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그저 살아남고 싶다.(4)
캄캄한 밤, 무기고 앞 공터.
무기고 관리자 빌리와 활잡이들은 모닥불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그쪽으로 다가오자, 그를 발견한 빌리의 눈이 갑자기 동그래졌다.
“아니 자네··· 자네 이름이 라이센 맞지?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인가?”
“이렇게 또 뵙는군요. 잠시 거닐고 있었습니다.”
“어, 어서 여기로 앉게. 괜찮으면 우리랑 한잔하는 게 어떤가?”
“뭐 조금 주신다면야···”
빌리가 라이센을 자리에 앉혔다. 그제야 라이센을 알아본 활잡이들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이리 깨끗이 씻고 새 옷을 입으니 하마터면 못 알아 볼 뻔했네. 자네 보기보다 멀쑥하게 생겼었구먼!”
“조금 전까지 우리 자네 얘길 하고 있었네. 이거 참 놀랍군.”
“이, 일단 한잔하게.”
라이센은 활잡이 하나가 내준 준 술을 받았다. 싸구려 술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제 얘기를요?”
“그러네. 여기 이 친구는 조금 전까지 자네가 활 쏘는 자세를 흉내 내고 있었다니까.”
술이 한 순배 돌자 활잡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오늘 낮에 있었던 결투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오늘 장갑병대 놈들 표정 봤나? 아 글쎄 케이드 그놈이 쓰러지자마자 우리 눈치를 슬쩍슬쩍 보지 뭔가!”
“그놈들 활로는 절대 칼을 못 이긴다고 으스대더니 꼴도 좋다. 크하하!”
“하여튼 고맙네. 케이드 그놈, 그 어린 놈의 새끼가 지 애비만 믿고 어찌나 패악질해댔는지 말도 못하네.”
“내가 뭐랬나? 활이 사실 근거리에서도 강한 무기라고 말하지 않았나? 오늘 여기 이 친구가 그걸 증명한 거라고.”
“뭐? 자네가 언제 그런 말을 했던가?”
라이센도 스스럼없이 어울려 함께 술을 마셨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그가 나무로 된 원형의 통 하나를 내밀었다.
“짜잔, 선배님들 이걸 보십시오!”
“서, 선배?”
“어? 그게 뭔가? 혹시···?”
“생각하고 계신 것 맞습니다.”
라이센이 나무통의 뚜껑을 따자 은은하면서도 고급진 포도주 향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는 냄새를 맡아 보라는 듯 통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손을 휘저으며 냄새를 맡아보던 활잡이들이 소리쳤다.
“이거 혹시 쟈블리아산 적포도주 아닌가.”
“쟈, 쟈블리아산 적포도주!”
“세상에, 이 귀한걸!”
라이센은 술통을 빌리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사실 오늘 킵에서 음식 대접을 받을 때 하나 슬쩍해서 가져왔습니다.”
“자네가 이걸? 설마 우리에게 주려고?”
“아까 선배님께서 좋은 무기를 골라주신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깟 술로도 모자란 것 아니겠습니까?”
“자네, 이 사람···”
관리자 빌리는 술통을 받아들고는 감동한 듯 숨을 크게 들이켰다. 향긋한 포도주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나도 맛 좀 보세!”
“나, 나도!”
“하하, 여기 사실 한 통 더 있으니 많이들 드십시오.”
활잡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술잔을 내밀었다. 그들은 난생처음 맛보는 최고급 술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포도주 두통이 순식간에 동났고, 결국 모두 거나하게 취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라이센에게 물었다.
“이보게 라이센. 자네 활 쏘는 자세가 많이 특이하던데. 혹시 거기에 어떤 비결이 있는가?”
“아, 연습만 하시면 선배님들도 쉽게 따라 하실 수 있습니다. 다들 궁술에는 저보다 더 도가 트신 분들 아닙니까?”
“도, 도가··· 커흠. 어쨌든 그럼 한 수 부탁하네. 선배가 후배에게 묻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나, 나도 부탁하네.”
라이센이 일어나서 활을 당기는 시범을 보였다. 활잡이들은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봤다.
“뭔가··· 절도가 느껴지는군.”
“그러게. 우리와는 달라.”
“활을 위로 살짝 들어서 멈춘 다음, 내리면서 당기는 거구먼.”
라이센이 살을 다시 얹으며 말했다.
“그거보다 중요한 게 화살을 엄지와 검지로 당기는 겁니다.”
“잉?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서 당기는 게 아니라?”
“한번 그렇게 살을 얹어 보십시오.”
“이, 이렇게?”
조금 어색해하긴 했으나 다들 그렇게 화살을 얹었다.
“그 상태에서 꼬집듯이 시위를 당겨 보십시오.”
활잡이들이 시위를 힘껏 당겼다.
그리고 스스로 당긴 시위의 넓이를 확인하고는 스스로 놀라기 바빴다.
“빌리, 지금 나 보고 있나? 시위 끝이 거의 내 귀까지 닿는 것을!”
“세상에, 이런 법이 있었을 줄이야!”
“이야, 이거 활이 거의 부러질 정도 아닌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살을 끼워 당기는 방법은 기껏해야 시위의 끝이 사수의 볼 정도에 위치한다. 하지만 엄지와 검지로 잡으면 시위의 끝이 사수의 귀를 넘길 수 있다.
어쩌겠는가? 사람의 신체구조가 그러한걸. 어떻게 당기는 게 더 멀리, 그리고 강하게 날아갈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선배님들은 지금 화살을 활대의 오른쪽에 걸고 있습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헛,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됐네. 왼쪽으로 고쳐 걸어야 하나?”
“아닙니다. 원래 오른쪽에 거는 게 맞습니다.”
“외, 왼쪽이 아니라고?”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엄지와 검지 사법을 쓰면 자연스레 살을 활의 오른쪽에 걸게 된다.
“화살을 화살집에 넣었다가 다시 한 번 해보십시오. 동작이 훨씬 빨라졌을 겁니다.”
“아, 알겠네.”
빌리는 어제만 해도 자신이 라이센의 자세를 지적질했던 일을 새카맣게 잊었다. 그는 몇 번 동작을 따라 해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놀랍군. 이게 확실히 동작이 빨라. 근데 화살 머리가 자꾸 밑으로 떨어지는데?”
“오른손으로 살을 당기는 동시에 횡으로도 힘을 줘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 그런가?”
활의 왼쪽에 살을 걸면, 활대를 잡은 왼손 위에 살의 머리가 올라가게 된다. 그래서 딱히 횡으로 힘을 줘 버틸 필요가 없다. 신체 구조상 그러기도 불가능하지만.
하지만 활의 오른쪽에 살을 걸면, 왼손이 살을 받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시위를 당기고 있는 오른손에 횡으로 가하는 힘도 넣어야 한다. 그래야만 살 머리가 고정된다.
“음, 해보니까 조금 불편한데. 이리하는 이유가 또 있나?”
“시위를 한껏 당긴 상태에서 옆으로 걸어 보십시오.”
그대로 따라 해보던 빌리가 깜짝 놀랐다. 본인이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살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줌손에 살을 올려두는 왼쪽걸이 방식은 사수가 몸을 움직이면 살이 흔들린다. 애초에 살을 고정하는 힘이 전혀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른걸이 방식은 당기는 손의 힘으로 살을 강제 고정한다. 몸을 움직여도 살이 흔들리지 않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이, 이거 엄청나구먼. 왔다 갔다 해도 살이 전혀 안 흔들려.”
“좀 더 연습하시면 달리면서도 쏠 수 있습니다.”
왼쪽걸이 방식은 활을 쏘려면 반드시 멈춰서야 한다. 하지만 오른걸이 방식은 걷거나 달리면서 그대로 활을 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차이는 실로 엄청난 전력 차를 불러온다. 달리면서 활을 쏘는 고급기술은 말할 것도 없고, 활을 당기는 사수가 멈춰 섬으로써 되려 손쉬운 표적이 되는 것도 막을 수 있다.
라이센은 설명을 하면서 현생의 활잡이들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활잡이들이 이를 따라 해보며 저마다 탄성을 내질렀다.
활잡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라이센이 알려준 방법을 연습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들을 한참 지켜보며 자세를 교정해 주던 라이센이 자리에 앉자 빌리가 따라 앉았다.
빌리는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표정으로 라이센에게 넌지시 물었다.
“자네 혹시 뭐 필요한 건 없나?”
“하하, 선배님께서 이미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제가 뭐 바랄게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 겸손하기는. 내 뭐라도 돕고 싶어서 그러네.”
“그럼···”
라이센이 사뭇 어려워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 입을 열었다.
“혹시 썩어서 못 쓰는 화살이라도 몇 개 좀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데, 보시다시피 화살이 하나도 없어서요.”
“아니, 그러면서 썩은 화살이라니 그 무슨 가당치 않은 말인가!”
그때 연습을 하던 활잡이들이 이를 듣고 우르르 몰려왔다.
“빌리, 지금 뭐하나? 그깟 화살 다발로 가지고 나오지 않고.”
“그러게, 우리 후배님에게 그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잠시 기다려 보게. 썩은 화살이라니 나를 어떻게 보고···”
말을 마친 빌리가 무기고로 뛰어들어갔다. 한참 만에 다시 달려 나온 그의 손에는 화살 몇 다발과 다른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여기 최고품질 화살을 고르고 골라 두 다발 가지고 왔네. 모자라면 말하게.”
“정말 고맙습니다. 이거면 충분합니다.”
라이센은 화살 다발을 받아 자신의 화살집에 꽂아 넣었다. 그 모습을 인자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빌리가 손에 든 두툼한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건 뭡니까?”
“그리핀 가죽으로 만든 갑옷이라고 들어는 봤나?”
“예? 그리핀이요?”
“그래, 하늘을 나는 괴물이지. 괴물인 만큼 가죽은 튼튼하지만, 하늘을 나는 놈이니만큼 무게는 가볍지. 민첩함이 생명인 우리 활잡이들에게 최고의 갑옷 아니겠는가. 남은 자투리로 만들어서 좀 엉성하긴 하지만 충분히 도움이 될 걸세.”
“이거 엄청나게 귀한 것 같은데, 감히 제가 가져도 되는 겁니까?”
“하하하, 내가 무기고지기만 십 년 했네. 이깟 거 하나 꼬불쳐 놓는 것은 일도 아니지.”
무려 그리핀 가죽 갑옷이라.
라이센이 옷 위에 갑옷을 걸쳐 입었다. 두드려 보자 웬만한 칼날은 먹히지도 않을 만큼 단단함이 느껴졌지만, 거의 입지 않은 것처럼 가벼움도 느껴졌다.
소가죽으로 만든 갑옷도 평민들은 가지기 힘들다. 하물며 그리핀 가죽 갑옷이라. 아무리 취했다지만 빌리가 조금 무리했음은 틀림없었다.
‘솔직히 이 정도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이때 지켜보던 활잡이 하나가 갑자기 자기가 입고 있던 후드를 벗어 라이센에게 내밀었다.
“이건?”
“자고로 활잡이는 후드를 눌러써야 더 있어 보이는 것 아니겠는가. 뭐 빌리가 준 갑옷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난 이걸 눌러쓰면 활 쏠 때 집중력이 높아지는 것 같아 애용했네. 참고로 어제 마련한 새것일세.”
“선배님들, 이렇게까지··· 대체 이 은혜를 어떻게···”
“사양 말고 어서 입어 보게.”
솔직히 새것 같지는 않았지만, 꽤 좋은 후드임에는 분명했다. 후드가 목과 팔 부분의 맨살에 닿았지만 까끌까끌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한참 그렇게 서로 덕담을 나눈 뒤 라이센이 문득 작별을 고했다. 아쉬운 표정을 짓던 빌리가 물었다.
“그럼 어디로 갈 생각인 겐가?”
“예, 이 길로 곧장 고향인 피닉스 성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뭐? 가는 길에 매우 위험할 텐데, 괜찮겠는가?”
빌리와 활잡이들은 한사코 말렸으나 라이센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런 라이센이 측은했는지 모두 라이센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조심하게.”
“언제나 빛의 신 라크슈의 가호가 깃들길.”
“예, 언제 다시 뵐진 모르겠지만, 선배님들도 건강히 지내십시오.”
석별의 정을 나눈 후 라이센은 성의 동쪽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의아했던 빌리가 라이센을 불러 세웠다.
“이보게, 피닉스로 가는 방향은 북문일세.”
그 말을 들은 라이센이 씩하고 웃으며 말했다.
“예, 선배님. 전 지금 분명 북문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잉? 그게 무슨··· 아하, 알겠네. 내 분명 잘 알아들었네. 크하하.”
숨은 뜻을 이해한 빌리가 크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른 활잡이들도 소리 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던 중 뭐가 아쉬웠던지 빌리가 라이센을 다시 한 번 불러 세웠다.
“이보게, 라이센.”
“예, 부르셨습니까?”
“커 흠, 그 뭐냐··· 선배님이라는 말 정말 듣기 좋았네!”
그 말에 라이센이 말없이 엄지를 세워 보였다. 빌리와 활잡이들도 엄지를 세웠다. 라이센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그들은 뭔가를 더 주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
라이센이 떠나고 약간의 시간이 더 흘렀다.
두두두두.
자리를 정리하던 빌리와 활잡이들은 어둠 속에서 여러 필의 말발굽 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들었다.
호위기사 요란트와 기사단 십여 명이 무기고 앞으로 다가왔다. 이런 늦은 시간에 완전무장을 한 그들의 낌새가 범상치 않다.
이에 빌리가 활잡이들을 번갈아 본 후 앞으로 나섰다.
“요란트 경,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이보게, 빌리. 혹시 오늘 그 라이센이라는 포로 놈이 여기 들르지 않았나? 알다시피 그놈과 조금이라도 말을 섞어본 자는 자네가 유일하지 않는가.”
“아, 예. 조금 전까지 저희랑 여기서 술을 한잔했습죠. 무슨 문제가 있는지요?”
그 말에 눈을 부릅뜬 요란트가 물었다.
“거짓으로 대답할 경우 네놈의 멱을 딸 것이다. 그놈은 지금 어디로 갔느냐?”
“그놈은 고향인 피닉스로 간다며 북문으로 향했습니다. 그게 뭐라고 저희가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알면 됐다. 너희는 신경 꺼라.”
말을 마친 요란트와 기사들이 부리나케 북문을 향해 달렸다.
‘제길, 북문이라. 지금 시각이면 틀림없이 괴물들이 쏟아져 나올 텐데··· 하는 수 없군. 그것들을 뚫고서라도 놈을 추격하는 수밖에 없어. 놈이 괴물에게 뒈졌다면 시체라도 반드시 찾아와야 한다.’
요란트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반드시 라이센을 잡아 오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는 괴물이 득실대는 북문으로 빠져나가다니 역시 보통 놈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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