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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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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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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017. 살인부적 2

DUMMY

3.


주사를 부리듯 흥얼대는 일성.


그 흥얼거림을 타고 세필을 쥔 그의 손이 춤을 췄다.


큼지막한 도형과 알 수 없는 기이한 문양들.


세필은 빠르게 지나가다가 잠시 멈추다가를 반복했다.


멈추는 곳에서는 여지없이 핏물이 작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일성이 스승 운천에게 부적 쓰는 법을 배울 때였다.


정철보다 붓도 야무지게 쥐고 손놀림도 좋았던 일성.


‘일성을 봐라! 저렇게 부적 하나에도 삼라만상의 조화가 자리 잡아야 하느니라!’


이때까지만 해도, 일성은 스승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받아들이던 제자였다.


스승은 일성이 쓰는 부적을 보고 흐뭇해했었다.


‘훌륭하다. 음의 기운과 양의 기운이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레 어우러지는구나.’


단순히 글을 적고 문양을 그리는 수준이 아니라 부적의 이치를 제대로 이해한 자의 손놀림.


‘흐음, 그렇지! 바로 그렇게 귀황지의 귀퉁이에까지 꽉 찬듯하면서도 유연한 오행의 흐름이 이어져야 한다.’


스승은 제자의 일취월장을 지켜보면서 가르치는 자의 행복을 느꼈다.


일성도 자신의 부적을 보고 뿌듯해했다.


거기다 관심과 사랑까지 받으니 실력은 점점 가속이 붙는 게 당연했다.


고개를 들어보면 따스한 표정의 스승 운천이 그를 보고 있었고.


힐끔 옆을 보면 자기보다 좀 모자란 정철이 낑낑대며 기를 쓰고 있었다.


일성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가슴이 부풀곤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성은 스승 운천 다음가는 고수였다.


분명, 청운당의 후계자였다.


그런데···.


오늘 일성이 쓰는 부적은 그때와는 좀 달랐다.


삼라만상의 이치와 질서가 가장 잘 드러나야 할 한복판에는···.


난데없고 부적의 균형을 크게 깨뜨리는 글자 하나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으니.


‘殺’


잔뜩 핏물을 머금은 글자는 서늘함마저 자아내게 했다.


주변의 모든 생기를 다 거두어 갈 것만 같은 서늘함.


보고만 있어도 기운이 쇠하고 정신이 흩어져 버릴 것만 같은 공포감.


일성은 자신이 만들어 내는 부적을 보면서 악마처럼 웃었다.


“흐흐흐, 이제 내가 청운당의 주인이라니까!”


일성 자신이 만들어 낸 살(殺)의 기운은 마치 그를 지배하는 듯했다.


핏물이 흥건한 부적들이 완성되었다.


그것들은 곧 방안에 일렬로 나란히 펼쳐졌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보니 피를 흘리며 죽은 시신을 길가에 늘어놓은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 죽일 자들의 무덤 자리를 미리 파놓은 것처럼도 보였다.


한참을 흥얼대며 콧노랠 부르던 일성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잘 마른 부적을 집어 든 그는 터벅터벅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청운당은 여전히 고요했다.


마치 전부터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4.


기력이 떨어지자 다리에도 힘이 풀렸다.


영일은 다시 고개를 돌려보았다.


10여 미터 간격을 유지하던 놈은 어느새 더 다가와 있었다.


이제는 7미터 정도···.


놈은 영일의 어설픈 축지술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했다.


일성 법사는 어쩌면 놈을 식신으로 삼을 때 그 점을 충분히 살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가 영일의 한계이고, 어느 순간 덮쳐야 단번에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을까.


그걸 계산하는 일성 법사의 모습!


일성의 그런 모습이 떠오르자 영일은 소름이 돋았다.


쓰라린 등가죽이 옷가지에 쓸리자 통증이 작렬했다.


축지술이라도 익숙하면 상체의 흔들림을 최대한 줄이면서 달리겠건만.


아직 실력이 모자란 자신의 처지가 분했던 것일까.


영일은 어금니를 힘껏 깨물었다.


계곡의 바위들을 뛰어넘을 때쯤이었다.


뒤에서 퍼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놈이 움직이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가까워져 버린 것이다.


영일은 숨을 고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는 저놈과 담판을 져야 할 때가 왔구나!’


영일은 점점 힘이 빠져가는 허벅지를 주물렀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도술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상대를 영력으로 제압하거나, 위험에 직접 맞대응하는 도술을 배울 단계는 분명 아니었던 영일.


‘미혼술과 망기술··· 초보적인 축지술에 어설픈 봉인술··· 그리고 어깨너머로 몰래 훔쳐보기만 했던 기초 변신술··· 아! 이런 것들로는 놈과 맞설 수 없다.’


영일은 자신감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움직임도 한순간에 둔해져 버렸다.


그때 뒤에서 영일을 거의 다 따라잡은 놈이 먼저 일격을 가해왔다.


파바바바밧!


“아흐으으읔···!”


순간 뜯기는 듯하고 저릿한 통증이 왼쪽 종아리에서 번졌다.


영일은 급히 달리는 걸 멈추고 통증 부위 근처를 손으로 휘둘렀다.


놈의 날갯죽지가 걸렸다.


퍼득~ 퍼드득~!


놈은 몸을 공중에 띄우더니 뒤로 잠시 물러나 앉았다.


영일은 종아리를 두 손으로 감싸면서 놈을 바라봤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선 살벌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부리에선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영일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자기 종아리를 공격한 건 저 부리였다는 걸.


순간 오싹함이 영일의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실체적인 공포는 그렇게 영일과 놈이 마주 선 공간을 순식간에 채워버렸다.


움켜쥔 종아리에서 뜨끈한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영일은 가는 신음을 내지르며 한 손을 살며시 들어보았다.


작게 살점이 떨어져 나간 부위에선 피가 솟고 있었다.


바짓단 일부를 찢어 얼른 상처를 동여맨 영일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이렇게 트인 공간은 내게 불리하다.’


영일이 향한 곳은 나무가 좁은 간격으로 얽혀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선 놈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생각대로 놈이 빠르게 덮치는 것만 늦출 수 있어도 반격할 틈을 벌 수 있다.


도술을 걸거나 정 안되면 뭔가로 후려칠 수 있는 틈 말이다.


물론, 그의 생각대로 된다는 가정하에···.


퍼더덕!

퍼덕!


놈이 다시 영일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보인 건 실수였다.


그런 수동적인 움직임은 동물들의 원초적인 공격본능을 자극하는 법이다.


거기다가 식신으로 부림을 당하면서 살기까지 더욱 배가된 상태가 아닌가.


흠칫 놀란 영일은 앞과 뒤를 번갈아 보며 더 빠르게 물러섰다.


대여섯 걸음쯤 물렀을 때였다.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가 영일의 뒤꿈치 끝에 걸렸다.


영일은 그걸 냉큼 주워들고는 앞으로 휘둘러보았다.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길이에 가볍고 단단한 나뭇가지였다.


하지만 일격을 가해 절명까지 시킬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걸로는 짧은 공격이나 간단한 방어 정도밖에 못 하겠는걸.”


영일은 그 나뭇가지를 펜싱 칼처럼 휘두르며 계속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그런 움직임이 놈을 더 자극한 모양이었다.


꾸웨에에에엑!


목이 비틀리는 것 같은 괴성을 내뱉은 놈이 공중으로 튀어오르며 영일을 덮쳤다.


요란한 퍼덕임과 격한 몸부림이 한바탕 엇갈렸다.


퍼더~ 퍼더덕~! 휘익~ 휘이익~!


그런데 놈의 움직임은 영일의 생각보다 훨씬 날렵했다.


마치 노련한 권투 선수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상대의 잽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허이쿠, 이런···.”


영일의 찌르기와 휘두르기가 매번 무기력하게 빗나갔다.


그러자 극심한 공포가 영일을 감싸 안았다.


죽음이 옥죄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닭 한 마리를 제압 못 해 농락당하고 쫓기는 미약한 초보 법사!


이런 한심한 자가 무슨 도술을 수련하는 법사란 말인가?


마음마저 흐트러져 버리자 영일은 집중력까지 잃었다.


몸의 중심이 순간 삐끗하며 기울어져 버렸다.


그리고 놈은 그 틈을 또 집요하게 파고든다.


퍼더더더덕!


“흐어어어어엌···!”


눈 깜짝할 사이!


이번에는 왼쪽 어깻죽지였다.


날카로운 발톱이 할퀴고 간 자리는 한동안 감각이 없었다.


잠시 후 그곳에서 서서히 피가 스며 나왔다.


피가 보이자 통증이 순식간에 살아났다.


“크흐아아앜!”


영일은 고통에 악을 쓰며 뒷걸음질을 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시 퍼덕거림과 날카로운 발톱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정수리!


영일은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그러자 놈은 잠시 거리를 두며 영일에게서 떨어졌다.


주도권은 확실히 야생닭에게 있었다.


놈은 상처 입은 먹이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한군데씩 야금야금 상처를 입혀 고통을 서서히 증가시키고.


또 그렇게 기운과 저항 의지를 빼앗아 간다.


대부분의 사냥감은 상처를 입고 힘이 빠져 죽는 게 아니다.


의지를 잃어버리는 순간이 바로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이라는 걸, 놈은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놈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생겼다.


영일은 숨을 고르면서 최대한 침착하게 생각했다.


‘나무들 사이가 제법 좁은 곳에서··· 봉인술을 쓴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물리적인 힘으로 당해내지 못하고, 도술로도 압도하지 못하는 상황.


나무 사이에서 놈의 날갯짓이 부자연스러울 때 봉인술을 걸어 나무들과 함께 묶어버린다.


그러고 나서 축지술로 얼른 달아난다.


영일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취할 행동을 그려보았다.


다시 영일이 몸을 일으켜 뒷걸음질 치자 놈도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왔다.


가끔가다 한 발로 땅을 탁탁 차는 모습이 투우장의 소를 연상시켰다.


붉은 망토를 휘두르는 투우사를 노려보며 땅을 구르는 흥분한 검은 소!


영일은 긴장감에 식은땀이 솟았다.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러서다 어느 순간 적절한 공간에 들어섰다.


영일이 힐끔 옆을 돌아보니 나무들의 간격이 제법 촘촘했다.


“후우우우우-!”


영일은 긴 숨을 몰아쉬면서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결전에 임하는 장수처럼 눈을 부릅떴다.


놈은 그 모습이 의아했는지 잠시 주춤거렸다.


하지만 곧 다시 날개를 거세게 흔들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영일은 가만히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놈이 점프하다가 촘촘한 나무들 사이에 걸려 잠시 허우적대는 순간이었다.


영일은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면서 봉인술의 수인을 생각했다.


그런데··· 아뿔싸···!


너무 긴장한 탓일까?


영일은 갑자기 수인의 모양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건 어설퍼도 이거 하나만은 제대로 익혔다고 자부했건만···.


역시 연습이 부족하다 보니 실전에서 실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사이 좁은 나무 사이를 헤집고 들어온 놈이 영일의 얼굴을 향해 돌진했다.


영일은 급한 김에 한 나무 뒤로 몸을 숨겨 일격을 피했다.


그러고는 다시 양손을 앞으로 뻗어 무의식중에 떠오르는 수인을 아무렇게나 맺었다.


‘제발 이게 봉인술의 수인이 맞기를···.’


일성의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펑-!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영일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놈도 당황했는지 자신만 덩그러니 남은 숲속 공간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그러면서 주변 사물들을 부리로 툭툭 건드려도 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놈은 초조한지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한곳에 우두커니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영일이 지었던 손 모양은 기초 변신술의 수인이었다.


살아있는 생물로 변하는 고급 단계가 아닌, 사물로 변하는 기초 단계의 변신술!


영일은 지금 나무 사이에서 작은 돌덩이로 변해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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