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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능선의 서재입니다.

구걸왕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좌능선
작품등록일 :
2020.05.11 12:25
최근연재일 :
2020.09.1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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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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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44,307

작성
20.05.12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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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명분이 없다

DUMMY

포두.

당대 평민들에게는 가장 밀접한 국가 권력이자,

법을 벗어나는 무리에게는 저승차사와 같은 존재인 관인.

뭐라 해도 관인은 거지에게는 별로 상종하고 싶지 않은 거리의 권력자.

관인은 큰 음성과는 별개로 다리 난간에 한쪽 팔을 기댄 자세로 느긋하게 빙긋거리며 아래에서 벌어진 정경을 내려다본다.


” 차 표두 나으리.

애들이 영 물정 모르는 것 같아서 교육을 하던 참 입니다요. 헤헤.

염려 마시고 그냥 가시던 길 가셔도.“


” 야. 이놈아.

네가 지난달에도 거지 아이 하나 두들겨 패서 죽었지?

그 아이를 옆 동네 개천에 내다 버린 거 내가 모를 줄 아나?

이게 어디서 포두한테 수작질이야. “


포두의 으름장에 왕호는 과장되게 질색을 한다.


” 아이고, 그거 무슨 말씀을요.

저는 그런 놈 손댄 적 없습니다요.

그놈이 옆 동네 구걸하러 갔다가 그 동네 거지들에게 맞아 죽은 게지요.

제가 무슨···.“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포두는 타이르듯 언성을 낮춰 왕호에게 말했다.


” 네놈이 그리 말할 줄 알았다.

꼬마 거지 몇이 죽든 내가 알 바는 아니다만,

이번에 조정에서 이 지역으로 높으신 분이 행차하신다는 소식이 있어.

지부 대인이 그 일 때문에 관내 거지들을 전부 잡아 가두라고도 하시던데.

어떠냐, 이참에 감옥살이 좀 해보련? “


포두가 을러대듯 말을 읊자 이번에는 왕호가 정색을 한다.


” 아니, 이런 변두리에 무슨 일로······.

조정의 높으신 분이 오신 답니까? “


아이들을 때리던 손발을 멈춘 왕호가 공손히 손을 앞으로 모으고 포두에게 묻자 난간 위에 팔을 걸치고 있던 포두가 몸을 훌쩍 띄워 다리 아래로 내려섰다.

풀썩하니 먼지가 날 법도 한데 거의 흙먼지가 안 일어나는 게 포두치고는 제법 무공을 하는 모습이었다.

차 포두는 나뒹구는 세 명의 아이들을 흘깃 보고는 왕호에게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는다.


” 초 공공이라고, 네놈도 들은 적 있겠지?

지금 황제 폐하의 측근 중의 측근이자 태감(太監)이며 동창의 수반이시지.

그분이 본래 이 지방 출신이시라 이번에 내려오신다고 한다.

그러니 너희 같은 거지 떼는 이참에 눈에 안 보이게 치워야.“


‘아이고!’

갑자기 소리를 치며 왕호가 허리춤에 손을 넣었다 꺼내며 차 포두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준다.

제법 묵직한 것이 은자를 넣은 주머니.

차 포두는 짐짓 모른 체하며 험, 험 헛기침을 했다.

왕호의 처지에서는 내려오는 높으신 분이 누구건 상관은 없다.

다만 그런 대단한 행차라면 당연히 요란스러운 행렬이 지날 것이고,

그런 날은 귀신처럼 거리에 노점상들이 몰려들었다.

화려한 행렬 구경을 하느라 몰릴 인파들을 상대로 장사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 기회는 쓰촨의 구석인 민강에서는 흔치 않았다.

그럴 때면 왕호가 이끄는 거지 아이들은 한쪽에서는 구걸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소매치기해서 수입을 올리곤 했었다.

말하자면 간간이 생기는 ‘대목’이라고나 할까.

사정이 그러하니 왕호가 행차 소식에 예민한 것이고,

그런 사정을 잘 아는 차 포두도 넌지시 손을 내밀어 정보거래를 하는 것이다.


” 초 공공께서 다음 주쯤 도착할 게다.

그때는 너희들이 알아서 가까운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 지내든지 해야지,

그때 저자에서 너희 거지들이 보이면 알지?

다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가는 게야. “

어차피 그리되지는 않을 것을 알면서도 차 포두는 짐짓 으름장을 놓는다.

”거 무슨 섭섭한 말씀을요.

알겠습니다요.

그 기간에는 저희 꼬마들도 다 온전한 옷을 입혀서 말끔하게 바꿔놓지요.

아무튼, 포두님께 폐를 끼치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


초 공공?

흙바닥에 누워 몸을 웅크리고 있던 치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다른 거지 아이들과는 조금 달라 보이는 치우를 흘깃 보던 차 포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아이인가 싶었다.

치우는 모른 척하며 왕방의 앞에 놓인 구정물 같은 죽을 갑자기 당겨 마신다.

그 꼴을 본 차 포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 위로 올라갔다.


수취교 위로 어둠이 내리고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떠올랐다.

다리 아래 구석에서는 작은 모닥불이 타닥타닥 불꽃을 피워올리고,

그 위에는 정체 모를 고기들이 꼬치에 끼워져 구워지는 중이다.

작은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어른 하나와 아이 셋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었다.

말없이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던 더벅머리 어른이 입을 열었다.


” 야 인마. 왕위! 어서 꼬치를 돌려. 다 타버리면 어쩌려고 그러냐?

네 손이라도 넣어 구워버릴까? 엉? “


살벌하게 구는 왕호의 말에 더 뜨거라 싶은지 꾸벅꾸벅 졸던 왕위가 벌떡 일어나 모닥불 위에서 기름이 자글거리던 고기를 빙글 돌려 반대편으로 돌렸다.

불빛에 비친 왕위의 눈두덩이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그 옆에는 왕방이 눈덩이와 콧등이 퉁퉁 부어서 거의 보이지도 않을 눈으로 불길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고,

그 옆으로는 치우가 화상을 입은 얼굴에서 진물이 흐르는 것도 모르듯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아이들의 몰골을 둘러보던 왕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잘 들어.

너희들과 나는 개방도이긴 하지만 흔히 말하는 무림의 개방은 아니다.

굳이 따진다면 개방파의 이름을 빌려 쓰는 거지들이라고 할 수 있지.

물론 공짜는 아니다.

사천 분타에 꼬박꼬박 사용료를 바치곤 있지.

하지만 그뿐이다.

우리가 개방의 이름을 피 같은 돈을 내가며 쓰는 건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려는 비용이지,

무공 한 가닥 배운 적도 없고 우리에게 관심도 없는 개방파와는 진짜 거리가 멀다 이 말씀이야.

너희들이 어리긴 해도 오래전 춘추시대에 공자님과 연을 맺은 범단 范 丹 님이 개방의 계파조사라는 것은 들어본 일이 있을 게다.

알고 보면 조사는 무슨······. 아무튼 흔하디흔했던 거지들을 모아서 단체로 만든 게 그 양반의 공이지.

하지만 그 이후로도 전 중원에 걸친 조직은 아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명나라를 세우신 주원장께서 한때 개방에 몸을 의탁한 적이 있어서,

비로소 우리가 구파일방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치 세력에서 밀려난 고관집 파락호들이 나름 세력으로 만든 게 개방의 무파 라고 한다면 근본부터 그냥 거지들인 우리는 그냥 개방 이름에 숨어 사는 그저 거지일 뿐이야.

즉, 무파는 드물고, 그중에서 협이니 정의니 를 내세우는 개방의 무파는 더더욱 드물다.

드물 뿐만 아니라 그들도 반드시 뭔가 대의명분이 있어야만 나서곤 하지.

알게 모르게 그들도 관과 협력하는 처지기도 하니 말이야.

우리 같은 조상 대대로 거지인 놈들과는 아예 씨가 다르다.

그러니 터무니없이 협이니 정의니, 따위 한 번만 더 입에 올리면······. 알지? “


사나운 왕호의 눈길이 세 아이를 훑고 지나자,

왕방과 왕위의 때에 절은 작은 어깨가 움찔했다.

그들은 낮에 차 포두가 말한 옆 동네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거지 아이를 안다.

그는 왕민이라는 이름으로 그들과 함께 구걸하던 거지 아이였다.

그가 어느 날 동냥 받은 은자를 몰래 숨겼다가 왕호에게 끌려나가는 것을 두 아이는 보았었고,

그 이튿날부터 아이가 보이지 않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왕민이 옆 동네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것은 몰랐었다.

사연은 몰라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두 아이는 안 그래도 무서워하던 왕호가 정말로 무서워졌다.

부모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던 그들에게 나란히 왕씨 성을 붙인 이름을 지어준 게 왕호였다.

단순하게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왕’ 씨 성을 가졌다는 단순한 이유였었다.

한 끼 챙겨 먹기도 어려운 거지 아이 처지에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두려웠다.

근본도 모르고 장래도 없는 신세지만, 어른 거지에게 맞아 죽어 발견되는 건 싫었다.

왕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는 치우는 또렷한 눈동자로 왕호를 바라보았다.

치우와 눈길이 마주친 왕호가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연다.


” 너,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원래대로 라면 실컷 두들겨 패고 내쫓길 몸이지만 네놈 운이 좋네.

조만간 초태감님의 행차가 있다고 하니 그때 우리를 도와라.

마침 왕민의 자리가 비었으니 네놈이 대신하면 되겠네.

너 이름이 치우라고 했던가?

넌 내일부터 왕 치우다. 그 이름으로 이 애들한테 구걸하는 법을 배워라. “


” 싫소. 난 강치우 요.

거지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 뭐? “


왕호의 얼굴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떠오르더니 이내 눈꼬리가 확 치켜 올랐다.


” 아니. 이 애새끼가 간신히 목숨 붙어있는 줄도 모르고······. 감히. “


주먹을 쥐고 몸을 일으키려던 왕호는 이어지는 치우의 말에 다시 바위 위로 앉았다.


‘ 어차피 이래 되었으니 내가 누군지 말씀드리죠.

나는 서안에서 왔소. 서안의 ’ 강룡금장 ‘ 이 내 집이오.”


치우의 말을 들은 왕방과 왕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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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추종 追從 +2 20.05.26 526 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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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강시독 20.05.24 513 5 10쪽
17 녹죽장 20.05.23 527 4 10쪽
16 강시당 20.05.22 551 5 9쪽
15 관제묘 20.05.21 583 7 10쪽
14 역모 20.05.20 588 5 10쪽
13 고문 20.05.19 586 7 9쪽
12 동창 20.05.19 634 10 9쪽
11 탈출 20.05.15 635 5 10쪽
10 합의 20.05.15 654 8 9쪽
9 용모파기 20.05.14 681 8 10쪽
8 기록 20.05.14 714 7 10쪽
7 함정 20.05.13 753 7 9쪽
6 지하통로 +1 20.05.13 815 7 9쪽
5 습격 +1 20.05.12 920 8 12쪽
» 명분이 없다 +1 20.05.12 988 11 9쪽
3 협의 +1 20.05.12 1,052 13 9쪽
2 +1 20.05.12 1,349 19 10쪽
1 구원 +4 20.05.11 2,301 5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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