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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알 님의 서재입니다.

아카데미에서 시한부는 죽어갑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외로운해
작품등록일 :
2021.02.12 20:36
최근연재일 :
2021.04.09 17:56
연재수 :
4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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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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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502

작성
21.02.1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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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003. 새로 사귄 친구가 말썽입니다

DUMMY

어느덧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케이몬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밤새 이 상태로 잔 건가?'


일기를 쓰다가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든 모양이었다.

그 대가로 온몸을 비틀자 뼈가 비명을 질렀다.


'목이 너무 아프다.'

"하암···."


하품을 내뱉으며 케이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능력 검사를 하는 날이지만 등교 준비는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잠에서 깨기 위해 찬물로 세면까지 마치자 얼굴이 얼얼했다.


거울 앞에 서서 복장 점검까지 마친 그는 오늘도 어제처럼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다른 장르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식당에 가서 아침을 때웠다.


"오늘도···."

"세상에···!"

"도대체 무슨 일이지?"

"저 스토커가 이틀씩이나 떨어지다니···."


들어오면서 셀레네를 발견했지만 케이몬은 이번에도 그녀와 한참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식사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잡다한 소리가 많이 들려 왔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케이몬."

"아르콘?"


어제 막 친구 사이가 된 아르콘이 반가운 얼굴로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혼자입니까?"

"네."


케이몬의 주위에는 여느 학생들이 앉지 않았기 때문에 휑했다.

아르콘은 자연스럽게 케이몬의 앞자리에 앉았다.


"쟤는 누구지?"

"생긴 걸 보니까 무인은 아닌 것 같은데?"

"나 쟤 알아. 바람 마법학 수업에서 본 것 같은데."

"누군데 저 스토커 앞에 앉을 생각을 했을···"


케이몬은 셀레네 이외에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남학생이 친근하게 앞자리에 앉으니 놀란 눈치였다.


"저랑 같이 식사해도 되겠습니까? 시선이 아주 따가운데요?"

"원래 우직한 독자는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법입니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지 태연하게 포크로 큰 고기 한 점을 푹 찍어 입에 넣었다.


"아침부터 고기가 들어갑니까?"

"원래 아침에 먹는 고기가 맛있는 법입니다. 한 점 드릴까요?"


그가 대뜸 큼지막한 고기 한 덩어리를 내밀자 케이몬은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저는 이걸로도 충분합니다."


케이몬은 접시에 마지막으로 남은 마들렌을 해치웠다.


"그걸로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겠습니까?"


아르콘은 대식가에다 고기를 엄청나게 좋아하는지 맨 처음 가져왔던 접시에는 고기가 산을 쌓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케이몬의 식사가 부실해 보였나 보다.


"저는 괜찮습니다. 원래 입이 짧은 편이라."


케이몬이 살짝 웃음을 보이자 멀리서 그를 주시하고 있던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그를 홀린 듯 쳐다봤다.


'잘생겼다···.'

'예뻐··· 어머.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역시 외모는······.’


다들 케이몬을 피하고 조롱하지만, 외모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미모였다.

그런 이들의 감상을 알 리 없는 아르콘은 어느새 접시를 깔끔하게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기다리던 케이몬도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를 반납하고는 아르콘의 곁으로 다가갔다.


"음? 뭘 보는 건가요?"


아르콘이 계속 힐끔대는 것이 이상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셀레네··· 아직도 있었네.'


자신이 들어올 때부터 식사하고 있길래 이미 간 줄 알았는데.

아직 그녀의 접시에는 음식이 남아 있었다.


번잡한 식당을 빠져나오고 침묵을 지키며 걷던 아르콘이 문득 입을 열었다.


"저는 역시 아직 포기하지 못하겠습니다."

"뭘요?"

'사람 불안해지게 왜 이래.'


아르콘이 좀 특이한 게 아니라서 뭔가를 하겠다고 하면 걱정부터 앞섰다.


"케이몬과 셀레네가 이어지는 것 말입니다."

"···친구는 원래 친구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는 겁니다."

"곤경에 빠진 친구를 구하는 것도 친구의 의무입니다."

"안 빠졌습니다."

"빠졌습니다."

"······."


끝도 없이 밀어붙이는 이 친구를 어떻게 갱생시켜야 할까···.

참 난감하다.


"그 비밀을 밝힐 수 없다는 건 이제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케이몬. 그렇다고 어째서 사랑까지 포기하는 겁니까?"

"······."


케이몬은 당장 입을 열고 변명하지 못했다.


자신이 병에 걸렸고, 그 탓에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말을 어떻게 할까.

그것도 바로 어제 사귄 친구 앞에서.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찌해도 짝사랑이 끝날 것 같지 않아서 포기한 겁니다."

"당신이요? 2년을 넘게 그녀가 싫다 해도 따라다닌 당신이요?"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건 나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요."

"그러면 당신은요? 당신의 행복은 누가 줍니까?"

"···저도 언젠가는 셀레네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다음 생, 아니 다다음 생이 될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다.


'이번 생은 글렀으니까.'


만약 다시 태어나서 기억이 지워진다면 다시 사랑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셀레네가 아니면 안 돼.'


그녀에 대한 사랑이 마음 깊은 곳까지 녹아들어 있는 지금은.


아르콘은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는 인정 못 합니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이것만은 양보하지 못합니다."

"하지 못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저는 저 나름대로 당신과 셀레네 사이를 개선시킬 겁니다."

"하지 말라니까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자 막막해진 케이몬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가 넘는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오, 웬일이래?'

"그저 케이몬이 착한 일을 하면 그걸 널리 소문내서 알리고."

'아. 제발.'

"반대로 케이몬의 소문이 이상하게 퍼진다면 그 소문을 바로 잡을 것입니다."

"······그래요. 그 정도야 마음대로 하세요."


저런 노력으로는 셀레네가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 하에.

케이몬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괜히 이것마저 말렸다가 더 이상한 짓을 하려 들지도 모르니까.'

"감사합니다."


막혔던 응가가 시원하게 나온 사람처럼.

부들대며 떨던 그는 다시 곧게 걸었다.

케이몬은 그런 그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정말 별난 인간이야.'


*


능력 검사는 각자의 전공과목을 진행하는 건물에서 치러진다.

아르콘은 아쉽게도 전공이 마법 쪽이기 때문에 마법관으로 가야 해서 중간에 헤어졌다.


'어디 보자 내 이름이···.'


본관 로비 게시판에 어디로 가야 할지 나와 있었다.

케이몬이 배정받은 곳은 2층 강의 3실이었다.

검사는 강의실 내부에서 한 명씩 진행하기 때문에 대기 인원은 복도에서 기다려야 했다.


'다들 빠르네.'


식당에서 나름 빨리 나온 편이라 생각했는데.

벌써 도착해서 책을 읽거나 제 할 일을 하며 기다리는 애들이 어림잡아 20명 정도였다.


케이몬은 강의실 문 앞에 붙어있는 공지를 읽었다.


'호명하면 들어오세요.'


그는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검사 시작까지 얼마나 남았다 싶어 시계를 보니 7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0분 남았네.'


검사 시작 시각은 원래 수업 시작 시각하고 똑같았기에 대충 그 정도 남은 셈이었다.


'슬슬 다른 애들이 올 시간인데···.'


케이몬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학생들도 검사장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먼저 온 학생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내 옆에는 절대 안 앉네.'


다들 이곳의 빈자리를 눈여겨보면서도 이쪽을 보고 포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카테 말라코스. 들어오세요."

"지금 갑니다~."


드디어 첫 번째 주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맨 처음에 저걸 해 봤을 때는 정말 신기했는데.'


검사는 실제 같은 환상 속에서 주어지는 문제를 풀면 되는 방식이었다.


'벌써 끝났나?'

"하······."


짙은 한숨을 내쉬며 걸어 나오는 남학생은 아무래도 원한 결과를 얻지 못한 것 같았다.

이어서 검사를 치르는 학생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었다.


"아싸! 나 점술 위계 올랐어!"

"뭐? 부럽다···."


좋은 결과를 받고 환호하는 학생.


"결과는 어때?"

"그냥 예상한 대로지. 애초에 내 능력부터가 이런데."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아서 담담한 학생.


"······."

"아, 말하지 마. 안 해도 알것 같다."

"너무해······."


검사 결과에 한탄하며 낙담하는 학생까지.


'나는 저 중에서도 두 번째지.'


애초에 치료 능력은 향상이라는 게 거의 없다. 그래서 기대하지도 않는다.


"케이몬 앙겔로스. 들어오세요."

"네."


케이몬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의 시선이 꽂혔다.


'쟤는 그래도 좋겠다. 치료 계열이라서···.'

'스토커가 치료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밸런스입니까. 신이시여···.'

'위계 하락은 왜 없는 거지?'


학생들의 부러움과 시기를 뒤로하고.

케이몬은 검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


검사장이 된 강의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안개에도 당황하지 않고 통과했다.


"첫 번째 검사입니다."


모습을 숨긴 검사관의 목소리가 안개 속에서 울려 퍼졌다.


"눈앞에 놓인 동물을 최대한 치료하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개 속에서 나타난 동물은 거대한 곰이었다.


'이번에는 곰이네.'


1학년 때는 토끼, 2학년 때는 순록이더니 이번에는 곰이 나왔다.

곰은 다른 짐승과 다툰 것인지 배에 심각하게 할퀸 상처와 몸 전체적으로는 자잘한 상처가 즐비했다.


'이번에도 3단계겠지.'


학년이 올라갈수록 제시되는 문제의 수준은 올라가는 데 반해,

실력은 여전할 거라고 생각했다.


케이몬은 곰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진짜처럼 움찔하는 곰.


'이런 상처는 어디까지 치료할 수 있을까.'


원래는 심장에 있는 근원의 샘에서 재생과 정화의 기운을 적절하게 분배, 조합 치료를 하면서 중간중간 자잘한 상처에 박힌 이물질을 제거하며 해야 하지만.

이것은 오직 치료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시험이었기 때문에 그냥 능력을 전력으로 쏟아부으면 됐다.

케이몬도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기 위해 전력을 다해 치료의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자 손에서 나와 곰을 감싸기 시작하는 검은 기운.

기운의 색깔은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그중에서도 검은색은 좀처럼 보기 힘든 축에 속했다.


'생긴 건 이래도 나름 쓸만한데···.'


음료수를 약이라 생각하고 먹었더니 나았다는 말이 있듯이.

검은 기운이 꺼림칙한 탓에 다들 케이몬의 치료 자체는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사실은 그걸 쓰는 사람 때문에 꺼리는 건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얼마 만에 써 보는 건지···.'


치료학 수업 때만 쓰고 나머지는 쓸 일이 별로 없어서 거의 3달 만인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치료가 잘 되는 것 같지?'


곰이 입었던 상처가 어느덧 다 아물어 가고 있었다.


'내 실력이 늘었을 리는 없고···. 난이도가 쉬운 건가?'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완전히 회복했다 싶은 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기가 거의 케이몬의 두배라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얼굴이 보였다.


'왜 다가오는 거지?'


곰이 점점 가까워지자 케이몬은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환상이라지만 진짜처럼 생긴 곰이 주는 위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뭐지? 뭐야?'


설마 공격할까 하는 심정으로 가만히 있었는데···.

막상 코앞까지 다가오니 가만히 있던 게 후회스러워졌다.


"으. 음?"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짓도 하지 않고 단지 몸을 숙여 케이몬과 포옹했다.


'따뜻하다.'


환상 속에서 온기까지 구현해 내다니··· 이 검사를 만든 사람의 능력이 실로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잠시 뒤, 천천히 몸일 때고 물러난 곰은 네 발로 걸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고.

안개 너머에 있던 시험관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왜 저러시는 거지?'

"케이몬 학생! 괜찮나요?!"

"네?"


난데없는 말에 케이몬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냐니··· 그게 무슨 소리이신지?"

"방금 검사에서 케이몬 학생은 한계를 한참 뛰어넘는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당장 기력이 빠져서 쓰러지는 걸 넘어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요!"

"네?"


그 정도였다고?


케이몬은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곰이 입은 상처가 대단하지는 않았······."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바실리스크의 독에 이미 오래전부터 중독되어 있던 데다가, 그 때문에 내부 장기는 굳은 지 오래였죠. 거기다 죽을 정도의 외상을 입었었는데···."

'아니, 하필 골라도 왜 그런 동물로 검사를 하는 거야?'


이렇게 듣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중한 상처였는지 이해가 됐다.


"원래는 3학년 시험은 만점이 불가능한 문제를 내는 게 원칙이라서 그 곰을 제시했는데···."


시험관이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내가 3학년 수준으로는 완치시킬 수 없는 곰을 치료했다고? 분명 내 치료 능력은 이렇게 뛰어나지 않았는데?'

"일단은···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죠?"

"아, 네."


검사관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양호실에 가 봐요. 지금에는 괜찮아 보여도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요. 후··· 이제 남은 하나는 위계인데."


원칙적으로는 지난번보다 능력이 향상됐으니 위계도 올라가야 하는 게 맞다.


'아까 측정구를 봤을 때는 분명···.'


가장 낮은 1위계부터 가장 높은 7위계까지 분류가 되어 있는데, 여태까지 케이몬의 위계는 재생과 정화 모두 3위계이었다.

치료 능력에서는 흔하디흔한 정도.


'하지만 내가 본 건 분명 7위계였어.'


매우 찬란한 황금색의 광채를 발하던 두 개의 측정구가 7위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태껏 정화와 재생 모두 7위계였던 능력자는···.'


몇 년 전 서거한 다이몬 신성국의 성녀가 유일했다.


'이건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는 이 일을 윗선에 보고하기로 마음먹었다.


"케이몬 학생. 이건 저 혼자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당장 결과를 알려주기 힘듭니다. 대신, 후에 세메이온 측을 통해 알려 드리죠. 그러니 일단은 양호실부터 가 보세요."

'그 정도인가?'


저렇게 진지를 머금고 얘기하니까 몇 위계가 나올지 궁금해졌다.


*


케이몬이 검사장을 나오고.

밖에서 대기하던 학생들은 그의 등장에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어차피 치료 능력이니까 똑같겠지.'

'아, 나도 치료 능력 가지고 싶다!'

'될 놈만 되는 더러운 세상···.'


그리고 어차피 검사가 끝나면, 며칠 내에 게시판으로 각자의 위계가 적나라하게 공개되니 당장 궁금할 필요도 없었다.

케이몬은 대기자들 사이를 지나 유유히 빠져나갔다.


*


'양호실을 또 찾아가야 한다니.'


검사관의 말을 듣고 나니 새삼 조금 피곤하다고 느껴졌지만.

다행히도 심장이 아프거나 그런 건 없었다.


'별로 몸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검사관의 말이니 한 번 가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양호실은 1층이었는데 계단을 내려가 모퉁이를 한 번 도니까 보였다.


"어서 와··· 뭐야. 너였니?"


도도한 인상의 미녀는 긴 갈색 머리를 찰랑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얀색 가운을 입은 그녀는 세메이온의 양호 교사였다.


"에로아스 선생님."

"무슨 일로 왔어?"

"오늘 능력 검사가 있었는데, 치료 능력을 너무 많이 쓴 것 같다고 검사관님께서 말씀하셔서 왔습니다."

"뭐? 손 줘 봐."


그녀는 자신의 능력으로 케이몬의 상태를 진찰하기 위해 맥을 짚었다.


"피곤하니?"

"조금요."

"그것 빼고는 전과 딱히 달라진 점은 없는데?"

"저도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냥 가 보라고 하시길래 혹시나 해서 와 본 겁니다."

"흠··· 그 병 때문에 걱정되나 보구나?"


에로아스의 말에 그의 입이 다물어졌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렇겠지. 어느 날 저도 모르게 덥석 그런 병에 걸려 버렸으니."


에로아스는 기지개를 쭉 켜다 말고 손을 불쑥 그의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댔다.


"정말 힘차게도 뛰는구나? 내가 갑자기 한 짓에 놀라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원래부터 이랬던 걸까?"

"원래 이랬습니다."


케이몬은 주저 없이 대답하며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에로아스는 숙였던 허리를 펴며 재미없다는 듯이 말했다.


"너는 놀리는 맛이 없어. 야, 너는 무슨 남자애가 나같이 어여쁜 여교사한테 관심도 없을 수 있어?"

"자신을 예쁘다고 잘도 말씀하시는군요."

"그야 사실이니까."


워낙 자신의 외모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라 그런지··· 저런 말을 하는데도 한 치의 부끄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매혹적으로 뒤로 한번 넘긴 그녀는 본인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입술을 뗐다.


"그래서. 요즘은 어떤 것 같아? 아직도 못 받아들이겠어?"

"···아니요. 이제는 정말 선생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때는 영 못 믿는 기색이더니."


그녀의 말에 크리시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있어 보니 알겠더군요···. 뭔가 잘못된 게 맞구나 하고."

"그래. 원래 사람은 한번 깨져 봐야 믿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니까."


유쾌한 말과는 달리 그녀의 표정도 밝지는 않았다.


"그뿐이 아니지? 이제 보니까 눈 색도 조금 파래진 것 같네."

"용케도 알아보시는군요?"


케이몬의 신기하다는 반응에 그녀는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케이몬은 눈을 향해 뻗어오는 손길에 움찔했지만 저항하지는 않았다.


"이것 봐···."


두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벌리자 검푸른 눈동자가 자세하게 보였다.


"원래는 아예 검은색이었는데···."


단 몇 주 사이에 일어난 일치고는 극적이었다.

케이몬은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치우면서 아까 있었던 일도 혹시나 해 얘기했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치료 능력이 향상된 것 같았습니다."

"뭐?"


치료 능력의 향상은 그녀도 눈을 크게 만들 만큼 대단했다.


"···기쁜 일이긴 한데. 어쩌면 말이야. 이것도···."

"'앙겔로스의 저주'일 지도 모르죠."

"···이미 짐작하고 있었구나?"

"네. 갑자기 다른 능력도 아닌 치료 능력이 오른 거잖습니까."

"그렇지···. 하아······."


걱정 섞인 한숨에 케이몬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고맙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이제 볼 일 없으면 나가 봐."


매몰차게 말하며 에로아스는 양호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부끄러워하시는 건가.'


이런 건 모르는 척해주는 게 예의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혹시나 다른 일로 아프면 다시 와. 네 병은 어쩔 수 없지만··· 다른 건 약을 처방해 줄 수 있으니까."

"네. 그러겠습니다."


양호실의 문이 닫히고.

침구를 정리하는 에로아스는 눈시울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불쌍한 녀석.'


훌쩍.


오늘따라 콧물이 많이 나왔다.


‘처음에는 미련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받지 않아도 될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지키려는 모습이 미련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모습이 좀처럼 보기 힘든 사랑이라서 뒤에서는 케이몬이 잘 되기를 응원했다.

그런데 행복해지기도 전에 불치병에 시한부라니···.


'너 같은 녀석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신께서 못살게 구시는 건지······.'


그녀가 케이몬의 병을 알게 된 것은 몇 주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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