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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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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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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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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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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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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229화

DUMMY

달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으로 보이니 그럴싸한 주장이다. 어불성설이 곧 어불성설이 되는 세계라니, 기가 차기까지 하다. 재채기가 문득 터졌다. 분수대에 이르러서였다. 주변을 빙그르르 돌아볼 여유를 허락지 않은 그 요란스러운 숨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자동으로 숙였는데, 마치 뒤에서 절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설마!”


설마였다. 그건 발자국 소리였다. 이리 바로 조우할 줄 알았더라면 빵집에는 따라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고 조금 후회하고 말았다. 나나는 고개를 들수록 설마의 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쉽게 짐작했다. 그런데 설마라니. 그럴 리 없을 때야 쓸 수 있는 말이 설마 아니었던가. 확실히 어불성설이 어불성설이 되고야 마는 세상인 것 같다고 코를 훌쩍거리며 나나가 생각했다.


“그 친구가 그랬겠네. 그렇지?”


남자의 손에는 피지 안은 우산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빵집 아가씨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녀에 대한 인상이 결과적으로 썩 좋지는 않았다만 거짓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맞아요.”

“대단하다고 해야겠어. 나의 친구를 너의 친구로 만들어버리다니.”


그 친구, 이 친구, 저 친구······. 화가와 사장 간의 암호거나 그들의 우정을 대표하기 좋을 법한 표현이다. 거리야 어떻든 이 모든 지시어가 전부 한 사람을 가리킨다니, 그렇게 간단히 둘 중 하나를 빼돌릴 수 있을 리가 없다. 남자의 농담은 그의 진담만큼이자 짓궂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요.”


나나가 물었다. 우선은 순서를 정해야 한다. 그것이 방금 막 정한 순서 중의 첫 번째다.


“고작 한 가지만?”


남자는 비아냥거리듯이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나나에게 그림을 팔아버린 이후 잠시 겪었던 수난 때를 제외하면 항상 유지하던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 그대로다. 빗물로 흐트러진 계절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다.


“제가 여기까지 쫓아와서 고작 한 가지로만 끝낼 거 같아요?”

“그렇진 않겠지, 참 그림은 잘 그렸나? 그게 궁금하긴 하더라고. 아, 그래! 그 이야기를 좀 들어야겠어. 저기 저 집 어때? 어제 내가 저기서 좀 도움을 받았었거든.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건 불필요한 친절이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나나는 제 의중이 꿰뚫린 것처럼 놀라고 말았다. 남자도 빵집에 대해서는 자신과 같은 의견을 보이고 있던 것이다. 의식이 가는 길을 따라 시간이 의심도 하지 않고 흘러가자 남자는 어느덧 그림 이야기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그림을 다 그려서 이렇게까지 나를 쫓아온 거겠지? 그림은 어딨어?”

“······그림은 당연히 두고 왔죠. 당장에 급한 것도 아닌데 거추장스럽게 들고 여기까지 와요?”

“그거 좀 실망인데. 거추장스러운 건 그런 생각이지, 그림이 아니야. 사람한텐 생각만이 거추장스러운 거거든. 그러니까 12성인 중에서도 철학을 다루는 사람 하나 없는 거야. 인간은 늘 감정에 의해서만 지배를 받거든. 그런 쓸모없는 생각에 그림을 그냥 두고 오다니. 모르긴 몰라도 네 그림이 불쌍한 처지인 건 알겠어.”

“말을 참 함부로 하시는 건 여기서도 똑같네요.”


남자는 대답 대신에 어깨를 들먹였다. 무죄를 주장하며 우쭐대는 태도다.


“어디였지?” 나나는 화가를 무시하며 돌연히 말머리를 돌렸다. “지난번 그림이요. 그 작품 말고도 더 많이 있겠지만 아무튼 그걸 미술관에서, 명월미술관에서 전시할 거라면서요? 그림을 다 그렸다고 알리러 가려다가 괜히 저까지 말려들고 말았어요.”


역시나 사과의 한마디는커녕 미안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예상에 능란히 걸맞은 반응이었다. 이미 자신의 의지에 따라 곁에서 떠나보낸 그림을 태연하게 내놓으라고 했던 자에게서는 염치라는 걸 기대할 수 없다. 또 새롭게 무언가를 내놓으라고 하지 않는다면 다행일 것이다.


“그래? 영광이었겠네.”

“영광이라고요?”

“나는 조수 같은 걸 전혀 두지 않거든. 그런데 네가 그렇게 얼씬거린다면 내 조수처럼 보였을 거 아니야. 나름대로 이득을 챙겼겠어.”

“이득은 무슨! 손해만 보고 있다니까요?”


주머니에서 손을 뺀 남자는 대화가 곧 지루해졌는지 대충 귀를 파기 시작했다. 어느새 다리도 삐딱하게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렇게 건성으로 존재하는 자에게 일정한 의협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일부를 희생해야만 하는 약속 같은 게 있으리라고 좀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 그건 유감이네. 그래도 네가 그러고 싶다면, 내 조수라고 말하고 다녀도 좋아. 어차피 난 앞으로도 두지 않을 작정이라서 네가 그런 거짓말을 하고 다녀도 전혀 곤란하지 않거든. 좋을 대로 해.”

“그게 논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전 조수로 오해를 받은 적이 전혀 없거든요.”

“그래? 그럼 뭔데?”


괜한 말을 꺼낸 것 같다. 이 남자와 자신의 사이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를 찾게 될 것이라고 믿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그런데 저쪽에서는 이제야 대화에 흥미를 붙인 듯하니 곤란하기만 하다. 그러니 저 흥미를 오래 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모호하게 말하도록 하자.


“그냥······ 사적으로 아는 사이인 줄 알더라고요.”

“사적으로? 그랬단 말이지. 다들 또 쓸데없는 상상들을 하고 있군. 시간이 흘러도 변하는 게 하나 없다니까.”


단번에 그 의미를 파악한 남자가 짜증을 부리며 오안 광장을 둘러본다. 다섯 개의 눈이 어디에 있는지 탐색하는 것 같다.


“당연히 아니라고 했겠지? 난 그런 거로 곤란해지는 거 싫어.”

“그럼요 미쳤다고······!”


점점 솟구치는 화에 남자는 나나의 대답을 도중에 잘랐다.


“다들 내가 아주 더러운 인생을 살고 있는 줄 알거든. 이른 성공을 어떻게든 과시하고 싶어서 일부러 광기에 대한 광기를 고집한다고 믿는 놈들도 있지. 차라리 그게 나아. 순수하게 미치는 게 낫지, 그건 약도 뭔지 모를 테니까. 그런데 꼭 내가 무언가에 미쳤다고 떠드는 인간들도 나타나기 마련이야. 난 여자는 그림 속에서나 보면 족해. 모든 여자가 기분에 따라 변덕만 부리는 족속이라는 이유로 그런 건 아니니까 그런 무서운 표정을 짓지 말아줄래?”

“그럼 무슨 이유인데요? 저도 오해를 받아서 굉장히, 그것도 심히 불쾌하긴 했지만 그 일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 이상의 불쾌감을 감출 수가 없네요.”

“거봐, 너도 지금 변덕을 부리고 있지? 이런데 내가 어떻게 그런 사생활을 가질 수가 있겠어.”

“그건 모든 인간이라면 그렇겠죠. 변덕이라면 당신도 만만치 않잖아요.”


남자가 파안대소하며 나나의 얼굴을 요목조목 살핀다. 눈꼬리의 미세한 움직임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는 듯한 탐욕스러운 눈길이다.


“그런가? 하긴 모든 인간이라면 그렇지. 그림 속의 인간들도 말이야. 인간이 만든 인간도······ 변덕을 부리지. 그것도 아주.”

“그림 속의 인간들도 변덕을 부린다고요?”

“그래. 변덕을 부리지 않는 게 그림 속 인간들의 유일한 변덕이지. 잠깐만,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디라도 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때? 오늘은 꽤 입담이 살아 있구나.”


길에서 마주친 주인이 있는 개에게 무책임한 재롱을 떠는 것처럼 남자가 웃어 보였다. 주인의 것이 아니라면 그저 개에게는 인간이 해코지를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눈치다. 아니, 무엇보다 나는 개가 아니라 인간이지 않던가. 그렇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나나의 눈썹결이 흐트러졌고 이어 전체적으로 파도를 치듯이 들썩거렸다.


“싫어요. 여기에서 이야기해야겠어요.”

“왜? 굳이?”

“그냥 여기가 좋을 거 같아요. 이야기가 옆길로 안 샜으면 하거든요.”

“그렇다면 걷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네가 말한 대로 만약 이야기에 길이 있다면 말이지.”


은근슬쩍 소요(逍遙)를 권유하며 남자가 나나의 근처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점점 정신이 산만해진다. 어떻게든 집중하기 위해 나나는 눈을 찡그렸다. 덕분에 남자의 모습이 잠시 흐릿해졌다.


“그것보다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야겠어요.”

“하던 이야기?”

“네! 하던 이야기 말이에요. 그러니까······ 뭐였냐면······ 그래요! 어떤 여자를 보러 온 거잖아요. 서점에서 다 듣고 왔어요. 미술관에는 말하지 않았고요. 맞죠? 그런데 되게 희한하네요. 방금 하신 말과는 전혀 다르잖아요.”


남자가 나나의 주위를 떠돌다가 정확히 그녀의 등뒤에서 멈추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에게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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