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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가 님의 서재입니다.

신궁강림 이계싹쓸이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실가
작품등록일 :
2019.12.10 22:17
최근연재일 :
2020.02.04 21:58
연재수 :
4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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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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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89
글자수 :
281,105

작성
19.12.13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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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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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글자
13쪽

Ep2. 그저 살아남고 싶다.(2)

DUMMY

“수고들이 많군.”


그때 화려한 갑옷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나타났다. 뒤에 호위기사들까지 대동한 걸 보니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살짝 앳돼 보이는 얼굴의 청년. 그를 보자 주변의 병사들이 모두 일어나 예를 갖췄다.


“오셨습니까? 케이드 나리.”


앳된 청년의 이름은 케이드 칼도르프, 오늘 라이센과 대련을 벌이기로 한 영주의 아들이었다.


고개를 한껏 치켜세운 케이드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뒷짐을 지고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때로는 병사들의 무기며 방어구 따위를 만져보며 혼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마치 부하들을 시찰하는 듯한 그의 행동은 누가 봐도 사뭇 과장돼 보였다. 병사들의 표정에 살짝 짜증이 서렸다. 영주의 아들이긴 하지만 아직 병사들에게 지휘관으로 인정받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때 케이드가 라이센을 발견하고는 빌리에게 물었다.


“이놈은 뭔가?”

“예, 사실 이따가 나리의 대련 상대가 돼줄 포로 놈입니다.”

“아, 그래?”


라이센을 바라보던 케이드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초라한 몰골, 여기저기 생긴 상처, 게다가 유달리 곱상하게 생긴 라이센의 외모가 그를 안심시킨 모양이었다.


그런 케이드가 빌리의 손에 들린 활을 보고 물었다.


“그 활은 뭔가?”

“예, 이놈이 대련에서 활을 쓰겠다고 해서···”

“아, 그래?”


케이드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감추려 애쓰며 짐짓 엄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


“기사들끼리의 대결에 활을 들고나오는 건 매우 비겁한 짓 아닌가?”

“하, 하오나···”

“맞다. 이놈은 기사가 아니었지. 하긴, 전장에서 기사라고 해서 화살이 안 날아오는 법은 없으니까. 후후”


라이센은 최소 십여 년간 검술만을 수련한 기사가 농사꾼 무지렁이를 상대하는 건 기사도에 맞는 건지 묻고 싶었다. 그것도 두꺼운 갑옷을 걸치고서.


그때 라이센의 얼굴을 찬찬히 훑던 케이드가 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그렇게 찢어진 눈으로 과녁이 보이기는 하는가?”

“아하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라이센은 이런 놀림에 익숙했다. 아즈나인에게 눈이 작다거나 머리카락이 더럽다거나 하는 놀림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어왔다.


“그래서 불리하겠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뭐라고?”


라이센은 평소 같으면 꺼내지도 못할 말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자 스스로 깜짝 놀랐다. 전생의 자아가 현생의 자아를 덮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얼굴을 찌푸리던 케이드가 갑자기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좋아, 나를 한 발이라도 맞추면 팔 한쪽 자르는 거로 봐주도록 하지. 대신 한발이라도 못 맞추면···”


케이드는 라이센에게 목을 긋는 시늉을 하더니, 뒤를 돌아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사라지는 그의 발걸음에 유달리 힘이 들어가 있었다.


대체 저런 허세 지랄은 어디서 배운 건지.


‘주변을 둘러 보는 척하면서, 사실 대련 상대를 살펴보러 왔던 건가? 하는 짓이 영락없는 애군.’




***




케이드가 떠나자 빌리가 라이센에게 물었다.


“내가 고른 이 활을 쓸 텐가? 다른 무기를 한 번 더 골라 보겠나?”

“한 번 더 찾아보면 안되겠습니까?”

“그래? 무슨 의미가 있을진 모르겠다만 네놈 마음대로 해.”


라이센은 빌리와 함께 다시 무기고로 돌아갔다. 빌리는 직접 시범까지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센이 활을 선택하지 않자 살짝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라이센은 빌리의 말처럼 이곳 활로는 도저히 케이드의 갑옷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곳의 활은 대부분 크기만 컸지 한 가지 재질의 나무로 깎아 만든, 매우 단순한 형태의 활뿐이었다. 애당초 과녁을 고작 80보 정도에 놓고 쏜다는 것은 그만큼 위력이 없다는 뜻이다.


‘써본 적은 없지만, 차라리 칼이나 창을 쓰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으로 라이센은 무기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구석까지 꼼꼼히 무기고를 살폈다.


“이 뒤로 갈수록 오래된 무기들밖에 없어. 괜히 헛심 빼지 말어.”


빌리가 말했지만, 라이센은 개의치 않았다. 목숨이 달린 이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는 심정이었다.


‘아니, 칼이나 창 같은 뻔한 무기로는 승산이 없어. 뭔가 특이한 거로 승부를 걸어야 하나?’


그는 구석에 있던 기이한 형태의 무기들을 위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쇠꼬챙이가 달린 채찍, 도리깨처럼 생긴 사슬 무기 등 온갖 희한한 형태의 무기들.


얼만큼을 살펴봤을까? 뒤에서 지루할 대로 지루해진 빌리의 하품소리가 들렸다.


그때, 라이센은 먼지가 쌓인 한 무기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여기에?’


잠시 그 무기를 살펴보던 라이센이 뒤따라오던 빌리에게 물었다.


“혹시 이걸 사용해도 되는 겁니까?”

“뭐? 그게 대체 뭔데?”


라이센이 무기를 들어 빌리에게 보였다.



나무막대기가 C자 형태로 동그랗게 말린듯한 모습.



라이센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그 나무막대기 같은 물건의 먼지를 털었다. 하지만 빌리는 그게 무슨 무기인지 알 수 없었다.


“대체 그게 뭔가? 그 동그란 나무 막대기가 여기 왜 있는 거지? 여기 관리자인 나도 처음 보는 건데.”

“이건··· 활입니다.”

“활이라고? 그게?”


라이센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건 분명 조선 활이다.’



군용은 아니고 비록 민가에서 쓰던 활이지만, 이거라면 충분히 통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의 군용 활은 물소의 검은 뿔을 나무에 덧대 활의 탄성을 보탠다. 이 활은 물소 뿔 대신 구하기 쉬운 황소 뿔을 덧대 만든 백각궁(白角弓)이다. 위력이야 군용에 비할 바 못되지만, 틀림없이 아까의 활들보다는 훨씬 위력적일 터였다.


‘그런데 대체 이게 왜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거지? 혹시 내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그때 빌리가 물었다.


“나 참, 이게 활이라니 말이 되느냐? 시위를 걸 자리가 어디 있다는 거냐? 시위를 걸 자리가 고작 한 뼘도 안 될 거 같은데.”

“시위는 이것을 반대로 뒤집어서 거는 것입니다.”

“뭐라고?”


빌리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라이센이 활이라고 말하는 나무막대기는 거의 원형에 가까운 C자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그것을 반대로 꺾는다면 당연히 부러질 게 아닌가.


“잠시 시위를 걸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십시오.”

“어··· 그래 마음대로 해. 나도 보고 싶긴 하군.”


라이센은 그대로 바닥에 앉았다. 그러더니 팔과 발을 이용해 활을 폈다 오므리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이 사뭇 진지하여 빌리도 거의 소리를 내지 못했다.


동작을 멈추고 잠시 심호흡을 한 라이센. 그러더니 무릎으로 활을 누르며 반대방향으로 들어 올렸다.


뿌드득.


그러자 활이 정반대 방향으로 완전히 구부러졌다.


C자형의 막대기가 반대로 3자 형의 모양을 띠며 완전한 활의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라. 안 부러지네?”


그 모습을 본 빌리는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저런 활을 정말 쏠 수 있다면 실로 무지막지한 탄력을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 무릎으로 활을 고정한 라이센이 드디어 입에 문 시위를 걸었다.


활을 이리저리 돌려 혹시 비틀어지진 않았는지 확인하던 라이센이 곧 먼지를 털고 일어섰다.


빌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 그게 정말로 쏠 수 있는 거냐? 혹시 시위를 당기면 탁하고 부러지는 거 아니냐? 아니면 반만 당겨야 하는 거라든지.”


뿌드득.


그러자 라이센이 시위를 한껏 당겨 보았다. 전생의 김인홍은 시위를 당길 때마다 들리는 이 소리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빌리의 눈이 다시 한 번 휘둥그레졌다.


“아니, 어떻게 하면 시위를 그렇게 크게 당길 수 있는 겐가?”


그의 상식으로는 활시위를 최대한 당기면 사수의 볼 정도에 위치한다. 하지만 라이센이 당긴 시위는 그의 귀 뒤를 훌쩍 넘어갔다. 빌리는 한 번도 저렇게 크게 당길 수 있는 활은 본 적이 없었다.


피융-


라이센이 빈 시위를 놓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센은 활을 바라보며 시위를 얹지 않아 허무하게 죽었던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




칼도르프 성 내 광장.


많은 수의 인파가 둥그렇게 몰려 환호하고 있었다. 영주의 아들과 포로의 대결. 승패는 불 보듯 뻔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구경거리를 좋아했다.


둥근 인파 한가운데 서 있던 라이센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칼도르프의 위대한 영주 펠릭스 칼도르프 경께서 나오십니다.”

“와아아아”


인파를 뚫고 검은 갑옷을 입은 영주 펠릭스가 나타났다. 그의 좌우로 호위대장 요란트와 기사들이 사람들을 물리며 걸어왔다.


영주 펠릭스가 한쪽 끝에 마련된 높은 단상 위에 올라앉았다. 그의 얼굴은 전장의 흉터가 고스란히 베여 있었고, 머리칼은 사자의 갈기처럼 사나웠다.


라이센은 그가 내뿜는 기세와 위압감에 살짝 손이 떨려왔다. 펠릭스의 얼굴을 보니 그도 분명 드란데가 틀림없었다.


‘제길, 그럼 케이드란 놈도 역시 드란데인가? 그렇게 안 보였는데.’



한편 몰려든 군중들을 바라보던 펠릭스는 옆자리에 앉은 요란트에게 물었다.


“요란트 경, 그놈의 정체가 혹시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글쎄요. 하지만 영주 님께 불경한 죄를 저질렀으니 반드시 찾아야겠지요.”

“오늘 대련이 끝나는 즉시 직접 수색대를 이끌고 놈을 찾아내시오.”

“알겠습니다. 영주 님.”


그때 관중 속을 뚫고 케이드가 등장하자, 펠릭스는 물끄러미 아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말했다.


“쯧쯧, 저놈은 대체 언제쯤 각성을 하게 될는지.”

“오늘처럼 실전 경험만 꾸준히 쌓으면 곧 각성하실 겁니다. 아드님 중에 드란데로 각성하지 못한 분은 안 계시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말끝을 흐린 펠릭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지자 펠릭스가 큰소리로 외쳤다.


“결투를 시작한다. 두 대련 자는 즉시 무기를 들라!”

“와아아아아-”


말이 끝나자마자 케이드는 종자가 들고 있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라이센을 노려보며 한번 비릿한 웃음을 짓더니 이내 투구를 뒤집어썼다.


“와아아아!”


둘 사이의 간격은 대략 20보 정도.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다듬던 라이센도 화살을 뽑아 시위에 올렸다.


“요란트 경, 일대일 결투에서 활을 쓴 자가 있었던가?”


느긋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펠릭스가 술잔을 떼며 말했다.


“아마 처음 있는 일일 겁니다. 기사를 상대로 활이라니, 이미 자포자기한 놈 아니겠습니까?”


라이센이 두 팔을 들어 활을 머리 위로 살짝 올렸다. 그 상태에서 잠시 케이드를 바라보던 그는 활을 밑으로 내리는 동시에 시위를 당겼다.


“호오, 그놈 참 자세 한번 특이하구나.”

“그렇군요. 저도 저런 자세는 처음 봅니다. 아니, 예전에 한번 본 적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나저나 들고 있는 활이 너무 작지 않습니까?”

“그렇군. 작고 울퉁불퉁 굴곡이 져 있는 게 특이한 활이군. 저런 게 우리 무기고안에 있었나?”

“글쎄옵니다.”


결투개시 선언을 기다리는 관중들이 두런댔다.


“저기 활든 놈이 얼마 만에 죽을 것 같나?”

“그야 단칼에 베일 게 뻔하지 않냐?”

“활이라니, 뭣도 모르는 놈 같은데 참 불쌍하구먼. 쯧쯧.”

“난 케이드 경이 이긴다는 것에 우리 집 암탉을 걸지.”

“내기는 너 혼자 하냐? 저 활잡이한테 거는 미친놈이 있을 것 같아?”

“하하하.”


검을 쥐고 라이센을 노려보던 케이드는 아까부터 기분이 나빴다. 아무리 결투라지만 농사꾼 나부랭이 따위가 자신을 겨누고 있음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결투 개시!”


펠릭스가 드디어 결투의 시작을 알렸다.


“이노오오옴!”


말이 떨어지자마자 케이드가 땅을 박차고 달렸다. 파악- 하고 땅이 패는 소리가 터지자 관중들이 오오 하면서 탄성을 질렀다.


순간 케이드의 시야에 라이센이 시위를 놓는 모습이 들어왔다. 케이드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검으로 화살을 쳐낼 요량이었다.


“감히 나를 맞추 겤-”


파아악.


화살이 케이드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었다.


검은 크게 허공을 갈랐고, 케이드는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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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p6. 짐승같은(2) +11 20.01.01 7,185 161 13쪽
18 Ep6. 짐승같은(1) +14 19.12.31 7,687 166 13쪽
17 Ep5. 어그로(2) +11 19.12.30 7,533 185 14쪽
16 Ep5. 어그로(1) +10 19.12.29 7,747 178 13쪽
15 Ep4. 그들의 둥지(5) (수정) +13 19.12.27 7,783 169 14쪽
14 Ep4. 그들의 둥지(4) +5 19.12.26 7,709 173 13쪽
13 Ep4. 그들의 둥지(3) +6 19.12.25 7,789 180 12쪽
12 Ep4. 그들의 둥지(2) +8 19.12.24 8,106 185 14쪽
11 Ep4. 그들의 둥지(1) +12 19.12.23 8,629 171 14쪽
10 Ep3. 일단 구경이나 하자.(5) +8 19.12.22 8,683 166 13쪽
9 Ep3. 일단 구경이나 하자.(4) +15 19.12.20 8,713 168 13쪽
8 Ep3. 일단 구경이나 하자.(3) +16 19.12.19 8,960 184 12쪽
7 Ep3. 일단 구경이나 하자.(2) +6 19.12.18 9,663 189 13쪽
6 Ep3. 일단 구경이나 하자.(1) +18 19.12.17 10,075 203 13쪽
5 Ep2. 그저 살아남고 싶다.(4) +14 19.12.16 10,182 200 14쪽
4 Ep2. 그저 살아남고 싶다.(3) +13 19.12.14 10,507 198 14쪽
» Ep2. 그저 살아남고 싶다.(2) +11 19.12.13 10,792 215 13쪽
2 Ep2. 그저 살아남고 싶다.(1) +15 19.12.12 12,304 205 13쪽
1 Ep1. 프롤로그 +14 19.12.11 13,668 181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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