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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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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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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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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7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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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화

DUMMY

별안간 무지개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화색이 돈 인영의 얼굴에는 일출과도 같은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생각이 나나를 퍽 외롭게 만들었고, 이내 그녀는 홧김에 꺼냈던 파격적인 제안을 후회하게 되었다.


“정말이에요? 난 빈말을 아주 싫어해요. 거짓말은 극도로 혐오하고요.”


그렇지만 물리기에는 너무 늦은 듯싶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이 뱉은 말에 책임을 다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나나는 자신이 급조했던 언명(言明)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순식간에 결신자가 되어버린 그녀의 앞에 닥친 미래는 커다란 돌덩이처럼 굴러들어왔고, 그 돌덩이처럼 차갑고 거친 존재나 다름없는 인영이 앞에서 미소로 자신의 확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거짓말은 아니에요. 그러기로 했거든요.”

“그러기로 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마 선생님을 따로 뵙기라도 했단 뜻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솔직하게 다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 남자가 자신에게 준 자유에 대한 보답으로 그의 비밀을 보장해줘야 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예의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실로 말할 것 같으면 그가 모두 자초한 일이기에 이러한 배려가 당연시되는 것이 마땅한 처사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기왕 얻은 기회에 제대로 그리고 멋대로 판을 휘둘러보려고 하니 그것은 마치 최소한의 도리처럼 다가왔다.


“대신에 그림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거든요.”

“어디에 있는데요? 보안 문제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 일에는 그림을 보는 안목만 중요한 게 아니라서 말이죠. 관련 전문가들을 고용해서 그림을 옮기는 게 오히려 더 안전할 거예요. 누누이 말하는 바지만, 저희는 선생님을 돕기 위해 있는 거니까요.”

“전시회가 정확히 언젠데요?”

“심연 축제와 비슷한 시기에 열려요. 앞뒤 일정을 봐가면서 자세한 날짜를 정할 것 같은데, 그렇게들 예상하고 있죠.”

“그럼 대충 가을 무렵이겠네요?”

“맞아요. 그런데 그게 중요한 건가요? 전시회가 언제든 선생님의 그림만 있으면 되는 일인데 말이죠. 당장에라도 할 수만 있다면 전시회를 열 거예요. 그만큼 천우라는 이름이 지닌 가치는 미술계에 있어 엄청나니까요.”

“그림을 가져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리거든요.”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인영이 금세 낯빛을 바꾸어서는 예리한 눈총으로 나나의 양심을 자극했다.


“시간이 걸린다고요? 어디 먼 곳에 있기라도 해요? 가령 선생님이 지금 계신 곳이라든가. 자세히는 묻지 않을 테니 납득할 수 있게끔 충분한 설명은 해줘야죠.”


역시나 그 성미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어조로 인영이 따졌다.


“먼 곳에 있는 건 맞아요. 조금 많이 먼 곳이거든요. 그리고 그림을 찾는 일에도 시간이 좀 걸려서요. 어쩔 수 없어요.”

“그렇다면 도울게요.”

“아뇨! 그러면 안 돼요.”


손에 들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자신의 거짓말이 무엇을 감추는지 들키지 않도록 두 손을 뒤로 숨긴 나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높아진 그녀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뚝뚝 떨어져서 오히려 빗소리를 상냥한 속삭임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러면 안 된다니요. 백나나 씨가 생각하기에도 말도 안 되는 조건인 거 알죠?”

“아뇨, 말이 돼요. 정말 말이 되는 일이거든요. 아마 전적으로 이해하실 거예요.”

“······전적으로 이해한다고요? 그 기가 찬 조건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말이죠?”

“네! 왜냐하면, 이건 화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거든요.”


인영이 천우의 작품집을 한 장씩 넘기며 시간을 끌었다. 화가의 자존심보다는 그녀의 자존심이 먼저 상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좀처럼 내색하지 않는 바람에 나나는 이 미묘한 변화를 잡아내지 못했다.


“어째서죠? 선생님이 그렇게 지시라도 하신 거예요?”


갑자기 모든 게 얄미워 보이는 터라 인연은 책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고, 그대로 책은 불시에 목이 꺾여 목숨을 잃은 것처럼 침대 위로 비스듬히 떨어졌다.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완성되지 않은 그림을 보여주고 싶어 할 작가가 어디에 있겠어요? 안 그래요? 아까 분명히 이 말에 공감하셨잖아요.”

“그랬었죠.”


아득하게 먼 과거를 돌아보듯이 허공을 응시하며 인영이 대답했다. 나른하면서도 초연한 듯한 어조가 가져다주는 여운이 잠시 침묵으로 있다가 사라졌다.


“이해가 잘 안 되네요.”

“어째서요? 그림의 완성 문제 때문에 그런 거라니까요.”


식은땀을 빼며 나나가 어설픈 웃음을 회유책으로 내놓았으나, 기획운영단장은 자신의 시간과 노력의 합작인 경력이 빚어낸 통찰력을 통해서 지금 일어나는 일에서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그쪽을 외면해버렸다. 일부러라도 그래야겠다는 결심이 불현듯이 떠오른 것이다.


“알겠어요. 그렇다면 원래 계획되었던 시기에 차질 없이 전시회를 준비할 수 있다는 건 맞죠? 적어도 그 정도의 확답은 필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회의 때마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드는 독사들한테 물려서 내가 죽어버리고 말 거예요. 그런 개죽음은 정말 싫거든요.”


이 순간에 나나는 정확히도, 그야말로 살갗에 닭살이 들이돋을 만큼의 충격을 감당해내며 자신이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실구(失口)한 것에 대해서 인영마저 그녀로서는 다소 후한 자비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으니,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비단 시간뿐이 아니었다.

진실로 시간은 항시는 아니더라도 때로 가장 신적(神的)인 것이니, 후회와 좌절은 인간의 몫이라는 것을 통감하며 나나는 자신이 첫머리를 달아버린 이야기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네. 아무리 늦어도 원래 계획했던 때에 맞출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까 이후에 쏟아지는 말에는 어떤 책임이나 의무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고 도리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만이 그 존재감을 만끽하며 마음에 들어앉는 것 같았다. 작심과 결의가 한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해야 한다면 아마 지금의 대화를 누군가에게 똑같이 들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좋아요. 그렇다면 안심이네요. 최소한의 마음만 놓는 거긴 하지만요. 다음에 언제 찾아오면 좋을까요?”

“안 찾아오셔도 돼요.”

“어째서죠? 그래도 가끔 들러서 백나나 씨가 책임감을 갖고 제대로 준비를 해나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거든요. 개인적인 감정으로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내 임무이기도 해요. 일이라는 거죠.”

“전 없을 거예요.”


대화를 끝내고 싶다는 심중의 의도를 문을 열어버리는 태도로 드러내며 나나가 단호히 말했다.


“참, 그리고 먼 곳에 있다고 했었죠?”

“네. 그래서 여기에 있을 수 없어요. 찾아오셔도 없을 거예요.”

“그래도 때때로 돌아오는 날이 있을 거 아니에요?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위치만 알려줄 수는 없나요? 나름의 협조자로서 백나나 씨를 기다리려고 하거든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죄송해요.”


더 붙잡고 심문해 봤자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인영은 순순히 걸음을 옮겨서 문밖으로 나갔다.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던 도진이 뒤로 물러서며 그녀에게 자리를 내어주었으나, 어차피 나온 김에 더는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여긴 인영은 두 다리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마지막 경고를 했다.


“알겠어요. 어쩔 수 없죠. 하지만 내가 백나나 씨를 믿고 맡기는 만큼 그쪽에서 떠안는 책임이 엄청나다는 것만 알아둬요. 선생님이야 워낙에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시는 분이고, 또 그게 가능한 위치에 계신 분이지만, 백나나 씨는 지금 작가로서 천 선생님의 일을 떠맡은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해야 해요. 즉, 뱉은 말에 책임을 다해야만 할 거라는 뜻이에요. 이번 일에 모두의 명예가 걸렸어요.”

“알겠어요.”


어느덧 이쪽으로 와서 다소 어색한 웃음으로 인영을 배웅하는 나나가 충실히 대답했다. 무엇에 충성하는 것인지 모르는 도진만이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양옆을 오갔다. “그럼 이만.”이라는 퍽 그녀다운 짧은 인사를 마친 후 인영이 사라지자, 도진이 염려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나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예요?”

“별거 아냐.”

“별거 아닌 게 아닌 것 같던데요.”

“진짜 별거 아냐.”


재촉할 생각은 없었으나 눈썹이 꿈틀거리는 거을 막을 수 없었던 도진의 얼굴에 대고 나나가 자백하듯이 어렵게 말을 덧붙인다.


“돌아가려고 해.”


두 팔로 제 허리춤을 찌르며 도진이 인상을 구겼다.


“돌아간다고요? 이런 상황에서?”

“응. 그래야 할 것 같아. 물론 돌아올 거야.”


돌아가고 돌아온다. 이 말로 인해서 나나는 자신이 세계와 월계 둘 중 어느 곳에 속하는지 더욱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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