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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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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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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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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7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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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17. 송가미록

DUMMY


“돼지야, 잊지 마!”


나루는 귀띔을 해주고 얼른 서점으로 돌아갔고 시현과 금손은 차에 올랐다.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금손은 몸을 떨더니 소르르 줄어들면서 노란 고양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어휴, 조금만 더 늦었으면 꼬리가 튀어나올 뻔했군. 살짝 버티기 힘들어지던 참이었어.”


고양이가 앞발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고생하셨어요. 덕분에 송가미록을 절반이나마 찾았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음, 나루가 빨리 눈치채고 연락해준 덕분이지. 나루는 송가미록에 대해선 모르지만 후각이 좋아서 죽림의 흔적을 맡아낼 수 있었다더군.”

“그 나루라는 강아지는 삼족구라던데, 혹시 옛이야기에 나오는 그 삼족구인가요?”

“그렇다네. 은롱이나 마찬가지로 아직 나이가 어린 편이지만 성품이 좋은 아이야. 잠재력도 뛰어나고.”

“나루서점 유 사장님은 나루가 삼족구인 걸 모르나 보지요?”

“그렇지. 나루가 비밀로 하고 있어. 나도 그냥 고서에 관심이 많은 개인 수집가로 알고 있고.”

“제가 예전에 어떤 책에서 보니까 삼족구는 구미호를 잡는 천적이라고 하던데.”


금손이 고르릉 목을 울리면서 웃었다.


“선조들 이야기긴 하지만 그래서 은롱이가 나루를 꺼리지. 아마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나 봐.”


그래서 은롱이가 같이 안 오려고 했구나. 하긴 꼭 구미호와 삼족구가 아니더라도 개와 여우는 원래 상극이긴 하지. 그렇지만 그 나루라는 삼족구는 은롱이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


“이 책이 그 송가미록인가요?”


송가미록의 절반을 찾은 것을 알자 세나와 은롱은 둘 다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 한 명은 차분하게, 한 명은 호들갑스럽게 시현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온전한 책이 다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우시겠어요.”

“그러니까, 너무 아깝다. 나머지도 빨리 찾으면 좋겠다.”


세나와 은롱의 말에 이어 금손이 입을 열었다.


“집에 가서 보려고 하지 말고 여기서 보게. 집보다 훨씬 읽기 쉬울 거야.”

“여기 빈자리 말씀인가요?”

“그렇지, 내가 읽는 걸 도와준다고 했었잖아. 내 방으로 좀 따라오겠나?”


금손은 이 층 자기 방에 시현을 데려가서 작은 서안 앞에 앉게 했다.


“여기다 책을 펴고 앉아 보게.”


시현이 송가미록을 펴고 앉자 금손이 말했다.


“글이 보이는 부분은 집에 가서 읽으나 여기서 읽으나 똑같겠지만, 빈 부분은 다를 거야. 도깨비불과 같지. 집에서는 보기 어렵지만 죽림의 공간에서는 훨씬 보기 쉬울 거거든. 우선 한번 보게.”


시현은 송가미록을 편 다음 노르스름하게 바랜 빈 종이를 한 장씩 넘겨 가며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예전에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나?”

“예.”


시현이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금손이 다시 말했다.


“도깨비불을 한번 꺼낸 뒤 다시 보게.”


도깨비불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시현은 손을 펴서 도깨비불을 소환했다.

집에서는 소환되지 않던 도깨비불이 죽림에서 소환하니까 금세 퐁 튀어나왔다.

지난번에 처음 꺼냈을 때는 밤알만 해서 불덩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작았는데 그새 아기 주먹 정도로 커져 있었다.


“오, 전보다 좀 커졌군.”


금손이 감탄하더니 다시 지시했다.


“도깨비불을 켠 채로 책을 다시 보게.”

“그래도 이거 불인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시현은 도깨비불이 동동 뜬 손을 의식적으로 책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있었다. 혹시 불똥이라도 떨어지면 어떡해?


“아직은 뭘 태울 정도로 힘이 없으니까 괜찮아. 그래도 걱정되면 왼손을 책에 대고 있게. 도깨비불은 주인의 명령이 없는 한 주인 몸에 붙어 있는 것은 절대 태우지 않거든.”


시현은 금손의 말대로 도깨비불을 손에 띄운 채로 송가미록의 빈자리를 한 장씩 천천히 살펴보았다.

첫 장, 둘째 장, 세 번째 장까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네 번째 장에 갑자기 어른어른 글씨 같은 것이 나타났다.

흥분한 시현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금손 씨! 여기 글씨 같은 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손에 띄운 도깨비불을 촛불처럼 비추면서 책장을 눈 빠지게 들여다봤는데, 위쪽 두어 줄 정도가 드문드문 어른어른 보이기 시작했지만 명확하게 읽을 수는 없었다.


“생강, 서천······, 소리······꽃?”


겨우 몇 자 읽어낸 시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금손을 올려다보자 금손이 앞발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역시 도깨비불을 켜면 보이는 글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네.”

“왜 그렇게 되는 거죠?”

“왜냐하면, 송가미록의 이 빈자리를 읽으려면 다른 이의 마음을 울리는 음식을 해야 하거든. 그런데 자네는 도깨비의 마음을 울리는 음식을 해냈잖아.”

“······.”

“윤수가 여기에 적은 조리법은 윤수가 당시 죽림 전당포의 재료를 이용해서 했던 요리라네.”


금손은 먼 곳을 보는 것처럼 문밖의 대숲 쪽을 쳐다보았다.

대숲을 지나는 바람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금손 씨. 이번 요리는 어떻습니까? 감히 치유의 요리라 부를 만할까요?”


***


송윤수는 어릴 때부터 죽림에 드나들다 보니 죽림의 특별한 식자재를 종종 접하게 되었다.

호기심이 많고 도전 정신이 강하던 그는 다양한 요리를 연구했는데 죽림에 오는 손님들 중에는 이야기를 팔고 몸이나 마음의 치유를 대신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송윤수는 치유를 위한 요리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고, 세루의 허락하에 죽림의 식자재를 이용해 손님의 병을 치료할 만한 요리를 연구했다.


말년에 그가 송가미록을 집대성할 때 그는 송가의 요리뿐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치유의 요리 조리법도 함께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재료로 만든 신비의 요리 조리법을 남겨 봐야 허무맹랑한 글이라고 버려질 것이 뻔했다.


그는 고민 끝에 송가미록의 중간 부분에 자신이 개발한 치유의 요리를 적어넣었다. 그리고 세루에게 부탁해 그 부분이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주술을 걸었다.

후일 누군가 죽림 전당포의 식자재를 사용할 수 있는 요리사가 나온다면, 그리고 그가 다른 이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요리를 꾸준히 해낸다면 그때에야 조금씩 글을 볼 수 있도록.


“세루 님, 금손 씨, 후일 누군가 인연이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제가 남긴 조리법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때 송윤수는 이미 머리가 허옇고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되었지만 세루와 금손 앞에서는 여전히 오래전의 활기찬 소년처럼 눈을 반짝였다.


“제 아들과 손자는 죽림을 보지 못하니 이걸 읽을 수도 없지만, 백 년이든 이백 년이든 지나다 보면 누군가는 이걸 읽고 요리로 되살려줄 만한 녀석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때 잘 좀 부탁드립니다. 이런 요리를 만들어낸 제 칭찬도 좀 해주시고요!”


송윤수는 주름진 눈가에 장난기를 띠고 손가락을 세워 흔들었다.


“아, 그렇다고 제가 평생에 걸쳐 이루어낸 조리법인데 쉽게 얻어가게 하진 마시고, 충분한 수행을 시켜주세요.”


그때 세루가 웃으며 말했다.


“치유의 조리법을 얻는 것만도 요리사로서는 큰 이득이겠지만, 그렇게 열심히 수행을 해나갈 수 있는 후손이라면 상도 주어야겠지. 내가 힘을 좀 쓰마.”


세루는 윤수의 조리법에 주술을 걸어 후인이 한 가지 조리법을 터득할 때마다 한 가지 능력을 깨칠 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


“세루 님의 힘까지 더해졌으니 이걸 읽을 수 있는 요리사가 나온다면 정말로 인간의 한계를 넘는 요리사가 되겠군요. 좀 부럽기까지 한데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완성된 송가미록을 쓰다듬는 윤수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


“처음 한 글자를 읽기 시작하는 게 가장 어렵지. 그런데 시현이 자네의 요리가 두두리를 감동시켰기 때문에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네. 두두리의 마음이 깃든 도깨비불도 자네에게 힘을 보태줄 것이고.”


금손의 말을 들은 시현이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그럼 혹시 한 가지 조리법을 보기 위해 다른 이의 마음을 울리는 요리를 몇 가지나 해야 하는지는 아시나요?”


금손이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세루는 알고 있었지만 난 모른다네. 세루는 그때도 나보다 몇백 년이나 나이가 많았지만, 설마 세루가 나보다 먼저 죽림을 떠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 그럴 줄 알았으면 주술의 조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물어봐 뒀을 텐데.”


가볍게 한숨을 쉰 금손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건 확실해. 수행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글자가 더 빨리 보이게 된다네.”


금손의 말을 곱씹어보던 시현이 고개를 들면서 금손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저 더 열심히 수행해서 꼭 고조부님이 남기신 조리법을 읽고 한계를 넘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늘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금손 씨.”


확신에 찬 얼굴로 싱긋 웃는 시현의 미소는 백여 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오래전 송윤수의 웃음과 무척 닮아 있었다.


***


“형, 또 송가미록 읽고 있어?”


은롱이 시현의 옆구리에 붙으면서 시현이 보고 있는 송가미록을 넘겨다보았다.


“응.”

“빈자리를 보고 있는 건 아니네?”

“응, 빈자리는 내가 수행을 더 많이 해야 읽을 수 있대. 지금은 고조부님이 기록해 두신 송가의 요리를 보고 있어.”


송가미록은 두께가 만만찮은 책이다. 어쩌면 송가미록을 삼촌에게 구입한 사람도 그래서 이 책을 반으로 나눴을지 모른다. 중간에 빈 종이가 십여 장 있으니 거기서 나누는 게 적절해 보이기도 했을 테고.


“나루서점 사장님한테 책값 대신 송가미록의 요리를 하나 해드리기로 약속했거든. 뭔가 좋은 걸 만들어 드리고 싶어서 살펴보고 있어.”


책장을 넘기던 시현이 턱을 고였다.



“송가의 궁중요리를 드셔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던데, 열구자탕이나 오골계찜이 유명한 편이긴 하지만 닭보다는 돼지고기를 좋아하신다고 했으니 맥적이나 연저육찜 같은 게 나으려나?”

“유 사장님이 돼지고기를 더 좋아한다고? 누가 그래?”

“나루라는 삼족구가 그러던데?”


은롱이 조그맣게 콧방귀를 뀌었다.


“자기가 돼지고기 좋아하니까 그랬네.”


은롱의 얼굴이 샐쭉해지는 걸 보니 왠지 웃음이 나서 시현은 송가미록에서 눈을 떼고 은롱 쪽으로 돌아앉았다.


“은롱이는 나루가 싫어?”


은롱이 입을 약간 삐죽거리다 대답했다.


“싫은 건 아니지만 좀 불편해.”

“삼족구가 구미호의 천적이라서?”


은롱은 머뭇거리다가 도리도리를 했다.


“아니야. 옛날엔 천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고 예의를 차린 지 오래됐다고 했어.”


은롱은 조금 자존심이 상했는지 코끝을 치켜들면서 덧붙였다.


“구미호는 약하지 않아. 지금 나루랑 싸워도 내가 이길 수 있어!”

“싸워? 왜? 나루랑 싸워 본 적 있어?”

“없지만! 싸워도 지진 않는다고!”


작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꼬리를 부풀린 은롱의 모습을 보니 삼족구에게 지지 않겠다는 구미호의 자존심인 모양이었다.


“그래, 우리 은롱이 강하다!”


시현은 은롱의 궁디를 팡팡 쳐주고 다시 송가미록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나루서점에는 주방이 없는 것 같던데, 요리를 어떻게 해드려야 할까? 여기서 해서 갖다 드려야 하나, 아니면 댁에 가서 요리를 해드려야 할까?”


죽림 전당포는 유 사장에겐 비밀인 모양이니 전당포로 부를 수는 없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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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4. 고종 냉면(2) +6 24.06.08 457 38 12쪽
39 24. 고종 냉면(1) +7 24.06.07 458 35 11쪽
38 23. 향설고 +5 24.06.06 464 41 12쪽
37 22. 몽중시(夢中市)(2) +4 24.06.05 466 41 13쪽
36 22. 몽중시(夢中市)(1) +5 24.06.04 475 4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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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1. 나미와 미미(1) +5 24.06.02 474 3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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