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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현 님의 서재입니다.

무한 회귀 게임 속 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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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현
작품등록일 :
2024.07.20 15:35
최근연재일 :
2024.08.03 16:13
연재수 :
1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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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추천수 :
169
글자수 :
11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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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2 18:00
조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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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자
13쪽

오지랖 소드마스터(1)

DUMMY

*



“음.”


에이드린 왕국의 왕세자 앨버트가 왕궁을 떠난 이후, 차기 왕세자 후보 중 한 명이 된 알렉스는 팔짱을 끼고서 생각에 잠겼다.


“이해가 안 가네.”


형인 앨버트의 갑작스러운 왕세자 포기 선언은 몇 달이 지난 지금 생각해 봐도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많은 이들 역시 앨버트의 행보를 이해하지 못했고, 사건의 근원인 그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냥 귀찮아서, 라고.


반면 알렉스는 앨버트에게 접근하지 않고 조용히 주변의 반응을 지켜봤고, 앨버트가 떠나기 직전 잠깐 얼굴을 비추기만 했다.

알렉스 역시 자세한 사정을 알아내지 못했기에 앨버트가 영주로 간 실리어드에 첩자를 보냈지만, 알아낸 정보라고는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귀찮다라는 정도 말고는 특이사항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인간이 영주로서의 역할은 그럭저럭 해내고 있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앨버트에 대한 의구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다.


“그럴 거면 형님은 왜 왕세자를 관둔 거지?”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앨버트의 행보가 예측이 안 간다는 점에서 의아함을 넘어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만약 변덕을 부려 다시 왕세자가 되고 싶다고 돌아온다면, 왕이 허락하냐 마냐를 떠나 왕궁은 다시 혼란에 빠질 터.

알렉스가 원하는 구도는 아니었다.


“마리나라면 제대로 해줄 줄 알았는데······ 하필이면 형에게 들키다니······.”


이전에 몰래 보냈던 첩자는 앨버트에게 정체가 들통나고, ‘첩자 노릇 하려면 들키지 않게 제대로 해라’라는 충고 아닌 충고까지 듣고 복귀한 시점이 한 달 전.


고민 끝에 알렉스가 내린 결론은, 앨버트와 연이 있으면서 쉽게 쫓아낼 수 없을 위치에 있는 인물을 보내는 거였다.


“오셨군요.”


알렉스는 그의 앞에 선 백발의 남자를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각고의 노력 끝에 60대라는, 인생의 황혼기에 소드마스터라는 경지에 도달한 인물.

예전에는 정치 판도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지만, 앨버트가 왕궁을 떠난 후에는 차기 왕세자로 알렉스를 지지하는 자.


에이드린 왕가의 검술 스승이자 용맹함으로 잘 알려진 장군 펠릭스였다.


“전하께서 부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것이······.”


미소를 지었던 것도 잠시.

알렉스는 말끝을 흐리며 마른 세수를 했다.


부탁을 하려고 불렀지만, 저 노익장이 과연 의도대로 움직일지는 미지수였다.

다른 의미로 앨버트 못지않게 별난 인물이었기에.


하지만 망설일 여유가 없다는 걸 깨달은 알렉스는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왕이 먼저 ‘공식적인 첩자’를 보내기 전에, 어떻게해서든 간에 앨버트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야 했기에.


“별 것 아닙니다. 실리어드에 제 형님이 계신 건 아시죠?”



*



내가 왕궁을 떠난 이유는 간단하다.


가만히 있어도, 가만히 있지 않아도 게임 스토리를 멋대로 진행해 버리는 이벤트가 부지기수로 발생하는 끔찍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권력 분쟁에 휘말려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관계조율을 해야 하는 것에 질색이 난 것도 크다.


문제는 그게 싫어서 왕궁을 떠났다고 해서, 날 찾아오는 이들의 접근 자체를 원천봉쇄하진 못한다.

게임 속 세상이라는 망할 세계가 지닌 강제성 때문이다.

게임을 시작할 때 무조건 나와 같은 편이 되는 스칼렛이 대표적인 예다.

다행히도 아카데미를 졸업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테니, 그 애에 대해서는 우선 안심해도 된다.


그래서 대신 다른 캐릭터가 먼저 오는 것 같은데······.


“그 영감 오는군.”


나는 오늘 아침에 도착한 편지를 읽으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내 행동에 따라 캐릭터들과 만나는 시점이 바뀌긴 하는데, 이 인간이 이렇게나 일찍 오게 만드는 변수였었나?

난 그저 왕세자 자리가 귀찮다고 내팽개쳤을 뿐인데.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소드마스터 펠릭스.”

“네?”


펠릭스라는 이름을 들은 피터슨이 눈을 확 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서 날 멍하니 쳐다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

소드마스터야 최소한 각 나라 별로 한 명 이상은 있다는 게 게임 속 설정인데 그렇게 놀랄 일인가?


“페, 펠릭스라면 설마 전하의 검술 스승이신 펠릭스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분이 실리어드로 오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당연하죠! 다른 분도 아니라 펠릭스 님이지 않습니까? 수십 년이 넘는 기나긴 시간 동안 오직 검술 하나만 매달린 결과,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그분이 오신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죠!”


음, 다시 생각해 보니 게임 속 캐릭터라면 피터슨처럼 반응하는 게 맞다.


게임 속 세상에서 잘 싸우는 놈들은 슈퍼스타다.

현실의 한국으로 치면 유명 스포츠 스타, 격으로 따지면 많고 많은 생물 중 하필 닭을 상징으로 쓰는 영국 프로축구팀의 주전인 그 선수 정도의 인지도를 지닌 게 A등급 캐릭터 펠릭스다.


그래봤자 이번 생의 나에게는 둘째 동생인 알렉스의 파벌에 속한 인물에 불과하다.


“아.”


그렇군.

펠릭스가 왜 날 찾아왔는지 짐작이 간다.

알렉스가 보냈던 첩자가 나에게 들켜서, 다급하게 보낸 게 그 영감인 것 같다.

대놓고 날 관찰해도 쫓아내기 힘든 위치이면서, 검술에 한해 나와는 스승과 제자 관계이기도 하고 말이지.


하지만 알렉스가 보낸 첩자를 일부러 찾아낸 게 아니라, 우연히 발견한 거다.

내 집무실에서 대놓고 서류를 뒤지는 걸 목격한 이상 그냥 놔둘 수 없잖아.

요즘 첩자들은 왜 이리 허술한지 원.


아니, 사실 그렇게까지 부실한 애는 아니다.

B등급인 엘릭과 엘레나 남매의 눈을 속일 정도의 은신 능력을 지닌 A등급 캐릭터이니까.

거기에 더해 회귀를 반복할 때마다 매번 다른 얼굴로 나타난 탓에 오죽하면 내가 얼굴을 기억 못 할 정도다.


아마 첩자라는 설정에 맞추려고 매번 얼굴이 랜덤하게 설정되는 거 같은데, 진짜 이 망할 게임의 제작자들은 변태가 분명하다.

요상한 부분에 디테일을 엄청 신경 쓴단 말이지.

하는 김에 트루 엔딩에 쉽게 도달할 수 있도록 단서라도 많이 넣어놨으면 더 좋았을 텐데.


“펠릭스라······.”


게임에 빙의한 직후에는 검 한 번 쥐어본 적 없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스승.

이후 회귀를 반복하면서 실력이 조금씩 늘어난 나에게 감탄을 아끼지 않았던 노장.

10번째 회귀부터인가, 대충 그 이후부터는 실력으로 나에게 뒤쳐져 검술 스승조차 되지 못한 영감과 겪었던 일들을 뇌리에 떠올려 봤다.


‘하하하!’

‘일어나십시오. 검술 연습 하셔야죠.’


회귀를 경험하기 전, 빙의한 직후 가장 많이 들은 말을 떠올리자마자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냥 왕족도 아닌 왕세자가 땀으로 전신을 샤워 중인데 쉬라는 말, 좀 해줄 것이지.


‘이렇게나 빠르게 성장하시다니! 왕국 최고의 검사가 되실 거라 확신합니다!’


되긴 했지.

한두 번도 아니고 수십 번 넘게, 질리도록.

그런데 그래봤자 검술 하나만 갈고 닦아서는 세상 구하기에는 너무 어렵더라.


‘전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법사라니요! 쉬운 길을 놔두고 왜 어려운 길을 걸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영감 말대로 검술로만 트루 엔딩 볼 수 있었으면 머리 쥐어싸매면서 마법 같은 거 안 익혔다고.

날 설득하고 싶으면 영감이 검술만으로 세상을 먼저 구해보던가.


그리고 검 익히는 게 엄청 힘들었는데 쉽긴 뭐가 쉬워?

21세기 한국의 나약한 30대 회사원이었던 나에겐 너무나 벅찼다고.


‘검과 마법, 서로 정반대에 있는 영역의 힘을 이렇게나 훌륭하게 융합하다니······ 이 늙은이는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그런데 검과 마법을 융합시킨 마법검을 15번째 회귀했을 때 보여주니 태도가 싹 바뀌었다.

예전 생에는 검술만 익혀도 된다고 했으면서, 왜 이렇게 감정변화가 심한지 원.

갱년기는 한 참 전에 지났을 나이이면서 말이지.


‘크흑······ 전장에서의 최후라면······ 원하던 바다!’


아니, 죽으면 다 소용없는데 무슨 소리야.

그렇다고 저렇게 나서지 말라고 말리는 거 역시 소용없다.

저 영감이 저렇게 비장한 최후를 맞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니까.

처음에야 참 애달프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수십 번 넘게 반복되면 무덤덤해지기 마련이다.


‘전하······ 이 늙은이는 먼저 가겠습니다······.’


아니, 먼저 가지 말라고.

트루 엔딩에 도달하기 위해 진행해야 할 스토리가 아직 한참 남았는데, A등급 소드마스터인 영감이 벌써 리타이어해버리면 곤란하다고.


‘하하하!’


어우, 내 회상 속에서 그만 좀 웃으라고.

그 웃음을 듣기만 해도 나는 반사적으로 한숨만 나온다고.


“피곤해지겠는데.”


회귀를 반복하면서 그 영감과 함께했던 시간 중, 극히 일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가 쭉 빨린다.

뭐, 잠시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 영감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다.


“혹시 어디 편찮으신 겁니까?”

“내가 아니라 다른 애들이.”

“네?”

“곧 있으면 알게 될 거야.”


그러니 그 영감이 오면 고생할 인간들은 내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



오늘은 소드마스터 펠릭스가 날 만나러 저택으로 오는 날.


“많이들 왔네.”


내가 영주로 부임해 도착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저택 입구에 모여서 장사진을 이뤘다.

저택의 고용인들 전원을 포함해 성의 주민들, 거기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모인, 그러나 진정한 목적은 펠릭스를 구경하기 위해 온 기사들 전원과 병사들까지.


뭐,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기사와 병사들이 저러는 거야 이해는 간다.

기사로서, 그리고 병사로서 검술에 극에 달한 그 영감을 안 보고는 못 배기겠지.

그런데 정확히는 진정한 ‘극’까지는 아니라고.

극은 S등급에 도달한 나 같은 인간에게나 해당하는 거야.


혹은 검성이라는 칭호를 지닌 여걸 클로디아이거나.

유럽을 베이스로 한 세계관에 한자로 칭호가 붙는 게 요상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게 이치에 안 맞는 부분이 넘쳐나는 곳이 바로 게임 세상이니까.


“오네.”


펠릭스가 등장할 때 나오는 전용 BGM이 멀리서 들려온다.

타악기 위주로 구성된, 웅장하고 장렬한 분위기의 BGM을 듣는 순간 절로 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저 영감. 처음 만날 때는 군악대를 대동해 전용 BGM을 연주시키면서 오는 건 여전하다.


“전하! 참으로 오래간만입니다!”

“네, 오래간만이로군요.”


아니, 하도 만나서 지겹다.

영감과 함께 지낸 시간이야 백 년 단위로 세야 하고, 거쳐온 전장은 수두룩하니까.


하지만 지금도 연주 중인 웅장한 전용 BGM과 게임사에서 기용한 성우 특유의 목소리가 결합되다 보니 자꾸 엉뚱한 장면이 떠오른다.

탱크를 몰고 반란군의 대가리를 깨버리겠다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 말이다.

그 기세로 최종보스의 대가리를 깨부술 수 있었다면 영감과의 만남을 진심으로 좋아했을 텐데, 아쉽다.


“여전히 건장하시군요.”


캐릭터 프로필에 기록된 신장은 190㎝.

한국 기준으로도, 그리고 게임 속 세상 기준으로도 장신에 속하는 그의 건장한 체격을 본 병사들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래봤자 내 눈에는 상대하기 귀찮은 영감에 불과하다.


“오래간만에 저와 1대 1, 대련 어떻습니까?”


어우, 저 망할 영감.

오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또 대련 타령이야.


“아쉽게도 며칠 전에 허리를 다쳐서 말입니다.”


물론 내 허리는 멀쩡하다.


허리의 건강이야말로 삶의 질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

일하는 틈틈이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건강 관리 중인 나는 허리를 망가트리는 운동만큼은 철저히 피하는 중이다.

수시로 척추의 요정을 떠올리며 허리 펴는 것도 까먹지 않고 있고.


“저런! 사제의 치유를 받아서 빨리 회복하시지 않고 왜······.”

“고작 저 한 명 때문에 신의 뜻을 따르는 분들을 번거롭게 만들 수는 없죠. 일주일 정도 쉬면 나아질 겁니다.”


물론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저 영감이 얼마나 머무느냐에 따라 더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다.


“허허, 그거 참 아쉽군요, 그나저나······.”


펠릭스의 아쉬워하는 눈빛도 잠시.

주변에 모여든 기사와 병사들을 빠르게 훑어본 펠릭스가 짧게 자른 턱수염을 오른손으로 매만지며 싱긋 웃었다.


저 영감이 무슨 생각하는지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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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랖 소드마스터(1) 24.08.02 50 6 13쪽
17 고생은 너희들이 해야지(2) 24.08.01 60 6 15쪽
16 고생은 너희들이 해야지(1) 24.07.31 67 7 15쪽
15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5) 24.07.30 76 8 12쪽
14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4) 24.07.30 67 6 12쪽
13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3) 24.07.29 79 6 13쪽
12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2) 24.07.28 75 7 13쪽
11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1) +1 24.07.27 95 8 13쪽
10 DLC 출시는 아직 안 되었을 텐데?(4) 24.07.26 103 9 13쪽
9 DLC 출시는 아직 안 되었을 텐데?(3) 24.07.26 101 12 12쪽
8 DLC 출시는 아직 안 되었을 텐데?(2) 24.07.25 105 11 13쪽
7 DLC 출시는 아직 안 되었을 텐데?(1) 24.07.24 115 11 15쪽
6 처음부터 놀 수만은 없지(3) 24.07.23 126 10 13쪽
5 처음부터 놀 수만은 없지(2) +1 24.07.22 139 10 13쪽
4 처음부터 놀 수만은 없지(1) 24.07.21 158 10 13쪽
3 왕위를 포기하는 중입니다(2) 24.07.20 163 12 13쪽
2 왕위를 포기하는 중입니다(1) 24.07.20 178 13 14쪽
1 프롤로그 24.07.20 194 13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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