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물드는 밤 01
9. 피로 물드는 밤
1.
독일 슈베린(Schwerin) 외곽지역에 위치한 별장.
“프레데릭(Frederick)!”
잠에서 깨어난 짧은 금발의 사내가 침대에 일어나 앉으며 소리를 지르자, 얼굴 반쪽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사내가 다리를 절며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미스터 최가 죽었다.”
“전화를 가져다 드릴까요?”
“미스터 백에게 전화해.”
“예, 알겠습니다.”
프레데릭은 방안으로 들어와 목재탁자 위에 놓여진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G&W 한국지부로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이에 그는 전화를 받았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에 얼굴을 찡그린 채 전화기를 금발사내에게 가져갔다.
“이 시간에 누구야?”
“끌라리비덴떼(clarividente: clairvoyant)입니다.”
“그년이 이 시간에 왜?”
“아무래도 미스터 최의 일 때문이겠지요.”
프레데릭의 말에 드라쿤은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드라쿤 님.]
“뭐냐?”
[미스터 최의 일은 매우 유감입니다.]
“그 따위 인사 때문에 전화한 것은 아닐 텐데? 본론이나 말해.”
가시가 돋친 그의 말에 끌라리비덴떼는 ‘호호’ 웃었다.
[맞습니다. 제가 전화를 드린 것은 혹시라도 한국에 가실 생각이라면 재고해 달라고 부탁 드리기 위함입니다.]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나?”
[지금 드라쿤 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의 계획이 무산된 것은 아닙니다. 미스터 최가 죽고 G&W서울지부가 한국사법부의 감시를 받는다 하여도, 우리는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
[드라쿤 님께서 한국에 가시게 되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지 않습니까? 골드스테인(Goldstain) 님과 바인스나이다(Weinschneider) 님께서 이번 일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를요.]
그녀의 말에 드라쿤이 감정이 전혀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끌라리비덴떼. 주제 넘는다 생각하지 않나?”
[하지만 전 골드스테인 님과 바인스나이다 님으로부터 대리권리를……]
“그들의 개면 개답게 굴어.”
[예?]
“그 녀석들이 너를 예뻐한다고 해서 나까지 너를 예뻐 해줄 것이란 착각은 하지 마라. 수틀리면 네 년의 모가지를 뽑아버릴 테니까.”
[……]
“내 말 알아 들었나?”
[예.]
끌라리비덴떼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드라쿤은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다. 그리곤 어느새 프레데릭이 가져다 준 악어가죽 다이어리에서 G&W 서울지부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2번 정도 울리자, 이번엔 수화기 너머에서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G&W서울지부 사장실입니다.]
“사장 바꿔.”
드라쿤이 정확한 한국말로 말하자, 전화를 받은 비서가 다시 물었다.
[누구시고 무슨 용건입니까?]
“드라쿤이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비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전화를 돌렸다. 그러자 잠시 후 누군가 껌이라도 씹는 것마냥 ‘쩝쩝’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드라쿤 씨 인가요?]
“그래.”
[무슨 일인데 내 저녁을 방해하는 건가요? 그리고 그 쪽은 지금 새벽 3시 아닌가요? 혹시 불면증이라도 걸렸나요?]
“방금 미스터 최가 죽었다.”
순간, 5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칼질하는 소리와 함께 백 사장이 ‘쩝쩝’거리며 말했다.
[그렇군요. 지금 알았네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전화한 것인가요?]
“누가 그를 죽였는지 아는가?”
[아직 모르지만 짐작은 가는군요.]
“그의 이름은?”
[알아서 뭐 하려는 건가요?]
“내가 너에게 보고할 이유가 있다 생각하나?”
드라쿤의 살기서린 목소리에도 백 사장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할 뿐이었다.
[내가 보고할 이유는 없지만, 이쪽 일을 방해할 것이라면 내가 막아야 하니까요. 그리고 드라쿤. 혹시 내가 당신의 질문에 모두 답해야 할 의무라도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
백 사장의 건방진 태도에 드라쿤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곧 그는 큰 소리로 웃었다.
“크하하하. 그래, 그래. 네가 나의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는 없지. 하지만 네가 나를 도와줬으면 매우 고맙겠어. 물론, 네가 날 돕지 않는다면 내가 알아서 놈들을 추적하고 내 뜻대로 할 것이지만 말이야.”
그가 한국으로 가서 뜻대로 한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난장판을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백 사장이 짜증이 한 가득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3000살 먹었으면 철이 들어야지…… 쯧쯧쯧.]
“그래서? 결론은?”
[이름은 보내주겠어요. 하지만 조용히 할 일만 하고 가세요.]
“최대한 노력하지.”
[그럼 자세히 알아본 다음 이름을 보내주겠어요.]
“기다리지.”
전화를 끊은 드라쿤이 프레드릭에게 말했다.
“한국으로 갈 준비해.”
“한국이라…… 아주 오랜만이군요.”
프레드릭이 전화기를 원위치에 가져다 놓으며 대꾸하자, 드라쿤은 벌거벗은 몸으로 침대에서 나와 아직 어두운 창 밖을 바라봤다.
“6,25전쟁 이후 처음이군. 그때는 참 재미있었는데 말이야.”
“그랬지요.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카오스여서 남한군, 북한군, 미국군, 소련군, 중국군 상관없이 아무나 죽여도 됐으니까요.”
프레데리가 다리를 절며 하얀 가운을 가져와 벌거벗은 드라쿤의 몸에 걸치며 물었다.
“그때가 그리우신 가요, 주인님?”
“당연하지.”
“그럼 이번에 한국에 가는 것을 재고하심이 어떠하십니까?”
“왜?”
“혹시라도 한국에서 실수를 하면, 또 다른 한국전쟁을 일으키려는 회사의 계획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드라쿤은 피식 웃었다.
“전쟁을 막을 생각은 없어. 그렇지만 나의 축복을 받은 내 가족이 살해당한 사실을 알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노릇이지. 설령, 그것이 G&W의 계획에 방해가 된다 해도 말이야.”
드라쿤의 마음이 확고히 굳어진 것을 확인한 프레데릭이 말했다.
“그럼 바로 전용기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됐다.”
“그럼……?”
“이번에는 일반공항기을 이용해보지.”
“많이 불편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정보는 얻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최대한 회사의 계획에 방해를 하지 않지.”
“알겠습니다. 그럼……”
프레데릭이 침실을 나가자, 드라쿤은 아직 어두운 동쪽 하늘을 노려봤다.
- 작가의말
風刃님, musado0105님, 열랑 님, 잠실기차 님, 에테러 님, 적룡제 님, 夢戀 님, 우미 님, 귀여운곰 님, 감사합니다. ^^
루시아 님, 고봉선생 님, 우왕좌왕 님, 단월검성 님, 푸른오동 님.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많이 쓰도록 언젠가(?)는 노력하겠습니다.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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