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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현 님의 서재입니다.

무한 회귀 게임 속 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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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현
작품등록일 :
2024.07.20 15:35
최근연재일 :
2024.08.03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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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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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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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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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DLC 출시는 아직 안 되었을 텐데?(2)

DUMMY

*



부인의 죽음 이후 잠적한 흡혈귀 로베르토는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현재, 고인이 된 부인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부인의 고향을 방문했다.

흡혈귀임을 숨기고서 몰래 찾아간 부인의 고향은 수백 년 전의 번화했던 도시가 아니라 한적한 시골 마을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라는 게 로베르토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 설명이다.


“정말로 허망했지. 부인과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안 남아있더군. 차라리 여길 오지 않고 계속 잠적하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네.”

“그래도 900년 가까이 혼자 지내면 지겨울만 하죠. 천 년 이상은 기본으로 사는 엘프들도 100년에 한 번은 세상 구경하러 타종족이 사는 지역으로 나오잖아요.”

“혼자 지낸다는 게 솔직히 많이 힘들더군. 그래서 온갖 잡다한 일에 몰두 해봤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어.”

“사자부활마법, 그거 부작용이 너무 커서 익혀봤자 소용없잖아요. 네크로맨서 되는 것도 썩 좋은 선택은 아니고. 그래도 혈마법은 흡혈귀만 쓸 수 있으니 익혀둬서 나쁘진 않죠.”

“그래, 맞는 말이야. 나는 그걸 깨닫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네.”


평범한 인간은 절대 불가능한, 장생종인 엘프나 겪었을 기나긴 시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로베르토는 담담한 어조로 읊었다.

문제는 당사자가 말하는 내용을 거의 다 알고 있는 내 귀에는 잠이 솔솔 오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여기로 오기까지 흡혈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네. 아마 석 달인가, 그 정도 되었을 거야. 그런데 더 이상 버티기 힘들더군. 그렇다고 인간의 피를 강탈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인간으로 치면 공복으로 3일 동안 버틴 셈이겠군요. 그 나이에 혈당 떨어지면 큰일 날 텐데, 어쩔 수 없었겠군요.”

“단 음식을 많이 먹으면 피까지 달아진다는 자네만의 그 표현은 다시 들어도 독특하군.”

“아무튼 뭐, 어떤 사정인지 잘 알았습니다.”


왜 흡혈을 했는지에 대한 로베르토의 변명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전 생에서 들었던 것과는 내용이 살짝 달라졌지만, 이건 당연한 거다.


헤아리기를 포기할 정도로 회귀를 반복하는 동안, 나는 하나의 법칙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루트로 스토리를 전개하든 상관없이, 등장인물에 대한 스토리의 큰 축은 바뀌지 않고 세세한 부분만 바뀐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야 이 세상의 근본은 게임이고, 그 게임의 스토리를 인간이 짰으니 패턴의 변화가 무궁무진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전하, 커피 리필해드리겠습니다.”


피터슨이 커피 주전자를 기울여 내 커피잔에 커피를 채우더니, 로베르토 옆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원래대로라면 커피는 안 마시지만, 지금은 카페인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다.

로베르토를 이렇게나 일찍 만난 건 처음이니 다음번 회귀할 때 참고용으로라도 이야기를 듣긴 해야 하니까.


“로베르토 님께서도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음, 부탁하겠네.”


나야 로베르토를 하도 봐서 익숙한 것도 있고, 상대가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 상황이니 어느 정도는 여유롭다.


반면 피터슨 입장에서는 난생 처음 보는 흡혈귀가 바로 근처에 있으니 긴장을 떨쳐내기 힘들어 보였었다.

로베르토가 리필을 처음 부탁할 때에는 주전자를 들고 있는 두 손이 사시나무 떨듯이 떤 탓에 바닥에 흘리는 커피가 더 많아서 안쓰러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자연스럽게 커피잔을 채우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


“고귀한 혈통이여, 그대는 놀라울 정도로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군.”

“지금은 관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세자였거든요. 그러다 보니 알아야 될 게 워낙 많아서 골치 아팠죠. 개인적으로 사람을 써서 알아낸 것도 있고요.”

“허나 틀린 부분도 적지 않더군.”

“그야 사람 하는 일이 다 맞을 수야 없죠.”

“그렇게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 여기로 온다는 걸 몰랐다는 걸 의외로군.”

“왕세자 관둔 이후로는 정보 수집에는 손땠거든요. 그리고 흡혈귀의 행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건 사실상 무리잖아요? 다 아시면서.”


로베르토에 대해서는 언제부터인가 정보 입수를 포기한 상태다.

그에 대해 온갖 잡다한 사항까지 알아내봤자, 결국 동료나 부하로 들이는 건 매번 실패해서다.

회귀할 때마다 조금씩 바뀌긴 해도 그와 관련된 스토리의 큰 축은 바뀌지 않는다는 점도 있고.


그런 주제에 매번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적으로 튀어나오니 참으로 골치가 아팠다.

회귀를 질리게 반복해도 대책이 안 서는 건 랜덤 이벤트라는 걸 깨닫게 해준 캐릭터이기도 하다.


솔직히 로베르토에 대한 감정을 좋냐 나쁘냐로 분류한다면 후자다.

내가 저 양반 때문에 고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지금이야 그를 마주 보고 여유롭게 하품도 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회귀를 몇 번 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진짜 벅찬 상대였다.


“왕세자를 관두었다니, 깊은 속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많이 힘들었겠군.”


그런데 로베르토는 내 표정을 다르게 해석한 것 같다.

아니, 뭐. 힘들긴 했지.

바로 내 앞에 있는 누구 때문에.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귀찮아서요. 그쪽도 괜한 일에 휘말리는 게 귀찮아서 혼자 지낸 거잖아요.”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로베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커피잔을 기울였다.


잠깐, 저 로베르토가 내 앞에서 웃는다고?

지금은 검은 눈동자이지만, 핏빛으로 물든 눈동자로 날 응시하면서 죽이려 드는 모습이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 로베르토가?


진짜 적응이 안 된다.


“나는 자네가 왕자라고 했을 때 처음에는 믿지 못했지. 왕세자였었다고 하니 더욱 그랬고. 고귀한 혈통답지 않군.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 말일세.”

“그냥 평소에 이렇게 입고 다녀서요.”

“그렇다고 해도 병사들을 한 명도 안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네. 혼자서도 날 상대할 자신이 있어서인가?”

“알아봐주니 다행이네요. 아, 그리고 병사 없이 기사들 데리고 온 건 제 신분 증명할 목적이었고요. 솔직히 지금 복장으로 혼자 마을에 들이닥쳤다면 제가 영주라는 걸 마을 사람들도 안 믿을 겁니다.”

“그건 그렇군.”


나는 목 부분이 길게 늘어진 티셔츠를 어루만지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습기 찬 동굴 안이 쌀쌀하다 보니 깔깔이 생각이 절로 난다.

겨울 오기 전에 미리 만들어 놓으라고 지시해야겠다.


“그리고 고귀한 혈통이어봤자 그쪽에 비하면 20년도 못산 핏덩어리 아닙니까? 그냥 이름으로 불러요.”

“이름? 앨버트 왕자라고 부르면 되겠나?”


저주받을 인간, 혹은 거짓된 영웅, 아니면 위선의 치정자 등등으로 불리곤 했는데.

부정적인 수식어 하나 없이 이름 뒤에 내 신분이 붙여서 담백하게 불리는 게 영 어색하다.


“맘에 안 드나?”

“아뇨. 제가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는데 맘에 들지 않을리가요.”


스토리 후반쯤에 만나면 인간혐오 스택이 최대로 쌓여서 말조차 안 통하는 상대 입에서 저렇게나 인자한 목소리가 나오는 게 적응이 안 된다.


그렇다고 이렇게 극초반에 만나길 바란 건 절대 아니다.

어차피 동료나 부하가 안 된다는 걸 질리게 반복된 회귀 속에서 확인했으니, 아예 안 만나는 게 최상이다.


그러나 이미 만나버린 이상, 해결할 건 해결하고 난 뒤 서로 좋게 헤어지는 게 내 앞에 놓인 선택지 중에 최상이겠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죠? 잠 오는 거 참기 슬슬 한계라서요.”

“본론? 아······ 이런. 인간하고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눠보는 건 진짜 오래간만이라 내 이야기만 했었군.”

“그쪽이 말 피 마시다가 말이 죽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 일에 대해서는 참 면목이 없다네.”

“면목이 있게 하면 되죠. 돈 있죠?”

“돈?”

“저에게 말 한 마리야 푼돈이지만, 여기 주민들에게는 큰 돈이거든요. 말값에 위로비 차원으로 좀 더 얹어준다면 별일 없이 끝날 겁니다.”


대수롭지 않다는 내 반응이 의외여서일까?

로베르토가 눈을 계속해서 깜박이더니 날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런데 저 양반, 돈이 있긴 하던가?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증오를 퍼부으며 덤벼든 경우가 대부분이라, 로베르토의 재정 상황이 어떤지는 나도 잘 모른다.


뭐, 돈 없다면 물리적인 수단을 써서라도 없는 돈이 생기게 만들어야겠지.


“······정말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인가? 흡혈귀가 흡혈하다가 인간들에게 들켰는데?”

“제가 명색이나마 영주이니 돈만으로 해결되게 만들어야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에게 맡기시고, 900년 전 화폐는 현재 시세로 얼마나 하는지 저는 잘 모르니 대충 보석 같은 걸로 지불하는 쪽이 편할 겁니다.”

“보석이라면 있지. 잠깐만.”


로베르토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더니 손바닥 위에 보석을 내려놨다.

손톱만한 크기의 반짝이는 보석인데······.

뭐야? 저거 다이아몬드잖아?


“돈 많으셨네. 그러면 그냥 가축 아무거나 사서 흡혈하면 되는 일 아니었습니까?”

“정말로 면목이 없네.”


하필이면 부인의 고향을 방문하던 시점에, 계속 억누르던 흡혈충동을 결국 이기지 못했다는 작위적인 흐름 때문이라고 해도 이해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뭐, 이렇게 스토리를 구성한 게임 시나리오 제작자를 탓해야겠지.

그 인간이 짠 스토리는 그럭저럭 무난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이렇게 가끔 구멍을 내놔서 게임 공식 카페에서 까이곤 했으니.


“이거라면 충분한가?”

“충분한 걸 넘어서 과분한데요. 나중에 거스름돈 받아가세요. 그건 그렇고······.”


나는 말끝을 흐리면서 다이아몬드를 하나 집어 들었다.

이거 하나라면 보상 문제야 당장 해결될지라도, 근본적인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있다.


“많이 겪어봐서 잘 알겠지만, 흡혈귀에 대한 여론이 참 안 좋거든요. 저야 흡혈귀든 아니든 상관없이 제 영지에서 사고만 치지 않으면 상관 안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거든요.”

“부정할 수는 없군.”

“여기에서 있었던 일은 없는 걸로 칠게요. 그러니 다른 영지로 떠나는 건 어떨까요?”


다른 왕국으로 떠나는 건 애초에 기대 안 했다.

가능한 한 로베르토를 실리어드에서 먼 곳으로 보내야 하고, 다시는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부인을 떠나보낸지도 어언 9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네. 이제는 내 부인이 묻힌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네.”


그래, 이런 설정이었지.


로베르토가 나를 처음 만난 시점을 기준으로, 내가 머무르는 곳이 그의 부인이 태어난 곳으로 정해진다는 고약한 설정이 이번에도 날 귀찮게 만든다.


심지어 내가 왕궁 안에 계속 머무르고 있으면 왕족 조상 중 한 명이 그의 부인이었다는 설정으로 바뀌고, 로베르토가 왕궁에 잠입하다가 들통나는 스토리로 전개되기까지 했으니까.

그런 식으로 부인의 고향에 숨어지내다가 결국 흡혈의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인간의 피를 마셔버리고 만다.


그때부터 로베르토와 인간 사이의 지독한 악연이 시작되는 거고. .


어차피 로베르토가 인간을 흡혈하는 건 피할 수 없기에 마음 같아서는 그냥 내 피 좀 주는 걸로 퉁치고 싶다.

하지만 나 혼자서 로베르토가 필요한 피를 주는 건 감당하기 힘들고, 어차피 동료가 안 되는 등장인물에게 그렇게까지 노력하고 싶진 않기도 하다.


어차피 알 건 다 알아냈으니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해야 할 때인가?

죽이는 것까지야 버거울지 몰라도 쫓아내는 거야 무난할 거다.

하지만 그렇게 한 뒤가 더 문제다.


쫓아내더라도 로베르토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이 마을로 찾아올 게 분명하고, 그럴 때마다 마을 주민들은 날 찾아와 내가 ‘또’ 해결해달라고 징징댈 게 뻔하다.

게다가 로베르토를 확실하게 죽이려면 고된 수련의 시간을······ 어림잡아 1년 정도 거쳐야 할텐데,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아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냥 저 흡혈귀가 인간 피를 빨아도 다른 말 안 나오게 하면 되겠지?

그렇다면······.


“어차피 그쪽은 인간의 피를 마실 수밖에 없을 테니, 뒷탈없이 해보는 건 어때요?”

“무슨 소리인가?”

“피 판다고요. 여기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만 팔아도 그걸로 충분할걸요?”


나 혼자가 아닌 다수에게 부담을 분산시키면 되겠지.

그것도 강제가 아닌, 피를 주는 쪽에서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유도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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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고생은 너희들이 해야지(1) 24.07.31 67 7 15쪽
15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5) 24.07.30 76 8 12쪽
14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4) 24.07.30 67 6 12쪽
13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3) 24.07.29 79 6 13쪽
12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2) 24.07.28 75 7 13쪽
11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1) +1 24.07.27 95 8 13쪽
10 DLC 출시는 아직 안 되었을 텐데?(4) 24.07.26 103 9 13쪽
9 DLC 출시는 아직 안 되었을 텐데?(3) 24.07.26 101 12 12쪽
» DLC 출시는 아직 안 되었을 텐데?(2) 24.07.25 105 11 13쪽
7 DLC 출시는 아직 안 되었을 텐데?(1) 24.07.24 115 11 15쪽
6 처음부터 놀 수만은 없지(3) 24.07.23 126 10 13쪽
5 처음부터 놀 수만은 없지(2) +1 24.07.22 139 10 13쪽
4 처음부터 놀 수만은 없지(1) 24.07.21 158 10 13쪽
3 왕위를 포기하는 중입니다(2) 24.07.20 163 12 13쪽
2 왕위를 포기하는 중입니다(1) 24.07.20 178 13 14쪽
1 프롤로그 24.07.20 194 13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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