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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능선의 서재입니다.

구걸왕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좌능선
작품등록일 :
2020.05.11 12:25
최근연재일 :
2020.09.11 10:30
연재수 :
87 회
조회수 :
39,830
추천수 :
460
글자수 :
344,307

작성
20.05.13 14:00
조회
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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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글자
9쪽

함정

DUMMY

먼 데서 뭔가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통로를 울린다.

아마도 불에 타고 있는 장서각의 잔해들이 숨겨진 입을 벌린 비고의 계단실로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일 것이다.

이제 치우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누군지 정체 모를 침입자들이 장서각의 화재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들에게 입구가 발견된다면 치우가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니까.

장서각은 원래 가문의 직계가 아닌 이상 들어올 수 없었고,

내부의 먼지를 청소하는 것도 직계인 치우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수많은 하인을 두고도 어린 아들에게 그런 몸 쓰는 일을 시키는 남편을 못마땅해하였으나,

늘 자애로운 아버지도 장서각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일만큼은 치우와 자신 이외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했었다.

치우가 기억하는 장서각은 늘 건조해서 책 보관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그것은 역으로,

불길이 닿으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센 불길 앞에서 수만 권의 장서는 불쏘시개에 불과하다.


손에 움켜쥔 등롱의 불빛이,

정신없이 뛰는 서슬에 일렁거리며 가뜩이나 비좁은 지하 통로의 벽에 치우의 그림자를 기괴한 모습으로 얼룩지게 했다.

사방에 가득한 어둠과 흙냄새, 곰팡냄새.

한참을 숨이 턱에 닿도록 뛰면서 치우는 거의 반실신상태가 되었다.

그러다 문득 치우의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있어 잠시 멈췄다.

아주 멀리서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목소리.

치우는 혹시 지하 통로의 입구가 가까워져 들려오는 소리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은 지금껏 자신이 미친 듯 달려왔던 장서각 방향이었다.

게다가 한둘도 아닌 여러 사람들이 내는 소리.

치우는 달려오느라 흠뻑 땀에 젖었던 옷자락이 섬찟할 정도로 등골이 오싹했다.

장서각 비고의 입구가 발견된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무림인 들일 것이고,

아이인 자신의 걸음과 비교도 되지 않을 속도로 들이닥칠 것이다.

지금껏, 중상을 입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버리고 죽도록 뛰어 달아나온 것 자체가 무용지물이 될지 몰랐다.

그들에게 붙들리는 것은 그야말로 일촉즉발 一觸卽發.

이제 치우는 숨이 차오르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장원을 침입한 자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들은 장서각에 불을 지르고도 그 불이 잦아들 때까지 주변에서 기다렸다가 잔해를 뒤질 만큼 신중했다.

그러고는 지체없이 지하 통로로 뛰어든 것이다.

그것이 나타내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들은 장서각 근처에서 치우가 사라진 흔적을 찾았고,

비밀통로가 어딘가 있다는 것을 눈치챌 정도로 전문적인 추적꾼들이었다.

쉽게 찾아지지 않을 통로 입구를 과감하게 장서각에 불을 질러 찾아내는 난폭함.

그리고 주변에서 기다렸다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아직 찾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이제 그들이 단순한 도적 같은 게 아니라, 치우 자신을 쫓는 어떤 이유가 있음도 알 것 같았다.


치우가 정신없이 달리는 가운데 등롱의 불빛이 점점 잦아들었다.

치우는 그게 시간이 흘러서 등롱에 담겨있는 기름이 다 타버린 징후임을 깨달았다.

이 어두운 지하 통로에서 등불마저 꺼지면 더는 저 무인들의 추적을 뿌리치고 도망칠 방법이 없다.

치우는 울 것 같았지만, 억울하게 당한 부모님 생각을 하며 이를 악물었다.

등불이 잦아들며 점점 어둠이 오므라들고 있었다.

등불이 작아질수록 미친 듯 내달리던 치우의 가슴도 점점 작게 오그라든다.

어둠이 짙어가는 뒤쪽 통로에서는 다급하게 쫓아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퍽!’

연신 뒤를 흘끔거리며 내달리던 치우는 뭔가에 부딪혀 다시 바닥에 나뒹굴었다.

다시 또 꺾어진 통로인가 싶어 아픔을 참고 일어선 치우는 잠시 눈을 크게 홉떴다.

많이 잦아든 등롱에 비친 정면은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까지와 같은 흙더미 벽이 아니라, 단단한 암석이었다.

얼마나 오래 세월이 지났는지 석벽에는 이끼가 끼어있었지만,

이른 거리는 등롱 불빛에 몇 마디 문자가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하 통로는 그동안 물기를 머금은 흙이었는데 석벽의 일장 앞은 단단한 화강석으로 마치 제단처럼 바닥이 만들어져있었다.

돌바닥으로 올라선 치우는 거의 꺼져가기 일보 직전인 등롱 불을 바싹 벽에 갖다 대고 돌 위로 얼룩진 이끼를 문질러가며 석벽에 새겨진 글을 읽었다.


‘ 이곳에 다다른 자가 강 씨 세가의 혈족이면 예를 갖추고 위패를 드는 손 방향으로 돌아서서 벽을 짚어라. ’

강 씨 세가 사람이 아닌 사람은 알 수 없을 글.

강 씨 세가에서 위패를 드는 손은 왼손이다.

문장이 말하는 것은 예를 갖추면서 손을 앞으로 뻗으라는 말이다.

치우는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취릭!’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머리 위를 스쳐 지났다,

머리끝이 쭈뼛 선 치우가 고개를 들어보니 어른 키 높이로 양쪽의 석벽에서 뭔가 날카로운 칼날이 교차하며 지나간 것을 알았다.

비고의 통로를 이용한 자가 만약 강 씨 세가가 아닌 사람이라면 걸릴 수 있는 효과적인 함정.

치우가 손이 닿은 돌벽을 힘껏 양손으로 밀자 으드득하는 소리가 울렸다.

멀리서도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는지 등 뒤로 통로를 통해 들려오는 발소리가 다급하게 빨라진다.

돌벽은 치우가 손을 내밀어 미는 부분만 안으로 밀려들어 가더니 이내 치우가 무릎 꿇은 바닥이 아래로 쑥, 꺼져 내렸다.

그 아래는 경사가 져서 치우는 앗 하는 사이에 볼썽사납게 굴러떨어졌다.

아픔을 참고 보니 그 서슬에 등롱을 잃었는데도 주변이 그리 어둡지 않았다.

치우가 굴러떨어진 곳은 일종의 석실이었는데,

어린아이 머리만 한 야명주가 천장에 박혀 은은하게 불빛을 밝혔다.

사방이 꽉 막힌 듯 보이는 석실 정면에는 작은 돌문이 있는데,

손잡이가 양쪽 끝에 똑같이 달려있었고 그 중앙에는 작은 글씨가 암각되어 있었다.

‘ 강 씨 세가의 후손이 쫓기는 상황이면 왼쪽을, 아니면 오른쪽을 당기며 나가라 ’

치우는 잠시 생각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조상들께서 마련했다는 이 비고의 통로는 생각보다 복잡한 기관들로 만들어져있었다.

그것은 뭔가 최악의 경우들을 생각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어찌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재 공교롭게도 이름도 모를 먼 조상님이 예견한 대로,

자신은 쫓기고 있었으니 더 생각할 겨를 없이 왼쪽 손잡이를 당겼다.

세월 탓인지 아니면 자신이 어린아이인 탓인지 처음에는 꿈쩍도 하지 않던 무거운 돌문은 치우가 끙끙대며 힘을 쓰자 서서히 열렸다.

문이 열리자 뭔가 시원한 공기가 훅 들어오며 희미한 빛이 보이는 새로운 통로가 나타났다.

치우는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는 통로를 향하여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

잠시 후,

어렵게 밀고 들어왔던 석벽이 그그극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벽 너머 먼 곳, 여기저기 기관들이 돌아가는 소리가 둔중하게 울려 퍼졌다.

치우는 자신이 봉인을 해제한 석문에서 시작된 이 울림들이 무엇일까 잠시 생각했다.

뭔가 쿵, 쿵 무겁고 낮은 소리로 울려 퍼짐이 계속되었다.

그 울림은 처음에는 낮게 시작되었지만 이내 엄청난 굉음과 함께 커다란 울림이 지하 통로 전체를 뒤흔드는 것이다.

굉음은 최초에 아주 먼 곳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먼 곳 통로로부터 밀려오듯 단말마 같은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치우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가 왼쪽으로 석문을 돌려 열자 새로운 기관이 작동한 것이다.

어떤 방식일지는 모르지만,

통로가 차례차례 무너지고 있으며 그를 추적하던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속절없이 그 통로 속에 파묻히고 있는 것이다.

치우는 누군지도 모를 먼 가문의 조상이 이런 무시무시한 비고를,

가문의 장원 지하에 만들어놓은 사실에 경악했다.

지금까지 치우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이 비고가 어딘가로 도망쳐나가기 위한 비상통로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단지 비상통로일 뿐만이 아니라,

엄청난 기술과 인력이 동원된 함정이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체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부유하긴 하지만 평범한 상가인 가문에 왜 이런 복잡한 기관들이 존재하는지,

상가인데 누가 공격해올 것이라 짐작하고 이렇게까지 대비를 해온 것인지.

부친에게서 듣기에 이미 백 년은 넘은 듯한 이 지하 통로가 자신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무너지고 있었다.

치우는 머리가 복잡한 동시에,

이제 그의 부모가 비고를 통해 자신을 따라올 길은 영원히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의도치 않았지만 그렇게 비고를 닫아버린 게 바로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치우는 순간,

부모님의 유일한 탈출구를 막아버린 것이 자신이라는 자책감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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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추종 追從 +2 20.05.26 526 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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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강시독 20.05.24 513 5 10쪽
17 녹죽장 20.05.23 527 4 10쪽
16 강시당 20.05.22 551 5 9쪽
15 관제묘 20.05.21 583 7 10쪽
14 역모 20.05.20 588 5 10쪽
13 고문 20.05.19 586 7 9쪽
12 동창 20.05.19 634 10 9쪽
11 탈출 20.05.15 635 5 10쪽
10 합의 20.05.15 654 8 9쪽
9 용모파기 20.05.14 681 8 10쪽
8 기록 20.05.14 714 7 10쪽
» 함정 20.05.13 753 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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