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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능선의 서재입니다.

구걸왕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좌능선
작품등록일 :
2020.05.11 12:25
최근연재일 :
2020.09.11 10:30
연재수 :
8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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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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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44,307

작성
20.05.15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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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탈출

DUMMY

“잠깐.”

치우가 큰소리로 자신의 행동을 제지하자 왕호는 부아가 치밀었다.

이 어린 새끼가 강룡금장의 아들이라 인정하자마자 갑자기 주인 행세를 하려 드나 싶어서 사납게 치켜뜬 고리눈을 치우에게로 향했다.

“ 뭐냐? ”

“ 지하동굴의 위치를 알려주는 대신 조건이 있소.

저 왕방과 왕위를 구속하지 말고, 풀어주는 거요. ”

“ 뭐? ”

뜻밖의 말에 왕호와 왕방, 왕위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 두목인 당신에게는 부릴만한 다른 거지들이 많을 거 아니오.

저들에게 자유를 주고, 당신이 거두는 야명주 한 알씩일 주라는 거요. ”


처음 당황하던 왕방과 왕위는 그 비싼 야명주를 내주라는 치우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들이야 어린 거지라 잘 모르기는 하지만,

그런 귀물들이면 그래도 배곯지 않고 십수 년 살 수 있다는 것쯤은 안다.

그런 것을 자신들에게 나눠주라고 하는 치우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치우가 전혀 예상외의 말을 하자 왕호는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 하! 네가 역시 부잣집 도련님은 맞는구나.

그 비싼 야명주를 서슴없이 준다고 하니.

근데 너는 필요 없나? 너도 이제는 부잣집 도련님도 아니고, 게다가 수배중인 반역도당 아닌가? ”

왕호의 지적에 왕방과 왕위는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이 샐쭉해졌다.

그것은 왕호가 결코 치우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 그렇긴 해도, 그것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먼 조상님이 남긴 것이오.

내 노력도 아니고, 조상님 덕에 비명횡사할 일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충분하오.

내게 이제 재산은 없지만, 하룻밤에 장원이 불바다가 되고 나니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소. 부모 생사도 모르는 판국에. ”

치우의 씁쓸한 말을 듣자 왕호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시 잠겼다.

그러더니 길게 생각 않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치우에게 말했다.

“ 좋다.

하지만 네가 주는 지도만 믿고 그곳에 갈 순 없지.

네 말 대로라면 그 동굴 속에 또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모르지 않나?

그러니 우선 내가 너를 지부에 데려가서 네가 알고 있다는 개방 간부와 만나게 해주고, 그다음에는 나와 다시 서안에 가야겠다.

여기서 더 양보는 못 해. 어떠냐? ”

왕호의 말에 치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인다.

“ 알겠소. 하지만 지부에 갈 때도 서안으로 갈 때도 왕방과 왕위는 함께 가야 하오. ”

“ 뭐? 애들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 상관있소. 저 친구들이 당신과 내가 나눈 대화를 듣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곳에 남아 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게 뭐요.

그렇다고 무작정 다른 구역으로 가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원했던 건 아니지만 나를 둘러싼 어떤 음모에 저들이 괜스레 낀 상태란 말이오. 더구나 내 생명을 구하기까지 하면서.

그러니 우리와 함께 움직여야 하오. ”

딴은 치우의 말이 맞는지라 왕호도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그들이 한참 떠드는 사이에 벌써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왕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왕방과 왕위에 따라오라 이르더니 움막 쪽으로 갔다.

그들이 지펴놓은 모닥불은 이제 거의 다 타서 잦아들었지만,

동이 터오면서 점점 주변이 희미한 새벽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치우는 한숨을 깊게 쉬었다.

지난 이 주일간, 그리고 쓰촨성에 도착한 며칠간.

한시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계속 움직인 탓에 몸이 물에 젖은 것 같았다.

피곤하고 지쳤으며 불안하고 억울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고,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감당하지 못하게 많았다.

이제 십여 세밖에 안 된 치우에게는 지나친 시련이 아닐 수 없다.

움막 쪽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바라보니 희미해지고 있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멀끔한 옷차림을 한 왕호와 왕방, 왕위가 나타났다.

치우는 어리둥절해졌다.

셋이 가까워져 오자 치우는 세 명의 거지가 어느 정도 씻기까지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비록 값나가는 옷은 아니지만,

더럽지도 않고 말쑥해 보이는 옷차림의 세 거지는 마치 행상을 나선 장사꾼과 그 아들들처럼 보였다.

왕위가 손에 들고 있는 옷 꾸러미를 치우에게 던졌다.

“ 야, 왕초가 주는 거야, 가서 옷 바꿔입고 와. ”

치우는 그들의 느닷없는 변복에 어리둥절 해졌다.

“ 갑자기 옷은 왜? ”

왕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

“ 너 수배중이라며. 그런 놈과 길을 가는데 늦게 갈 순 없잖아.

게다가 우리가 거지 몰골로 먼 길을 돌아다니면 나 개방이오, 떠들고 다니는 것과 뭐가 다르냐. 이건 우리 나름의 변장이다. ”

그 말을 듣고야 치우는 거지에겐 평민으로 복장을 바꾸는 게 변장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새삼 감탄했다.


본래 거지들은 눈에 띄는 존재는 아니다.

존재만으론 당연히 시선을 끌지만 애써 외면하는 존재에 가깝다.

하지만 보기 싫어 그럴 뿐 그들의 행적은 보통의 평민들 보다 드러나기가 쉬웠다.

도시라면 몰라도 먼 길을 떠날 때는 더 그랬다.

거지 서너 명이 모여서 먼 길을 간다면 누가 봐도 개방이라 생각할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통의 평민과 같이 변복을 하는 것은 현명한 생각이다.

치우는 왕호가 난폭하고 욕심이 많기는 하지만,

의외로 세심하며 철두철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야, 뭘 멍청히 서 있어.

옷을 갈아입고 왔으니 이제 움직이자.

곧 민강 현의 성문이 열리면 쓰촨으로 가는 상인들이 몰려 나갈 거야.

우리는 그편에 끼어서 간다.

쓰촨에 향신료를 사러 가는 보부상이 우리 정체야.

내가 숙부고 너희들은 일을 배우는 조카들이다.

특히, 강룡금장의 도련님은 조카 중에서 부스럼을 앓고 있어서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 둘러댈 거야. 명심해. ”


왕호는 현의 성문을 빠져나가는 인파들 속에 섞여서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거친 천에 화상을 입은 상처가 스칠 때마다 아팠다.

거의 밤을 새운 상태로 성을 빠져나오느라 서둘러서 지칠 만도 했다.


성문을 막 빠져나올 때쯤이었다.

“ 어이! 너희들. 너 혹시 수취교 거지 왕초 왕호 아냐? ”

누군가가 왕호를 부르는 바람에 일행은 당황했다.

왕호가 그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 일행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포두가 보였다.

그는 어제 수취교에서 보았던 차 포두였다.

“야, 너 왕호 맞지? 어제 그 다리 밑에 있던 꼬맹이들 아냐?

얼레? 어째 신수들이 훤한걸?

이제 비렁뱅이 짓은 그만두기로 했나? ”

빈들빈들 웃으면서 아는 척을 하는 차 포두.

이쯤 되면 도리가 없다.

모른 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 아이고, 포두님. 부지런도 하십니다.

어제 말씀하신 것도 있고 해서 잠시 피해있으려고요. ”

왕호가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수그리며 말을 하는 동안 차 포두는 일행 앞으로 다가왔다.

“ 아, 그 행사? 그렇다고 진짜로 네놈이 모처럼의 대목을 피해가?

그거 좀 이상하네. 그리고 거기 얼굴 가린 꼬마.

그 꼬마는 못 보던 얼굴 같은데 어제는 자세히 안 봤네? ”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으며 차 포두는 얼굴에 갈색 천을 두른 치우를 힐끔거린다.

“ 아, 그 어제 말씀하신 왕민 있죠?

걔가 그리되었으니 어쩝니까.

숟가락 하나가 비었으면 또 채워야죠.

쟤는 왕우라고 새로 온 새끼 거지고요,

근데 저놈이 얼굴에 부스럼이 생겨 혹시 홍역이나 마마인가 싶어서···.”

“ 뭐? 인마. 그럼 빨리 말을 했어야지! ”

왕호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차 포두는 깜짝 놀라며 뒤로 몸을 날린다.

아이들은 부스럼이나 전염병에 잘 걸렸고,

그 전염병은 괴질이라는 이름으로 이따금 악명을 떨치곤 했다.

“ 어서 꺼져! 거지새끼들아. 재수 없게 아침부터···.”

잽싸게 몸을 빼는 차 포두에게 왕호는 고개를 조아리며 아이들을 몰아대듯

성문을 빠져나왔다.

“ 아, 재수 없을 뻔했네. 그 자식 부지런도 하지. 어제도 근무였던 거 같은데

그새 또 근무를 나왔네. ”


쓰촨으로 가는 보부상들 틈에 끼어 사라지는 왕호 일행을 바라보는 차 포두는 침을 퉤 뱉었다.

그래도 저들 덕분에 가끔 용돈 벌이가 쏠쏠한데.

거지 중 누군가가 크게 아프면 쓰촨성에 있는 개방의 쓰촨 지부로 간다는 것은 익히 알던 사실이었다.

어차피 거지들이 의원을 찾아갈 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고,

설사 돈이 있어도 거지들을 봐주려는 의원이 드물다는 건 현실이다.

그래도 개방파의 쓰촨 지부에는 의술에 능한 거지들이 몇 있어서 그들에게 신세 지려고 거지들이 먼 길을 찾아가는 일은 가끔 있었다.

쓰촨의 본성을 뺀 나머지 현에는 사실 무투파에 해당하는 개방도는 거의 없었다.

북부지역과 비교하면 도시들이 크지도 않고,

도시가 크지 않으니 거지들이 구걸로 벌어들이는 수입도 시원치 않았다.

그냥 밥이나 얻어먹는 정도였으니,

무공을 내세워 행세하는 무투파들이 그런 지방 현에 머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임기응변으로 검문을 피하는 왕호를 보면서,

치우는 어제 그에게 두들겨 맞은 것은 잠시 잊고 역시 세상에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란 없음을 새삼 느꼈다.

과거 아버지가 자주 하시던 말이었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다리 하나 없는 거지라고 해도,

살기 위해 남의 눈을 찌를 송곳 하나는 가지고 다니는 법이라고.

세상에 만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제 성으로부터 꽤 벗어나서 관도로 들어서자 성을 함께 나섰던 상인들은 무리를 지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관도에서 현으로 가는 길들이 갈리면서 각자 목적지에 맞춰 자연스럽게 나뉜 것이다.

그렇게 흩어지는 가운데 쓰촨성으로 가는 길로 접어든 치우 일행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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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광견추혼단 狂犬追魂勯 +4 20.05.28 515 5 9쪽
21 유인 +4 20.05.27 515 6 9쪽
20 추종 追從 +2 20.05.26 526 5 9쪽
19 어사 20.05.25 528 3 10쪽
18 강시독 20.05.24 512 5 10쪽
17 녹죽장 20.05.23 526 4 10쪽
16 강시당 20.05.22 551 5 9쪽
15 관제묘 20.05.21 582 7 10쪽
14 역모 20.05.20 588 5 10쪽
13 고문 20.05.19 586 7 9쪽
12 동창 20.05.19 634 10 9쪽
» 탈출 20.05.15 635 5 10쪽
10 합의 20.05.15 654 8 9쪽
9 용모파기 20.05.14 681 8 10쪽
8 기록 20.05.14 714 7 10쪽
7 함정 20.05.13 752 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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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명분이 없다 +1 20.05.12 987 11 9쪽
3 협의 +1 20.05.12 1,052 13 9쪽
2 +1 20.05.12 1,349 19 10쪽
1 구원 +4 20.05.11 2,300 5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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