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최근연재일 :
2021.05.01 23:55
연재수 :
333 회
조회수 :
14,251
추천수 :
244
글자수 :
1,286,707

작성
21.01.20 23:59
조회
27
추천
2
글자
10쪽

230화

DUMMY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어느 순간인지 남자는 극기와 절제로 완연하게 점철된 표정으로 나나의 앞에 섰다. 내려다보는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구석이 있어서 찬찬히 살피니 아닌 것 같다. 약간 상기되어 보이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남자의 지금 태도는 꾸며진 것만은 확실하다.


“네, 다 들었다니까요. 어떤 여자를 만난다고. 그 여자가 누군지는 딱 한 사람만 빼고 모르는 것 같던데요. 비밀인가요?”

“비밀이랄 건 없지.”

“그런데 왜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남자가 대뜸 나나의 어깨에 손을 댔다. 나나는 피하려고 했으나 급작스러웠던 탓에 그럴 수 없었다. 곧이어 두 사람 사이에는 어정쩡한 어깨동무로 이어진 끈 하나가 생겨버렸다.

불편하고 무거운 데다가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남자의 팔을 치워버리기 위해 나나가 안간힘을 쓴다. 그러자 남자는 팔을 더 단단히 둘러서는 구렁이가 꽈리를 트는 것처럼 그녀의 목을 아예 감쌌다.


“갑자기 뭐예요! 놔요!”


나나가 남자의 귓가에 대고 외쳤다. 소름이 끼쳐서 제 말에 두서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까닭으로 말보다는 행동이라고, 뺨을 한 대 올려붙일 작정으로 두 손으로 있는 힘껏 남자의 얼굴을 밀어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딱 정확히 그 얼굴과 뒷덜미 정도만 잠시 물러났을 뿐인 데다가 그사이에 남자는 자신이 나나의 목에 쳐둔 울타리를 더욱 완강히 정비해 두었다.


“놓으라니까요!”


한 번 더 소리를 치는 순간에 이 씨의 말이 남자 대신에 대답처럼 느닷없이 돌아왔다. 비스킷만 두고 목숨을 연명했던 피아노 연주자와 다를 바가 전혀 없는 사람이 이 남자라고 했다. 건반을 마음대로 누를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두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그런 이 씨의 말은 틀렸다. 누구든 건반을 마음대로 두드릴 수 있을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건반은 아무것도 아니다. 붓 또한 그렇겠지. 그러니까 변덕을 부리는 마음에 기대어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 대신에 이 뇌가 고장난 그림꾼과 그 배가 고장난 연주자를 구별할 방법이 하나 새로 있다. 그건 바로 팔과 손의 구분에서 비롯된다. 건반을 두드리는 자는 손 끝에 힘을 싣는다. 팔은 손의 움직임에 따라 다음으로 힘이 들어가는 부분이다. 반면에······ 붓을 내리치는 자는 팔의 시작에 힘을 실어 손을 움직인다.

나나는 남자가 손이 아닌 팔에 힘을 쥐고 자신을 붙들고 있음에 아무리 몸부림쳐도 뜻대로 남자의 속박에서 없다는 데에서 깊은 분노를 통감했다. 그리고는 살가죽이라도 다 뜯어버릴 거처럼 잡아채던 남자의 팔을 놓고는 그만 제 몸에 힘을 빼고 말았다.


“놓으라니까요.”


억척스럽던 몸싸움이 끝나고 나긋나긋한 말투로 말하니 놀랍게도 남자는 금방 그녀를 놓아주었다. 허망된 심리에 그를 잠시 노려는 보았으나, 남자의 팔이 닿은 부분을 경계하느라 피가 쏠린 목과 얼굴을 연신 손등으로 문지르며 그녀는 한 걸음 멀찍이 섰다.


“뭐예요? 갑자기? 죽는 줄 알았잖아요!”

“날 도대체 뭐로 본 거야? 난 널 죽이지 않아.”

“그거야 당연히 그래야죠!”


남자에게 졸린 목을 아직 놓지 않은 나나가 더 아픈 체하며 성을 냈다.


“난 네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 건데.”

“대답이라고요?”


그리 싱그럽지 않은 하늘을 바라보며 짧은 회상을 마쳤다. 이번에는 그녀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었다. 각종 이유가 섞인 것처럼 보이는 난감한 눈빛은 어쨌거나 마침내 하나의 분노로 통합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게 대답이라고요? 비밀인지 아닌지 말로 하면 되는데 왜 이런 위험한 짓을 해서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요?”

“비밀을 말하면 그게 어떻게 비밀이겠어.”

“무슨 뜻이에요?”


오히려 자신이 상대를 경계해야 함을 일러두는 듯이 이번에는 남자가 뒤로 물러섰다. 이내 그는 별다른 말을 섞지 않고 어깨만 앞뒤로 비틀어 움직였다. 율동 같기도 했으나 너무 짧은 동작이었던지라 자신의 질문에 대한 황당한 방식의 답변이라는 것을 나나는 파악할 수 있었다.


“비밀이라는 거예요?”


남자는 무반응이다.


“비밀이라는 거네요.”


역시 그대로다. 걸음을 옮기지도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는 남자의 모습에 나나는 헛웃음을 치며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 것까지 캐낼 생각은 없어요. 저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잖아요.”

“그런가?”


나나는 의외로 남자에게도 허점이 있다는 것을 무심코 발견하고 말았는데, 그건 그가 딴청을 피우는 데 능숙치 못하다는 점이다.


“꽤 매정한 구석도 있구나. 난 너한테 꽤 많은 걸 털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빈정거리거나 남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데에는 아주 통달한 사람이 바로 이 남자라는 것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곤란해진 부분에 관해서만 딱 관여하도록 할게요.”

“그게 그렇게 되나?”

“되게끔 해야죠.”

“그래. 그래서 나 때문에 네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곤란해졌는데?”


남자의 능글거리는 눈빛이 닿았다. 엄연히 도망치고 일을 크게 키운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도 일부러 심술을 부리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림을 한 번 봤다는 이유만으로 붙들렸거든요. 그랬더니 어느새 그쪽 전시회가 어떤 주제일지 추리해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때 처음 본 그림을 기억나는 대로라도 그려서 보여달라는 부탁까지 받았어요.”

“간단하네.”

“이게 간단하다고요?”


남자가 두 발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다리를 꼬아 섰다. 자세는 수시로 바뀌어서 나나의 정신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래. 그리면 되잖아. 네가 내 그림을 본 게 사실인데 뭐가 문제지? 도통 모르겠네. 넌 너무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고 사는 모양이구나.”

“무슨 화가가 그렇게 무책임해요?”

“그야······ 난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걸 선호하거든.”


나나는 자신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 이 답답한 대화를 간신히 인내하고 있음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남자가 재차 그녀의 주위를 맴돈다.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이지로 나나도 그를 따라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그때 ‘사계절’을 그린 그림을 보았다는 거로 전시회 주제가 그거랑 같을 거라고들 생각해요.”

“하긴, 그렇겠네. 네가 본 건 『사계절』이었으니까.”

“이게 말이 돼요?”


속이 먼저 울렁거리게 된 건지, 시야가 먼저 울렁거리게 되어버린 건지 그 순서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나나가 남자에게 따졌다.


“말이 안 될 건 없지.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했대?”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네 생각은 어떤데?”

“모르겠어요. 본인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함부로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왜? 다들 잘만 그러던데. 그런 거에 도덕성을 따졌다가는 모든 비평가들은 직업을 잃고 말 거야. 그러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

“본인 일인데 어떻게 그렇게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말해요?”

“그야 남의 일이니까.”


남자가 멈추었다. 잇따라 나나도 걸음을 중지시켰다. 두 사람은 시곗바늘 놀이를 드디어 멈추었고 서로의 얼굴을 정확히 쳐다보았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나를 찾아온 거라면 네가 알아서 해.”

“알아서 하라니, 설마 전시회를 이야기하는 건 아니죠?”

“지금까지 그 이야기만 했으면서 정말 귀찮게 하네.”


그건 저쪽에서 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아닌가 하고 나나는 생각했다. 마치 시침이 초침을 흉내 내는 듯하다.


“네가 알아서 해. 난 전시회가 어떻든 상관없어. 원한다면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좋아. 내가 거기에 맞추도록 하지.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내 전시회의 주제는 네 손에 달렸다는 말이야. 그리고 기왕 쫓아올 거면 다음번엔 네가 그린 그림이라도 가져오도록 해. 그게 예의지.”


남자는 뻔뻔했다.


“내 마음대로 하라고요?”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나나가 확인 삼아 물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하라니까? 어차피 그림이 한두 점 있는 것도 아닌데, 네가 꾸민 이야기에 대충 맞추어서 그림을 걸어두기만 하면 돼. 내가 돌아간다면 말이지.”

“그건 또 무슨······! 전시회 때까지 안 돌아오겠다는 거예요?”

“내가 쪽지를 남겼을 텐데, 못 봤나?”

“봤는데도 모르겠어서 하는 말이에요!”


기현과 인영의 해석과 자신의 해석이 달랐을 때 느꼈던 당혹감을 기억해내며 나나가 다급하게 남자의 시선을 붙들었다. 안정감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그가 서서히 산만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럼 그냥 그렇게 기다려. 어차피 널 곤란하게 하던 일에서는 해방된 거나 다름없잖아? 나한테 볼일이 끝난 거면 이만 가보는 게 어때? 나도 일정이라는 게 있어서 말이야. 화가에게도 시간은 공평한지라 너한테 더 붙들리고 싶지는 않은데.”


남자는 뻔뻔했다. 그렇지만 나나는 이에 더해서 남자가 과연 몹시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달이 만든 세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47 246화 21.02.05 27 2 9쪽
246 245화 21.02.04 28 2 9쪽
245 244화 21.02.03 27 2 10쪽
244 243화 21.02.02 34 2 9쪽
243 242화 21.02.01 26 2 10쪽
242 241화 21.01.31 28 2 9쪽
241 240화 21.01.30 38 2 9쪽
240 239화 21.01.29 26 2 9쪽
239 238화 21.01.28 28 2 11쪽
238 237화 21.01.27 28 2 9쪽
237 236화 21.01.26 31 2 9쪽
236 235화 21.01.25 29 2 9쪽
235 234화 21.01.24 30 2 9쪽
234 233화 21.01.24 26 2 9쪽
233 232화 21.01.22 32 2 10쪽
232 231화 21.01.21 29 2 9쪽
» 230화 21.01.20 28 2 10쪽
230 229화 21.01.19 33 2 9쪽
229 228화 21.01.18 29 2 10쪽
228 227화 21.01.17 30 2 10쪽
227 226화 21.01.16 84 2 10쪽
226 225화 21.01.15 27 2 10쪽
225 224화 21.01.14 27 2 10쪽
224 223화 21.01.13 28 2 10쪽
223 222화 21.01.12 31 2 9쪽
222 221화 21.01.11 27 2 9쪽
221 220화 21.01.10 28 2 9쪽
220 219화 21.01.09 29 1 10쪽
219 218화 21.01.08 32 1 10쪽
218 217화 21.01.07 28 1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