어나려고 무릎을 피는 시도를 했다.

모질지 못한 도진이 안수의 눈치를 보다가 먼저 입을 열자, 이를 가로막는 방해꾼이 무책임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응? 아니. 나는 사실 저거 읽어본 적 없어.”


나나는 도저히 헛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뭐가 대단하니 어쩌니 한 거예요?”

“당연하지. 난 읽지 않아도 다 알고 있으니까.”

“자랑이네요. 그럼 그걸 왜 뺏어가요? 남은 뭔지도 몰라서 궁금해 죽겠구만.”


태강이 덥석 나나의 손을 잡더니 앉으라는 듯이 턱짓으로 그녀의 의자를 가리켰다. 반항의 심리가 순간적으로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뒤이어 자신이 직접 이야기해주겠다는 태강의 권유에 도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인간이 보낸 거거든.”

“그 인간이요?”


앞에서 긴장한 얼굴로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의 만담을 지켜보고 있던 안수가 끼어든다.


“권 교수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나 양.”


나나의 얼굴이 종잇장 구겨지듯이 오만상이 되어버렸다. 그와는 좀처럼 기분이 좋은 만남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 그 인간에 대한 거거든. 너도 싫어하잖아. 하지만 네 말도 맞아.”


한숨을 쉬면서 피곤한 눈빛을 딴 데로 돌린 태강이 턱을 괸 팔을 탁자 위에 대강 올려두었다. 만사가 그에게는 따분한 일상인 것처럼 보이는 나른한 얼굴이 느닷없이 드러났다. 혹은 자신이 되도록 끝까지 방어하거나 간직하려던 것을 끝내 내어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허해진 표정일 수도 있다.


“네 험담은 아니지만, 네 이야기도 대충 적혀 있거든. 네 이름은 없는데 네 이야기는 있어. 정말 신기하지?”


나나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최대한 태강과 눈을 맞추려고 했다.


“무슨 말이에요? 제 이름이 없는데 제 이야기가 있다니, 뭘 암시라도 했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봐야지. 그 사람 딸 이름이 홍나나거든. 딸에 대한 문제로 협박을 한 거야. 그러고서는 너를 핑계로 속여서 홍우현 그 사람이 가진 글을 전부 뺏고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할 작정인 거지. 이건 편지에 없는 내용이야. 하지만 그 음흉하고 비열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첫머리와 끝머리에 모두 있는 내용이기도 하지.”


붙잡히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재빨리 일어난 나나가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주어서는 금방 자리로 돌아왔다. 태강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기는 했어도, 거짓말을 한 것은 결코 아닌 듯한 의미심장한 문자들이 앞다투어 나나의 시선을 하나둘씩 뺏어갔다.

편지에는 홍우현에게 권기현이 알리기를, 이제부터는 가출한 딸의 소식을 전혀 전하지 않을 것이지만 혹여 만약 원한다면 딸의 자랑스러운 가장 명예로운 업적을 구경하게는 해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자랑스러운 가장 명예로운 업적이라는 표현과 태강의 표현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것은 백면의 전시회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었다.


“정말 파렴치한 인간이지? 이런 사람이 쓴 건 편지든 뭐든 읽지 않는 게 좋아. 지금 너처럼 헛불 맞은 자루 놓친 것 같은 표정이나 짓게 된다니까.”


이건 순간에 지나지 않는 얼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도리를 거스르는 물살에 맞은 듯한 혼탁한 표정을 나나는 쉽게 거둘 수가 없었다.


작가의말

소중한 시간을 저의 글에 써주시는 바에 늘 깊은 감동과 감사를 느낍니다.

이는 제가 삶을 경험하며 느끼는 가장 행복한 감정입니다.


이에 충분히 보답을 드린다고 자부할 수는 없으나,

그러기 위해서 늘 노력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셨으면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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