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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알 님의 서재입니다.

아카데미에서 시한부는 죽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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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해
작품등록일 :
2021.02.12 20:36
최근연재일 :
2021.04.09 17:56
연재수 :
4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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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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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68,502

작성
21.02.1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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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002. 저랑 친구 해 주시겠습니까?

DUMMY

치료학 수업이 끝나고 다음 수업 시작까지 30분가량 남았다.

케이몬은 지체없이 강의실을 빠져나가 교무실로 향했다.


"음? 자네가 무슨 일인가."


지적인 인상의 나이든 교수는 전혀 예상치 못한 학생이 찾아오자 놀란 얼굴이었다.


"교수님. 특별 활동을 바꾸려고 찾아 왔습니다."

"···특별 활동을? 내게?"

"네."

"자네는 내가 담당하는 활동이 뭔지 모르나?"

"알고 있습니다."


안다는 대답에 교수는 황당했는지 재차 물었다.


"그런데도 바꾸겠다고?"

"네. 혹시 자리가 남지 않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길게 뜸을 들이던 교수가 할 말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게나···."


허락은 내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신경쓰이는지 말 끝을 흐렸다.


"감사합니다."

"치료 이능력에 케이몬 맞나?"

"네."

"그럼 이만 가 보게.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그토록 뜻이 강고한데 하게 해 줘야지."

"감사합니다."

"아, 잠시만. 알다시피 활동 자체가 위험해서 자네의 부모님에게 확인장이 발송될 거네."


케이몬은 그 말에 움찔거리며 입꼬리가 살며시 내려갔다.


"···괜찮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선 허락하실 테니.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케이몬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예를 갖춰 인사하고는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케이몬이 신청한 특별 활동의 이름은 '마수 토벌'로 말 그대로 마수를 토벌하는 게 주 활동이다.

덧붙이자면 지원자가 다른 활동에 비해 제일 적은 비인기 활동이고.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고 하니까, 귀족이든 평민이든 가려고 하지 않는 거지.'


마수 토벌은 실제 상황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변수가 생긴다.

그것에 일일이 대응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


'어차피 나는 치료사라 후방에 대기하겠지. 그러면 웬만해서는 위험할 일이 없고.'


그래도 만에 하나, 포위진을 뚫고 다가온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이 때문에 매년 마수 토벌은 가벼운 부상부터, 심할 때는 사망자까지 배출하기로 유명했다.


'그래도 신청하는 사람은 아마 그쪽으로 미래를 정한 경우일 테고.'


특별 활동은 기록에 남아서 후에 마수 토벌 관련 직업에 취직할 때 가산점을 받을 수 있었다.

거기에 경험까지 쌓이니 더 좋고.


'내가 지원한 이유는 다르지만.'


내 미래는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취직을 위해 지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창한 이유가 있는 곳도 아니지만.'


자리가 남았을 거라 예상되는 활동 중에서 가장 마음에 끌렸던 게 마수 토벌일 뿐이지.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아예 없지는 않네.'


확인장이 아버지께 발송된다고 했다.


'아버지는 과연 그걸 보고 허락해 주실까?'


아마··· 어렵지 않게 허락하실 것이다.


'아버지는 내게 관심이 없으니까.'


언제나 그래왔고, 지금도 여전할 것이다.


'그러니 장남이 위험한 곳으로 간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겠지.'


불 보듯 뻔한 결과에 케이몬은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침잠한 기분은 잠시뿐, 이내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말에 달포 상단주와 만나기로 했었지.'


지난번에 미리 연락을 주고받았으니 제때 올 거라 믿었다.


'미리 외출증을 끊어 놓아야겠네. 나가면 은행도 좀 들르고.'


생각에 빠져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30분이 다 흘러갈 기세였다.

케이몬은 이제 다음 수업 장소로 향했다.


*


이번 강의는 대인 전투 수업으로 무학관에서 진행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강의를 재신청했었지.'


전공인 치료학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셀레네와 겹치는 과목뿐이었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신청했는데.'


그저 셀레네와 함께 수업을 듣는다는 사실이 좋아서 그랬던 행동이.

인제 와서는 후회스러운 짓이 돼버렸다.

케이몬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거기에 몸을 안 쓰는 줄 알고 좋아했는데 그럴 처지가 아니었네.'


대인 전투 수업은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것처럼 활동량이 많은 수업이었다.

그래서 케이몬은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무리한 활동은 병든 몸을 더 아프게 만들 테니까.


'이렇게 걷는 것 정도는 별로 심하지 않지만. 숨이 찰 정도로 움직이는 건 또 다르겠지···.'


그냥 마수 토벌 때 필요한 최소한의 체력을 기르는 셈 쳤다.

어차피 수업의 전반이 대련이니까,

정 힘들면 바로 기권하면 그만이다.


성적에는 영향이 미치겠지만, 이제는 성적에 연연할 필요도 없어져서 상관없었다.


'아, 오늘은 강의실이네.'


케이몬은 강의실 앞에 도착해 막 들어가기 전.

문 앞에 가만히 서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까처럼 실수로라도 셀레네한테 가면 안 돼.'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곁으로 갈까 봐 걱정됐다.

케이몬은 마음을 굳게 다지고 문을 열었다.


*


대인 전투학 강의실은 여느 강의실 만큼이나 떠들썩했다.

조용하게 아로마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셀레네는 아까부터 계속 문을 힐끔거렸다.


"셀레네. 누구 기다려? 왜 아까부터 계속···."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아로마의 입이 멈췄다.

시끄럽게 떠들던 이들도 문을 열고 등장한 남학생을 보고 소리 낮춰 수군댔다.


"맞다. 저 스토커도 이 강의를 들었지···."

"능력도 치료 쪽이면서 왜 이 강의를 듣는 건데···. 쯧."


그의 평판 때문인지 다들 탐탁치 않아 하는 기색이었다.


'케이몬.'


셀레네는 그를 보고 있자니 다시 마음이 심란해지는 걸 느꼈다.


'또 여기로 오겠지?'


언제나 그는 자신이 싫다고 거부하여도 근처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어? 저거 정말이냐?"

"쟤가 저기에 앉다니···."


그러나 케이몬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회피하는 기색이었고,

어느새 예상한 자리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관심 끌기 수법인가?"


도서관이나 식당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계속 스토커라는 별명에 안 어울리는 짓을 하니까 아로마는 도리어 의심이 됐다.


"셀레네. 그만 보고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저놈이 따라붙지 않는다면 우리야 좋은 거지."


뭐가 됐든, 아로마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 응. 그렇지···."


셀레네도 말로는 동의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케이몬의 등을 보고 있었다.


*


"오늘은 첫 수업이므로 짧게 끝낼 생각입니다."


대인 전투학 교수님의 말에 자리에 앉은 학생들은 환호했지만,

교수님의 깐깐한 성격 때문에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일단, 내일 있을 능력 검사에서 유의미한 결과가 있기를 바라고···."


대인 전투학 교수는 매서운 눈초리로 케이몬을 흘겨보았다.


"부디 이번 연도 수업에서는 모두가 진지한 태도로 임하시길 바랍니다. 이상."


마지막에 왜 그런 사족을 붙였는지 강의실에 있는 학생들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풉."

"매일 흐느적대는 놈 때문에 우리 교수님도 참 골치 아프시겠어."


사방에서 쏟아지는 눈길과 조소가 쏟아졌지만 케이몬은 주눅 들지 않았다.

단지, 교수님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되새겼을 뿐.


'밉보였나 보네.'


하긴··· 그간의 수업 태도를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셀레네만 보느라 수업도 제대로 집중하지 않았지.'


대련할 때면 들려오는 표현을 빌려, 흐느적거리다가 패배하였으니···.

배울 의지도 싸울 의지도 없는 학생이 교수님 입장에서는 미울만도 했다.


'괜히 대련을 더 시키시는 건 아니겠지?'


수업의 일환으로 하는 대련은 정해진 시간 내에 모두가 해야 하므로, 자신만 더 시킬지는 확실치 않지만···.

시범을 보여준답시고 도우미 역할로 계속 부르는 건 가능할 것 같았다.


'부디 아니길 빌어야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인 전투 수업이 무척 피곤해질 것이다.

학생들은 아까 케이몬이 교수님에게 찍혔던 것을 가지고 저들끼리 조롱하며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다음 수업은 철학인가.'


다시 주어진 30분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됐다.


케이몬도 이만 강의실을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마침 나가려고 하던 셀레네와 아로마가 보여 순간 멈칫했다.


'셀레네···.'


여전히 아름다워서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 배로 뛰게 만드는 그녀.

하지만 케이몬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안다.

다가가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처지를.


'···나갈 때까지 기다리자.'


두 여학생이 빠져나가면 케이몬도 나갈 생각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


셀레네는 그런 케이몬을 응시하다가 아로마의 재촉에 문을 나섰다.


*


"너무 힘들다···."


케이몬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도적으로 그녀를 피하는 일은 그에게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차라리 수업이 달랐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조금 있으면 들어가야 하는 철학 수업도 셀레네가 신청한 과목이었다.


'애초에 누굴 탓하겠어. 나를 탓해야지···.'


셀레네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서 같은 과목을 신청했던 결정이, 이제는 걸림돌이 될 줄이야.

그때는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 했었다.


'내가 이런 상태가 될 줄도 몰랐었지···.'


케이몬은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려보았다.


"흐읍, 하아···."


폐부 깊숙한 곳까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더 빨라지는 심장 박동.

어떨 때는 몸을 무리해서 움직인 탓에 심장이 빨리 뛰다 못해, 가슴이 아팠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어서 다행이야.'


만약 못 움직일 정도였다면 정말 절망스러웠을 것이다.

한 편으로는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작은 행복에도 만족하는 자신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어?"

'저 애는···.'


본관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케이몬은 발을 멈춰 세웠다.

옅은 보라색 머리에 에메랄드빛 눈을 가진 남학생이 가만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테 볼 일 있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짐작 갈 만한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케이몬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먼저 다가가 물었다.


"저에게 할 말이라도?"

"······."


그러나 아무 대답 없이 고요하게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남학생.


'내가 아니었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알았···."

"왜 포기한 겁니까?"

"네?"


다짜고짜 날아오는 질문에 케이몬은 뭐라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무슨 소리이신지?"

"왜 사랑을 포기했냐는 말입니다."

"······."


여전히 뜬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둔해도 저 정도도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다.


"난데없이 그런 말을 하는 연유가 궁금하군요."


저기서 사랑이란 아마 셀레네를 보고하는 말일 터.


"그리고 저는 당신과 그 어떤 접점도 없습니다."


그녀에 관련된 거라면 한없이 차가워질 수 있는 케이몬이다.


"그런데 이런 무례한 질문이라니요."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봤다.


'새롭게 시비를 거는 방법인가?'


그간 뒤에서 뭐라 수군대도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거는 시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가 화를 낼 줄 몰라서 안 내는 게 아닌데.'


만약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화를 낸다면 안 그래도 낮은 평판이 더 떨어지겠지만.


'상관없어. 처음부터 신경쓰지 않았으니까.'


케이몬은 머릿속에서 지금 바로 내뱉을 독설을 준비했다.

이제 눈앞에 무례한 학생의 잘못을 꾸짖으면 되는데.


"저는 그날 봤습니다."

"뭘 봤다는 거죠?"

"2년 전, 당신이랑 같이 있던 붉은 머리의 그녀가······"

"······."


그의 말을 들을수록 케이몬은 안색은 굳어갔다.

어느새 그나마 올리고 있던 입꼬리마저 내린 상태였다.


"···그걸 또 누가 알고 있습니까."

"저 혼자만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고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 자만 입막음시키면 이 이상 퍼질 가능성은 없어진다.


"따라오시죠."


케이몬이 그를 지나치며 말하자 그도 순순히 따라왔다.

주변을 살피며 인적이 드문 장소까지 다다른 케이몬은 다시 그를 마주 보고 얘기했다.


"물어보기에 앞서, 이름이 뭐죠?"

"아르콘이라고 합니다. 성은··· 없습니다."

"아르콘. 알겠습니다."


케이몬은 아르콘을 직시하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뭔가요? 어떻게 하면 그 일을 영원히 함구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르콘은 납득이 되지 않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야말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 일을 그렇게 감추는 거죠? 진실이 알려지면 당신이 그런 취급을 당하지는···"

"아르콘. 그냥 당신이 원하는 걸 말하세요. 제가 인식은 안 좋아도 나름 공작가의 자식입니다."


케이몬은 그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전 재산까지 줄 용의가 다분했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신선한 대답을 들려줬다.


"저는 당신이 셀레네와 이어지기를 원합니다."

"네?"


처음 당황스러웠던 질문 이후, 여러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생각해 놨지만,

이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저는 당신이 그녀를 따라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쭉 지켜봐 왔습니다."

'그렇다면··· 몇 년 전부터?'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셀레네를 쫓아다녔으니.

2년은 족히 따라다녔다는 소리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죠. 아, 저는 소설을 보는 독자처럼. 이 두 남녀가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지금까지 저희를 계속 지켜봤다는 말인가요?"

"네.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어떤 의미에서는 얘도 스토커인데.'


케이몬은 짐짓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르콘은 자신의 행동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지 무척 당당했다.


"그게 지금 당사자 앞에서 할 소리인가요?"

"저는 그저 로맨스를 좋아하는 평범한 독자일 뿐입니다."

"그 로맨스가 소설이 아닌데도?"

"단지 글에서 살아 움직이는 대상으로 바뀐 것뿐입니다."


케이몬은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나도 별로 다른 건 없지만···.'


자신도 조금은 그와 비슷해 보였기 때문에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셀레네와 당신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어째서죠? 지금이라도 가서, 당신이 그러지 않았다고 말하면···"

"믿어 주겠습니까?"


케이몬이 자조적으로 코웃음 치자 아르콘은 진지하게 받아쳤다.


"그녀라면 당신의 말을 믿어 줄 겁니다."

"···어째 오랜 시간을 코앞에서 쫓아다닌 저보다 더 많이 아는 듯합니다."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그녀의 성격은."


그의 말에는 믿음이 담겨 있어, 케이몬도 한 번쯤 그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언제나 밝고, 착하고. 거짓말을 잘 못 하지.'


거짓말을 할 때면 티가 너무 나서 하나 마나였다.


'그래서인지 두루두루 친하고. 자신도 이타적이지.'


듣기로는 부모님이 성격 좋기로 유명해서 딸인 셀레네도 그런 거라고 들었다.


'그리고··· 여린 데다가 사람을 너무 쉽게 믿어서 상처도 쉽게 받지.'


유일한 흠이자, 그녀의 인간미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래. 어쩌면, 셀레네가 나를 원망하게 됐던 이유를 바로 잡으면 더이상 날 피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이성적으로 사귀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친구로는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상상만 해도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일이다.


"그래서 안 되는 겁니다."

"어째서···"

"저는 그녀가 상처받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다독여 주면 되지 않습니까."

"저로서도 당시에는 다독여 줄 수 없을 만큼 큰 상처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대신 상처 입기를 택한 겁니까?"

“네."

"······."


아르콘은 멍하니 열렸던 입을 닫았다.

잠시 뒤,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는 단지 그때의 일만을 보고 지금껏 당신의 생각을 짐작했습니다. 어리석고 주제넘은 참견이었군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니 고개를 드십쇼."


사실 처음에는 당황도 했지만, 천성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여 용서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르콘은 자신 저지른 잘못이 너무 컸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는 케이몬의 용서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케이몬은 따뜻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대신, 이런 이유로 그 일은 영원히 함구해 주시겠습니까?"

"당연히 그러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영원히 제 입을 바늘로 꽁꽁···"

"음··· 그래도 저는 못 믿겠군요."

"네? 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정 신경이 쓰이시면 계약서를 써도···"

"제가 당신을 믿을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아르콘은 얼마나 대단한 방법일까 싶어 침을 꼴깍 삼켰다.


"그, 그게 뭡니까?"

"친구라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친구···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케이몬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저랑 친구가 돼 주시겠습니까? 아르콘."

"저는, 저는 당신의 뒤를 몰래 쫓아다녔는데도 말입니까?"

"오, 자각은 있으셨군요."

"큼! 물론 저는 부끄럽게 생각하진 않지만. 주변의 인식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우스웠다.


"하하."

"······뭐가 그리 웃기신 지."

"아닙니다. 그냥···."


갑작스레 터져 나온 작은 웃음에 케이몬은 얼버무렸다.


'나도 모르게 그만 웃고 말았네.'


케이몬이 살면서 사귀었던 친구는 셀레네가 유일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셀레네가 아닌 사람의 말에도 진심으로 웃을 수 있다는 걸 모르고 지냈다.


'그런데 이것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구나.'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이 다가오기 때문에 그런 걸까?


케이몬은 더 웃으면 그가 무안해 할까 봐 애써 집어삼키며,

사실상 마지막이 될 질문을 했다.


"저랑 친구 해 주시겠습니까?"


깊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감동한 얼굴로 화답했다.


"···저야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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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01. 나의 사랑하는 셀레네 +11 21.02.12 2,052 5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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