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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현 님의 서재입니다.

무한 회귀 게임 속 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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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현
작품등록일 :
2024.07.20 15:35
최근연재일 :
2024.08.03 16:13
연재수 :
19 회
조회수 :
2,018
추천수 :
169
글자수 :
110,221

작성
24.07.2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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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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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처음부터 놀 수만은 없지(3)

DUMMY

*



성 인근에 자리 잡은 부대로 이동하면서 피터슨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전임 영주는 병사들에게 관심을 일절 두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부대에 얼굴 들이민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고.

그래서인지 나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부대는 발칵 뒤집혔다.


“전하,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음? 나보고 누구세요라고 질문한 병사 말이야?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티셔츠와 츄리닝 바지 차림을 하고서 삼선슬리퍼를 신은 나를 병사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솔직히 지금 내 차림새가 편하긴 해도 게임 속에서, 그리고 21세기 한국 기준으로도 격식 있는 복장은 절대 아니니까.


“피터슨, 저쪽으로 가는 거 맞지?”

“네!”


높으신 분이 온다는 소식에 허겁지겁 부대를 청소하느라 정신이 팔린 병사들을 둘러보며 나는 부대 안 식당으로 직행했다.


애당초 나는 권력의 맛이 어떤지 거들먹거리기 위해 방문한 건 아니다.

군생활하느라 고생이 많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기 위해서도 역시 아니고.


“심각하네.”


그리고 이렇게나 맛이 없는 점심 식사를 맛보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충성심이라는 단어가 뇌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맛인걸.”


날 위해 특식을 급히 내놓으라는 피터슨을 제지하고, 나는 부동자세로 서서 나에게 경례하는 병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병사들이 먹고 있던, 스튜 같아 보이는 무언가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말리 비틀어진 빵으로 보이는 무언가도 한 입 먹어봤지만 일그러진 내 표정을 바꾸기엔 무리다.

아니, 더 일그러지게 만들 뿐이다.


세상 어디를 가든 간에, 군대 밥이 맛없는 거야 불변의 진리.

어림잡아도 천년을 훌쩍 넘기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전장에서 보낸 나는 게임 속에서도 그 진리는 변하지 않다는 다는 걸 깨달은 지 오래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맛도 맛이지만 영양분의 부재는 용납할 수 없다.

명색이 스튜인데 입 안에서 씹히는 건더기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단백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음식이니 제대로 된 근육이 붙을 리 없고. 그렇다고 열량이 넘쳐나는 것도 아니고. 가관이네.”


나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병사들을 쓱 둘러봤다.


“너희들, 진짜 장하구나.”


이런 음식을 먹고서도 탈영하지 않고 용케 창을 들고 서 있으니 말이다.


“피터슨, 여기 애들 평소에도 이렇게 먹었어? 예산 거덜나서 이렇게 된 거야?”

“그, 그건 아닙니다. 단지 전임 영주께서······.”

“전임 영주께서가 아니라 전임 영주가.”

“네, 넵! 전임 영주가 온 이후 전쟁이나 분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군대 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했고, 그 결과······.”

“쿠데타가 안 일어난 게 용할 정도네. 내가 병사였다면 이딴 걸 먹고 살 바엔 영주 목부터 따버렸을 거야.”


예전 생의 나였다면 당장 전임 영주가 있는 곳으로 순간이동마법을 써서, 오러가 깃든 검으로 진짜 목을 따버렸을 거다.


아니, 따버렸을 게 아니라 제법 많이 땄던 것 같다.

지금이야 굳이 그러고 싶진 않다.

중요한 건 운 좋게 목이 안 따이고 떠난 전임 영주에 대한 불만을 내가 물려받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건 제대로 챙겨줘. 병사들 식비 있지? 그거 내일부터 2배로 늘려. 아니다, 넉넉하게 3배로 늘려.”

“네?”


병사들을 동정해서가 아니다.

내 지시를 받을 병사들에게 최소한의 충성심, 그리고 전투력을 기대할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물론 단순히 먹는 문제를 해결한다고 병사들이 소위 말하는 S등급의 병력으로 거듭난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병력으로서 기본은 되어야 전쟁이 터지더라도 내 뒤통수를 치지 않고, 무작정 도망치지 않고 잠시나마 적들과 맞서 싸워줄 테니까.

나야 병사들이 벌어준 시간 동안 문제를 해결하면 되는 거고.


사실 이것저것 다 따지면, 병사들뿐만 아니라 영지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잘 대해줘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하나 신경쓰다보면 편하게 산다는 이번 생의 방침에서 멀어지게 된다.


아무리 잘해주려고 노력해도 불만은 생기기 마련.

그렇다면 그 불만을 적당한 수준으로 해소하는 정도로 조절하면 된다.


“전하, 그러면 예산에 적지 않은 부담이 생길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피터슨의 우려를 해소해 줘야 하는 때다.


“무작정 식비를 늘리라는 소리는 아냐. 대신 쓸데없는 지출 줄이면 되잖아. 어디 보자······ 나 앞으로 사냥 일절 안 하니까 거기에 들어가는 경비 병사들 식비로 돌려.”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닌, 귀족들의 사냥은 고귀한 이들만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희 중 하나.

하지만 내 입장에선 솔직히 재미가 없다.


나야 직접 검을 들고 쓰러트린 몬스터들의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그런 나에게 귀족들이 즐기는 사냥은?

병사들이 알아서 들짐승들을 추적하고, 잡기 편하도록 한 곳으로 몰아주고, 그러면 귀족들은 화살 좀 쏘면서 즐거워하는 게 고작이다.

게임으로 치면 자동사냥 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게 재미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다.


“그리고 귀족들 불러서 파티할 일 없으니 파티 비용도 빼. 그리고······.”


나는 게임 속 세상을 살면서 파티를 지겹도록 많이 주최했었다.

파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동료나 부하들을 모으기 위한 이벤트의 상당수가 파티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물론 파티를 주최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알아서 내 밑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호감을 얻기 위해 쓰잘머리 없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억지로 나눠야했다.

그것도 회귀할 때마다, 매번 똑같은 패턴으로.


다행히 이번 생은 그렇게까지 하면서 날 따르는 이들을 모을 필요가 없으니, 더 이상의 파티는 나에게 필요 없다.


“참, 영주의 품위유지비로 책정된 술값 예산도 빼버려. 아까 서류에서 전임 영주가 술값으로 제법 돈을 썼다고 적혀있던데, 난 술담배 안 하거든.”

“앞서 제안하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전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아무튼 난 분명히 식비 3배라고 늘리라고 말했다?”


나는 피터슨에게 신신당부했지만, 내 명령이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우선은 두고 볼 예정이다.

어겼다는 걸 안 뒤에 조져도 충분하니까.



*



“맛은······ 뭐, 이 정도면 그럭저럭 먹을만하군.”


이제야 좀 스튜다워진, 큼지막한 건더기가 보이는 스튜를 한 숟갈 먹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건너편에 서 있는 요리사는 여전히 긴장을 떨쳐내지 못했지만, 아주 짧은 순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 분명히 봤다.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까진 없는데.

짬밥이 아무리 좋아 봤자, 짬밥은 짬밥이니까 맛에 관해서는 애초부터 큰 기대는 걸지 않았거든.


“그래도 다들 근육은 확실하게 붙은 것 같아. 이제야 좀 병사답게 보이는군.”

“전하의 배려 덕분에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사기 같은 거 안 높아도 돼. 잘 먹고 지내면 그걸로 됐어.”


식비를 늘리라는 명령을 내린 지 오늘로 한 달째고, 그동안 내가 부대 내 식당을 기습방문한 횟수는 5번이다.


첫 방문으로부터 일주일째 되던 날, 다시 한 번 맛본 병사들의 식사는 내 예상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여전히 음식쓰레기에 불과한 식사를 앞에 두고, 나는 부대의 재무를 담당하는 놈을 즉시 감방에 가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식비 횡령에 관련된 이들을 포함해 뇌물을 받은 기사 한 놈까지 포함해 수도로 압송시켰다.


“다른 건 몰라도 군대 관련 비리는 앞으로도 엄하게 다스릴 거야.”


게임 속에서 살아가면서 전투와 전쟁을 신물나게 겪었던 나는 당연하게도 군납비리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게임 속에서 군대 관련 비리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러고보니 피터슨, 병사 애들 훈련 늘렸다며?”


나는 바뀐 병사들 식단에서 가장 맘에 드는,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두툼한 소시지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전하 덕분에 병사들의 처우가 개선되었으니, 그만큼 훈련에 박차를 가하는 게 전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자······.”

“그거 별로 안 좋게 보일 수 있는데?”

“네?”


피터슨이 깜짝 놀란 눈으로 날 응시했다.

칭찬을 기대한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내 입장에선 전혀 칭찬할 일이 아니다.


“왕세자 자리를 박차고 나간 왕자가 외딴 지역의 영주로 파견되었는데, 이후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영지의 군대를 이전보다 더 강하게 훈련시킨다? 이거, 남들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어, 그것은······.”

“그리고 너, 내가 왕세자 자리에 쫓겨난 걸로 착각한 거지?”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도 모자라 재야로 밀려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의욕이 빠진 비운의 왕자.


피터슨은 아마도 날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왕가 직속 혈통이자 장남이라는 점 때문에 날 어려워하면서도, 이따금 날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걸 느껴서 내릴 수 있는 판단이다.


“그래서 내가 다시 왕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힘쓰는 것 같은데, 방법 자체가 틀린 걸 떠나서 그럴 필요 없어. 나 말이야, 왕세자 자리 내가 때려치우고 나온 거야.”

“네?”

“그냥 왕세자하기 싫어서야.”

“전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날 응시하는 피터슨을 마주 보며 난 피식 웃을 수밖에 없다.


하긴, 이해한다.

어느 미친 왕세자가 그냥 하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다짜고짜 왕세자 자리를 냅다 때려치우겠어?

그런데 회귀를 하도 반복해서 난 그 미친 전 왕세자가 된 것 같아.


“아무튼 병사들에게 밥 제대로 먹이되, 훈련은 그냥 예전대로 해.”

“하지만 전하의 아량 덕분에 남게 된 예산이 예상보다 많은 터라······.”

“아량이 아니라 필요 없어서야. 정 그러면 병사들 숙소나 고치던가. 식당 오면서 좀 둘러봤는데, 전임 영주는 군대 자체에 신경을 아예 안 쓴 게 확실하더라. 잘 먹는 것만큼이나 잘 자는 것도 중요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내 지시를 받은 피터슨의 표정에 의기소침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대로 놔두면 곤란하다.

나와 달리 넌 열심히 일해줘야 하거든.


“내가 너보고 웬만한 일은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지?”

“네? 아, 그렇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게. 내가 시키지 않은 일을 했을 경우 사후보고를 제때 하라는 말이야. 그러면 문제없어.”

“사전에 허락을 받는 게 아니라 사후보고를 말입니까?”

“그래. 넌 능력이 되는 선에서 상식에 어긋나는 판단은 안 하는 것 같으니까. 사후보고 받은 뒤에 문제 있으면 내가 정정하라고 다시 지시할게.”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봐온 피터슨은 인성 부분에서 모난 데가 없고, 시키는 일은 그럭저럭 잘 처리했다.

하지만 그 이상을 요구하기에 무리인 등장인물이다.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로서 등급이 낮다고 판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뭐, 21세기 한국에서야 시키는 일만 잘해도 뛰어난 능력자이지만 아쉽게도 여기는 게임 속 세상.

그것도 대륙 각기에 전쟁이 발발해 혼란의 시대가 도래할 예정이다.

아직 그 시기가 오진 않았지만, 평화로운 시기에 한정해 쓸만한 부하를 놓쳐서는 안 된다.


“확실히 말해두겠는데, 난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따위 눈곱만큼도 없어. 그러니까······.”


난 피터슨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웃었다.


“무언가 무리해서 하려고는 하지 마. 편하게 살자.”



*



역시 편하게 살기란 힘든 거 같다.


“더 속도를 내봐.”

“네! 이랴!”

“아, 졸린데······.”


원래대로라면 침대 위에서 편하게 누워 수면을 취할 시간.


하지만 잠들기 직전, 다급하게 달려온 피터슨의 보고를 받고 도로 일어나야만 했다.

피터슨에게 일임하고 도로 드러눕기에는 사안이 커서 어쩔 수 없이 마차를 타고 사건이 터진 마을로 향하는 중이다.


순간이동마법이 있긴 해도, 한 번이라도 가본 적이 있는 곳에 한해서라는 조건 때문에 쓸 수 없는 상황.

나는 하품을 참으면서 마차의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상하네.”


내가 의아해하는 이유는 사건이 터졌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캐릭터가 이렇게나 일찍 나타날 리가 없을 텐데.”


내 예상을 벗어난 그 캐릭터의 등장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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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고생은 너희들이 해야지(1) 24.07.31 68 7 15쪽
15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5) 24.07.30 77 8 12쪽
14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4) 24.07.30 68 6 12쪽
13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3) 24.07.29 80 6 13쪽
12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2) 24.07.28 75 7 13쪽
11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1) +1 24.07.27 95 8 13쪽
10 DLC 출시는 아직 안 되었을 텐데?(4) 24.07.26 103 9 13쪽
9 DLC 출시는 아직 안 되었을 텐데?(3) 24.07.26 102 12 12쪽
8 DLC 출시는 아직 안 되었을 텐데?(2) 24.07.25 105 11 13쪽
7 DLC 출시는 아직 안 되었을 텐데?(1) 24.07.24 116 11 15쪽
» 처음부터 놀 수만은 없지(3) 24.07.23 127 10 13쪽
5 처음부터 놀 수만은 없지(2) +1 24.07.22 139 10 13쪽
4 처음부터 놀 수만은 없지(1) 24.07.21 158 10 13쪽
3 왕위를 포기하는 중입니다(2) 24.07.20 163 12 13쪽
2 왕위를 포기하는 중입니다(1) 24.07.20 178 13 14쪽
1 프롤로그 24.07.20 195 13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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