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2-8장: 정치는 언제나 어렵다.
이 작품은 트립물도 아니고 환생물도 아닙니다.
'하는 수가 없구나. 국내성을 북경으로 삼는 것은 포기해야되겠어.'
대조영은 방어하기 좋다는 지리적 조건과 함께 전조 고씨고려 시절 유리명왕 시절부터 광개토태왕 시절까지 약 400년간 도읍으로 있었던 국내성으로 북경으로 삼지 않겠다고 신료들 앞에 말하였다.
그 대신에······.
"그래도 국내성이 아국의 북방 전선을 담당하는 요새들 중 하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소. 게다가 역적 연씨가 고려를 지배하던 시절에 국내성은 큰 타격을 입었었고, 아직까지 그 타격이 남아있어 방치된 상황이오. 적어도 국내성을 복구해야하지 않겠소이까?"
역적 연씨의 정권과의 싸움에서 국내성 역시 피해를 면치 못했다.
그 뿐만 아니라 국내성은 역적들의 기반이 되었다는 이유로 대중상 시절에 본보기로서 파괴되었다.
"하오나 국내성은 선왕 께옵서······?"
"부왕께서 본보기로 파괴했다는 것은 짐이 어찌 모를 수가 있겠소. 그러나 이제는 본보기를 보일대로 보였으니 슬슬 복구해도 괜찮을 것이외다. 물론 국내성이 역적 연씨의 기반이 되었던 땅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으니 북경으로 삼지 않는 것이오. 아시겠소이까?"
태왕의 그 말에 신료들의 반응은 "어쩔 수 없다."거나 혹은 "그정도 까지라면야."였다고 한다.
아무튼간에 대씨고려는 국내성을 대신해서 새로이 고려의 북쪽 수도가 되어줄 지역을 찾을 수 밖에 없었는데······.
* * *
"여봐라, 가서 대고려 전역이 그려진 지도를 가지고 오라!"
"예, 폐하!"
이윽고 대조영과 조정 신료들은 북경이 될만한 지역을 좀더 자세히 찾아보고 알아보기 위해서 고려의 전역이 그려진 지도를 탁자 위에다 펼치면서까지 의논에 들어갔다.
"막힐주에 위치한 이곳은 어떻습니까?"
"거기도 북쪽이기는 하지만 너무 춥지 않겠소?"
"아, 그러면 중상주에 있는 이곳은 어떠신지요?"
"흐음?!"
신료들이 지도를 통해 가리킨 중상주에 어느 한 지역이 대조영의 눈에 들어오자, 그는 신료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곳을 가리켰는지 바로 알 수가 있었다.
'속말말갈들이 주로 많이 살던 곳을 가리킨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신료들이 나에게 충성심을 보이기 위함이군.'
대씨고려의 행정구역 중 하나인 중상주는 고씨고려 시절부터 속말말갈들이 주로 거주하던 곳이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구려화된 속말말갈'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었고, 이곳은 대씨고려의 태조 대중상과 지금의 태왕 대조영이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대조영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에 자신이 태어난 지역 일대를 중상주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당연하게도 자기 아버지 이름에서 따온 주(州)였음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홀한하(忽汗河)일대에 새로이 도시를 건설하고 더 나아가 그곳을 북쪽 수도로 정하자라?"
"예, 그러하옵니다. 폐하!"
신료들의 그 말에 대조영은 생각했다.
'하긴 적어도 중상주 일대는 짐의 고향이기도 하니 그쪽을 재개발한다면 나쁘지 않겠지. 게다가 재개발해서 그쪽 지역을 발전시킨다면 고향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테니 괜찮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과 동시에 대조영은 홀한하 일대에서 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짜라고 하였고, 이 계획을 북경용천부(北京龍泉府) 건설 계획이라고 부른다.
* * *
"자, 이제 계획은 준비가 다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행동으로 옮기면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대조영의 선언과 함께 대씨고려는 5경 체제 확립을 위하여 소위 '건설 BOOM!'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물론 평양을 제외한 나머지 4개 수도를 동시다발적으로 재개발한 것은 아니었고, 1개 수도가 재개발 완료되면 그 이후에 몇년 간 쉰 이후에 다른 1개 수도를 재개발하는 형태로 계획이 진행되었다.
"우선 재개발 혹은 건설이 시급한 곳부터 손을 댄다. 공부에서는 우선적으로 재개발 혹은 건설이 시급한 곳이 어디인지 정하라!"
"예, 폐하! 이미 공부에서는 홀한하 일대를 대대적으로 재개발 혹은 건설이 시급한 것으로 아뢰오!"
"그렇다면 그곳부터 손을 대도록 한다!"
이리하여 21세기로 치면 목단강 일대에서 도시 건설 계획이 진행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북경용천부 건설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 * *
대씨고려가 내부적으로 대대적인 개혁과 재개발 그리고 건설에 집중하는동안에 바다 건너에 위치한 부상열도에서 세워진 김씨부여는 어느덧 나라가 세워진지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다만 그 수십년의 세월 속에서 조금 불상사도 벌어졌으니······.
"""아이고~! 아이고~!"""
"어리신 나이에 폐하께서 돌아가시다니!"
바로 김씨부여의 2대 군주 김이홍(金理洪)이 10대 중후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폐하께서는 후사조차 남기시지 못하였거늘!"
"그렇다면 결국 우리들은 왕제(王帝)분이신 김융기(金隆基) 공을 대부여국의 국왕으로 올려야할 것이오."
"어서 속히 태후 폐하께 가서 왕제 전하를 국왕으로 옹립할 것을 요청해야하오이다."
이에 김씨부여의 조정 대신들은 일제히 태후가 머무는 곳으로 찾아가 일제히 김융기를 3대 국왕으로 즉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 또한 대신들의 뜻을 모르지 않은 법이외다. 하지만 나의 둘째 아들 융기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하였소. 이는 성인이 될때까지는 내가 수렴첨정을 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외다."
여담이지만 지금 김씨부여의 태후 부여씨는 이미 김씨부여의 2대 국왕인 김이홍이 즉위했을 때에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한번 수렴첨정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 태후의 권력 혹은 권위가 강해지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로 인하여 몇몇 뜻 있는 신료들은 태후가 수렴첨정을 전혀 그만두지 않을까봐 무척이나 걱정하여 김이홍이 어른이되자마자 태후 부여씨에게 이만 수렴첨정을 그만둘 것을 권하였다고 한다.
물론 태후 부여씨도 뜻 있는 신료들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있었기 때문에 수렴첨정을 하는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이게 웬걸?
세상일이라는 것은 역시 알 수가 없다는 듯이 김씨부여의 2대 국왕 김이홍은 우리가 살던 세상의 역사보다 오래 살기는 했지만 결국 수년 이상 더 살았을 뿐이지 요절한다는 운명만큼은 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뭐, 나한테는 잘된일이지.'
하지만 태후 부여씨는 이와 같은 상황을 속으로 무척이나 반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 * *
'물증은 없지만 내 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부여융 숙부의 남은 가족들이 아닌 실은 내 남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자꾸 해보고는 한다.'
김씨부여의 1대 국왕 김정명의 아내가 된 부여풍의 딸 태후 부여씨는 지금도 자신의 아버지와 오라비를 죽인 배후는 부여융의 남은 가족들이 아닌 자신의 남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나를 사랑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렇지만 김정명이 태후 부여씨를 사랑한 것도 사실이었고, 그와의 사이에서 자녀들도 얻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증오하기에는 그녀의 마음은 복잡해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내가 지금 해야될 것은 우선 이 나라를 지키는 것! 그리고 두번째로는 이 나라가 정진정명 백제의 후계국임을 입증해보이는 것이구나."
태후 부여씨는 김씨부여가 엄연히 백제를 계승했다고 믿어의심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씨고려에서 대중상이 죽고 대조영이 즉위했을 때를 노려서 우선 조문사절단을 보내서 정식국호를 인정받으려고 시도를 해본적이 있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정식국호는 인정받는데는 실패하였기에, 이로 인하여 김씨부여의 조정은 정신적으로 제법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네 이놈! 감히 말갈 오랑캐 주제에! 부여의 후예 운운을 해?!!"
"태, 태후 폐하!"
"이는 말갈국이 우릴 희롱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지만 태후 부여씨는 이러한 대조영의 행보를 잘 이용하여 오히려 김씨부여 조정 내부의 정신적인 혼란을 극복하는데 이용해먹는 것으로 오히려 왕실의 권위를 강화시켰다.
"그대들은 잊었소?! 말갈이 우리들의 고토를 빼앗았다는 것을!! 절대로 저들의 말솜씨에 넘어가서는 아니되오!!"
태후 부여씨는 신료들에게 대씨고려를 '말갈국'이라고 호칭하면서 내부적으로 단결을 꾀하였다.
그러면서 대씨고려가 옛 백제와 신라땅을 지배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우리가 이토록 말갈국과 말갈태왕에게 모욕을 당하는 이유는 우리들이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외다."
"태후 폐하······!"
"우리 대부여국은 강해져야만 하오!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서 말이외다!!"
* * *
다시 지금 시점으로 돌아와서······.
"우리 대부여국은 강해져야만 한다.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체제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 실감이 되는구나!"
태후 부여씨는 자신의 둘째 아들 김융기의 즉위식을 끝마치고 난 이후에 수렴첨정에 나섰다.
"우선은 내 아들 융기를 '신라인'이나 '가야인'이 아닌 스스로가 '백제인' 혹은 '백제의 후예'로 인식시키는 공부를 시켜야 되겠구나."
태후 부여씨가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이러한 공부를 시키는 이유는 자신의 남편 김정명에 대한 복수의 일종이라고 볼 수가 있겠다.
'당신은 비록 나의 남편이었으나, 스스로가 '신라인'이라고 인식하였고, 은근슬쩍 신라인을 많이 중용했지. 나는 그걸 볼때마다 마음이 답답하고 속상해하였고 말이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당신은 나를 사랑했으니 이 대부여국을 망가뜨릴 생각은 없어요. 그 대신에 대부여국의 모든 백성들은 이제부터 자기자신이 '신라인' 혹은 '신라의 후예'라고 인식하는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 첫번째 시작으로 나와 당신의 둘째아들을 '신라인'이 아닌 '백제인'으로 만들테니 말입니다!'
그러면서 태후 부여씨는 보다 넓게 김씨부여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스스로가 백제인 혹은 백제의 후예로 인식시킬 수가 있는지 곰곰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절이라도 지어야 하나? 아니 그보다도 현재 우리 부여가 있는 이곳 부상열도에서는 백제계 뿐만 아니라 신라계와 가야계 그리고 기존 토착민들이라고 할 수가 있는 대화계도 있으니······."
그러나 그녀는 고민하는 와중에 부여의 민족분포도가 다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우선 그들 모두가 스스로가 백제인 혹은 백제의 후예라고 인식하기 이전에 통합부터 해야한다고 판단을 내렸다.
"옛 부터 불교만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불교의 힘만으로 과연 모든 이들을 대부여국의 백성으로 통합할 수가 있을까?"
그녀는 종교가 가진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삼국시대에서 불교와 같은 종교를 통해서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고 더 나아가 국가내부의 통합도를 올리기는 했으나, 종교는 사회구조를 정당화 하는 특징으로 인하여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상한 사회구조를 정당화하게 될 경우 백성들의 불만이 쌓일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시대 배경은 7세기 중후반 부터 시작하며,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가 승리하는 것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역사를 걸어가게 되는 평행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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