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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가 님의 서재입니다.

신궁강림 이계싹쓸이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실가
작품등록일 :
2019.12.10 22:17
최근연재일 :
2020.02.04 21:58
연재수 :
4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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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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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81,105

작성
19.12.26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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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글자
13쪽

Ep4. 그들의 둥지(4)

DUMMY

남자는 분명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에는 라크교단의 표식이 또렷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성기사단의 사제가 여길 왜?’


말없이 라이센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분명히 성기사들이 몰려올 줄 알았는데, 웬 활잡이가 올라오다니. 놀랍군.”

“뭐요? 그러는 당신은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요?”


끼야아아-


남자가 한 손을 들자 사방에서 하피들이 날아들었다.


순간 긴장한 라이센이 활을 뽑았으나 하피들은 그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놈들은 주인을 따르는 개처럼 모두 남자의 주변에 날아와 앉았다. 기상천외한 광경이었다.


‘괴물인 하피가 인간의 말을 들어?’


그중에는 아까 짝을 잃은 수컷 하피도 섞여 있었다. 놈이 라이센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자 남자가 지팡이로 가로막았다. 하피가 곧 조용해졌다.


라이센이 그에게 말했다.


“그래, 네놈이 꿀단지로군.”

“꿀단지? 그건 무슨 뜻이지?”

“모르면 됐고. 그런데 어떻게 괴물을 조종할 수 있는 거지?”

“모르면 됐고.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거지?”


남자는 그러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유치하게스리. 남의 말 따라 하며 좋아하는 건 세 살 먹은 애들이나 하는 짓 아닌가.


“하피가 납치해간 마을 아이들은 어떻게 한 거냐?”

“그걸 내가 알려줄 것 같으냐?”

“아니, 아니긴 한데.”


그러자 남자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좋아, 네놈이 내 부탁 하나 들어주면 알려주지.”

“부탁?”

“그래. 내가 여기서 이것저것 실험을 해보고 있거든. 혈기왕성한 젊은 놈이니 가운뎃다리는 꼿꼿이 잘 세우겠지?”


그러더니 남자는 암컷 하피 한 마리의 등을 지팡이로 떠밀었다. 그 암컷은 잠시 남자를 노려보았으나 별다른 반항은 하지 못했다.


“하피와 인간이 붙어먹으면 알이 나올지 새끼가 나올지 궁금했거든. 난 수도생활을 하도 오래 했더니 그게 잘 안 서서.”


뭐래, 시벌. 이거 완전 또라이 새끼 아냐?


라이센이 할 말을 잃었다. 그러자 남자는 지팡이로 하피의 말랑말랑한 가슴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어때? 이 정도면 해볼 만 하지 않아? 몸매도 좋고, 얼굴도 아주 괜찮은데. 인간으로 쳐도 이 정도면···”

“아주 좆을 까잡숴.”

“입이 꽤나 험하군, 활잡이. 너 혹시 마법이라고 들어는 봤냐? 악취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냄새를 없애는 마법을 걸어줄 수도 있어. 어때?”

“아주 제대로 쳐 돈 새끼구먼.”


더는 말을 섞기도 싫었다. 라이센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살을 시위에 얹자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강제로 따먹히는 것보다 스스로 하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쯧쯧.”


남자가 지팡이를 뻗었다.


끼야아아아-


그러자 하피들이 동시에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라이센은 지금 당장 저 미친놈을 쏴 죽이고 싶었으나 먼저 날아드는 하피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아까와 같은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하피들은 사방에서 라이센을 향해 날아들었고, 라이센은 그들에 맞서 사방으로 활을 날려야 했다.


정신없이 피하고, 정신없이 쏘고를 반복하던 중 라이센의 눈에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남자는 눈을 감은 상태에서 뭔가를 쉴 새 없이 중얼대고 있었다. 그의 몸 주변으로 무색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건 성력이 아니었다. 저게 마나인가. 저렇게 길게 주문을 읊조리는 거로 볼 때 뭔가 대단한 마법을 준비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라이센은 태어나서 한 번도 마법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마법을 구경해 보고 싶지도 않았다.


‘저놈이 주문을 다 외기 전에 죽여야만 한다.’


“꺄아아아악.”


그러나 날아드는 하피들 덕에 도저히 남자를 조준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하피들은 공격을 하는 도중에도 라이센의 시야를 가리며 그를 보호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까의 전투로 하피들을 상대하는 게 꽤 익숙해졌다는 것이었다. 라이센은 빠른 속도로 하피들을 줄여나갔다. 한 놈, 두 놈, 세 놈.


대부분의 하피를 처치했을 무렵, 남자의 몸에 모인 어떤 강대한 기운이 라이센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필시 저런 마법이라면 심각한 타격을 입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그 수컷 하피가 남아있었다. 제 짝과 새끼를 잃었다는 슬픔과 분노가 괴물에게 생각 이상의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꺄아아아-


놈은 비현실적인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갈지자로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맞추기 힘들다. 날카로운 발톱이 라이센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선회한 수컷이 또 한 번 갈지자 하강을 시작했다. 순간 라이센은 속사가 여럿의 적에게만 쓰는 기술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가 세 방향을 향해 빠르게 속사를 갈겼다.


폭.


그중 한발이 수컷의 날개를 찢었다. 기회를 놓칠세라 다시 속사 세 발을 날렸다. 하나는 빗나가고 두 발이 수컷의 날개를 다시 한 번 찢었다.


“캬아악!”


라이센은 수컷에게 정신을 차릴 겨를을 주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날아든 버들잎살에 수컷의 머리통이 뚫렸다. 수컷은 그대로 절명했다.


“세상에, 그렇게 활 쏘는 걸 대체 어디서 배운 거냐?”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센은 대답 대신 재빨리 활을 겨눴지만, 남자가 더 빨랐다.


“빌러야테 아르 디바레-”


알 수 없는 주문과 함께 무형의 파동이 라이센을 향해 발사됐다. 파동은 공기를 일그러뜨리며 무서운 속도로 날았다. 그것은 희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라이센을 집어삼켰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후두둑. 흙먼지가 라이센의 몸 위로 떨어졌다.


흙먼지가 걷히자 양팔로 얼굴로 가린 채 미동 없이 서 있는 라이센의 모습이 드러났다. 뭐지? 방금 뭔가 엄청난 게 나를 덮친 거 같은데.


“자 이제 빨리 시작하자고.”


남자는 그런 라이센을 본체만체하더니 아까 그 암컷 하피를 라이센쪽으로 떠밀었다.


“···”


암컷은 군말 없이 라이센쪽으로 걸어왔다. 하지만 라이센은 하피도 수치심 어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그 날 처음 깨달았다.


라이센은 자기 몸 구석구석을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이상이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근데 저놈은 왜 저렇게 당당한 거냐.


“활잡이, 난 바쁜 몸이야. 이제 빨리 시작해.”

“···”


남자는 그렇게 말을 툭 내뱉더니 아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암컷이 라이센의 코앞에 와서더니, 엉덩이를 뒤로 빼며 엎드렸다. 이게 실성을 했나.


“뭐해? 시작 안 하고? 개네들 그 자세로밖에 못 해.”

“···”


라이센이 하피와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분한 듯 입술을 깨무는 하피와 졸린 눈을 한 남자의 표정이 차례로 들어왔다.


“얌마, 시작이고 나발이고 너 지금 나한테 뭐 한 거냐?”

“뭐, 뭐?”


남자가 깜짝 놀란 듯 벌떡 일어났다. 그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말했다.


“너, 너 어떻게 말을 하는 거냐?”

“너는 사람이 말하는 게 신기하냐? 너 방금 뭐 한 거냐고, 이 또라이 새끼야.”

“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


남자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방금 남자가 건 마법은 강력한 정신지배술. 시전자가 시키기 전까진 말을 할 수 없다.


게다가 정신지배술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란 없다. 이 정신지배술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신의 직접적인 가호를 받는 자뿐이다. 교단 내에서도 이게 통하지 않는 사람은 손에 꼽을 텐데.


게다가 눈앞의 활잡이는 성기사도 아니었다. 위장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도 없다. 활잡이에게는 조금의 성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젠장, 물어뜯어!”


남자의 말이 떨어지자 갑자기 하피가 달려들었다. 하피는 순식간에 라이센을 넘어뜨리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하피가 손톱으로 목을 뜯으려는 순간, 라이센은 있는 힘을 다해 놈을 밀쳐냈다.


“끼야아-”


저만치 튕겨 나간 하피가 날개를 퍼덕였다.


파바박.


하지만 땅에서 발을 떼기도 전에 몸에 세 발의 화살이 꽂혔다.



라이센의 시선이 다시 남자에게로 향했다. 이번에는 남자의 손위에 호박만 한 불덩이가 떠올라 있었다.


“하릭- 디바레-”


콰과과광.


워메, 마법사들은 불덩이를 만들어 던진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을 줄이야.


간신히 바위 뒤로 몸을 숨긴 라이센은 틈 사이로 남자를 지켜봤다. 이곳은 바위가 삐죽 튀어나온 곳이 많았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 새끼가 숨어? 비겁하게 숨지 말고 나오시지. 니 놈 활이 더 센지 내 불이 더 센지 붙어보자고.”


그는 그렇게 외치면서 또다시 손 위에 불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불을 쓰는 놈이 비겁하지 숨는 놈이 비겁한 건가.


남자는 사실 당황하고 있었다.


그가 주로 상대했던 대상은 언제나 정면승부를 고집하는 고지식한 성기사들, 아니면 무턱대고 달려드는 괴물들뿐이었다.


싸웠던 상대 중에 이렇게 숨는 적은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거기냐!”


콰과과광.


남자는 조금의 소리라도 나면 무턱대고 불덩이를 날리기 시작했다.


마법을 이용한 그의 청력은 특히 예민했고, 불덩이를 만드는 속도도 무척 빨랐다.


그 덕에 라이센은 몸을 내밀어 활을 쏠 틈이 없었다. 그저 남자가 불덩이를 쏘는 틈을 타 은폐장소를 바꿀 뿐이었다. 여기저기 불길이 치솟아 온몸이 후끈거렸다.


그러기를 몇 번을 반복했을까? 어느 순간 라이센이 남자의 측면을 잡았다. 매캐한 연기에 기침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라이센은 잠시 남자를 지켜보았다.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다행히 이쪽을 보진 않았다.


‘저놈, 청각이 굉장히 예민했어.’


라이센은 반대쪽으로 돌멩이 하나를 집어 던졌다.


따닥.


“쥐새끼 같은 놈!”


남자는 돌이 떨어진 방향을 향해 불덩이를 날렸다. 라이센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몸을 내밀어 살을 날렸다.


“커헉.”


버들잎살이 남자의 옆 통수를 뚫었다. 재빨리 살을 다시 얹은 라이센이 두 번째 발시를 준비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 레벨업 하셨습니다! 레벨9.



몸을 부르르 떨던 남자의 움직임이 순간 그대로 멈췄다.




***




남자를 죽인 라이센은 한참 동안을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피떼와의 혈투, 그리고 처음 겪는 마법사와의 전투로 몹시 피로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하피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다 죽인 건가. 이제 어딘가에 있을 아이들만 찾으면 되려나.


그러던 그의 시야에 하피의 둥지들이 들어왔다.


‘그래, 혹시라도 둥지 안에 하피가 남아있으면 마저 제거해야 한다.’


라이센은 그렇게 생각하며 둥지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둥지 하나에 다가간 라이센. 안을 들여다보던 라이센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이놈들, 납치한 아이들을 둥지 안에 가두고 있었어.’



둥지 안에는 인간의 아이들이 잠들어 있었다. 더군다나 잘 먹였는지 아이들은 혈색이 좋고 포동포동해 보이기까지 했다. 평온하게 잠든 그들을 보며 라이센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곧 다른 둥지들을 돌며 모두 확인을 했다. 역시 둥지마다 아이들이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그렇게 시끄러웠는데 깨지도 않고 잘만 자네.


돌을 갓 지난 아이부터 세 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들까지. 대략 열 명은 넘어 보였다. 대체 저 또라이 사제 놈은 이 아이들을 데려다 뭘 하려고 한 거냐.


‘어쨌든 전부 살아있어. 이거 마을에서 잔치라도 열리겠네.’


라이센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들을 깨우려던 라이센은 곧 행동을 멈췄다.


‘이 가파른 봉우리에서 저 많은 아이를 어떻게 데리고 내려가냐? 게다가 우는 아이 달래는 건 영 자신 없는데.’


고민해 보았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더는 다른 하피의 위협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성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데려와야 하겠군.’


그렇게 생각한 라이센이 내려갈 채비를 마쳤다. 사제 옷의 남자가 머물던 돌집은 다시 와서 조사할 생각이었다.


‘어느 세월에 여길 내려갔다 다시 올라온담.’


봉우리 끄트머리에 서서 한숨을 내쉬던 라이센이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센이 다시 둥지 쪽을 돌아봤다.



끼야아아-



둥지 안에서 새끼 하피들이 꾸물거리며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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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p6. 짐승같은(2) +11 20.01.01 7,184 161 13쪽
18 Ep6. 짐승같은(1) +14 19.12.31 7,687 166 13쪽
17 Ep5. 어그로(2) +11 19.12.30 7,533 185 14쪽
16 Ep5. 어그로(1) +10 19.12.29 7,747 178 13쪽
15 Ep4. 그들의 둥지(5) (수정) +13 19.12.27 7,783 169 14쪽
» Ep4. 그들의 둥지(4) +5 19.12.26 7,709 173 13쪽
13 Ep4. 그들의 둥지(3) +6 19.12.25 7,789 180 12쪽
12 Ep4. 그들의 둥지(2) +8 19.12.24 8,106 185 14쪽
11 Ep4. 그들의 둥지(1) +12 19.12.23 8,629 171 14쪽
10 Ep3. 일단 구경이나 하자.(5) +8 19.12.22 8,683 166 13쪽
9 Ep3. 일단 구경이나 하자.(4) +15 19.12.20 8,712 168 13쪽
8 Ep3. 일단 구경이나 하자.(3) +16 19.12.19 8,960 184 12쪽
7 Ep3. 일단 구경이나 하자.(2) +6 19.12.18 9,663 189 13쪽
6 Ep3. 일단 구경이나 하자.(1) +18 19.12.17 10,075 203 13쪽
5 Ep2. 그저 살아남고 싶다.(4) +14 19.12.16 10,181 200 14쪽
4 Ep2. 그저 살아남고 싶다.(3) +13 19.12.14 10,507 198 14쪽
3 Ep2. 그저 살아남고 싶다.(2) +11 19.12.13 10,791 215 13쪽
2 Ep2. 그저 살아남고 싶다.(1) +15 19.12.12 12,304 205 13쪽
1 Ep1. 프롤로그 +14 19.12.11 13,668 181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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