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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능선의 서재입니다.

구걸왕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좌능선
작품등록일 :
2020.05.11 12:25
최근연재일 :
2020.09.11 10:30
연재수 :
8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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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21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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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44,307

작성
20.05.1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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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합의

DUMMY

치우는 태어나 처음 겪는 극렬한 통증에 거의 정신줄을 놓다시피 했다.

천리속달에 숨어 타고 낯선 쓰촨으로 올 때만 해도 세상에 그보다 더 큰 고통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내달리는 마차에서 구역질과 함께 밀려오는 격렬한 멀미는 며칠을 굶어도 차라리 다행일 지경이었으니까.

오죽하면 무림인의 몸값이 비싼데도 굳이 마부를 무림인으로 세웠을까.

하지만 그때 고통과 비교하면 지금 겪는 고통은 또 차원이 다른 것이다.

천리속달로 인한 통증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느낌이라고 비유한다면,

얼굴에 불이 붙어서 타오른다는 것은 살을 깎아내는 아픔이었다.

게다가 화기, 타오르는 불길의 화독이 숨 쉬는 기도까지 침범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치우는 근처 객주 입구에 있는 구정물통을 발견하고 그곳에 머리를 통째 디밀어서 불을 껐다.

순간적인 기지로 치우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조금 더 불길이 타올랐다면 얼굴과 목의 화상이 아니라,

한쪽 눈을 잃었거나 기도가 타버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으니까.

머리카락 일부도 탔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구정물에서 얼굴을 든 치우는 아직 누군가 모를 적으로부터의 공격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사방에서 엉뚱한 사람들이 불덩이를 뒤집어쓰고 비명을 지르는데,

시장판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그게 치우에게는 기회여서, 치우는 사람들이 몰려 도망치는 사이에 끼어서 근 한 시진 이상을 달음박질쳤다.

사람들이 뜸해진 이름 모를 뒷골목에 이르러서야 치우는 간신히 숨을 골랐다.

하지만 며칠간 천리속달에 시달리고,

갑자기 중화상을 입은 상태로 한 시진 넘게 달리기를 했던 치우의 몸에 한계가 왔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세 명의 거지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치우의 말을 들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왕호는 곰곰이 다른 생각에 빠졌다.

어제 현청 근처 시장판에서 원인 모를 폭발로 불이 났었다는 것은 이야기 들은 적 있었다.

그 사건으로 시장 상인들과 행인들 다수가 화상을 입고 시장의 상점 일부가 불탔다는 것도.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큰 사고가 났었는데도 어째 알고 지내던 현의 포두들도 그 사건에 대해서는 입을 뻥끗하지 않아 이상하던 참이다.

이유도 모르겠고 좀 황당한 이야기이기는 해도,

짐작하건대 저 앞에 앉아있는 시건방진 꼬마가 말한 대로라면 저 꼬마는 강룡금장의 자식임이 칠팔 할은 분명할 터였다.

그렇다면 저 꼬마 말대로 강룡금장에서 보상을 받을 일이 아니라고 해도,

뭔가 저 꼬마가 돈이 될 구석은 있는 것이다.

꼬마가 말한 대로 꼬마를 도와주고 보상을 받던지,

아니라면 꼬마를 관에 넘기면 또 현상금이 걸려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치우라는 꼬마의 말을 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대,

강룡금장은 어째 끈 떨어진 연 같은 신세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게 아니라면 수 대에 걸쳐 부와 권력을 이어온 강룡금장의 금지옥엽이 저리 쫓겨가며 얼굴에 화상까지 입고도 관에서까지 수배를 당할 지경일 수 있을까.

그런 끈 떨어진 연을 도왔다가 거꾸로 땡전 한 푼 건지지도 못하고 오히려 날벼락을 맞는 건 아닐까.


또 한편 반대로 생각해 보면,

썩어도 준치고 부자가 망해도 삼대를 간다는 말이 있듯이 저 꼬마가 누구도 모를 돈줄을 어딘가에 묻어 두었을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그 꼬마가 말한 선대의 기록에 의하면 개방 쓰촨성 지부에 가서 도움을 받으라는 글귀가 있었다고 하지 않은가.

두루두루 얽힌 모양새가 그야말로 난형난제 難兄難弟 첩첩산중 疊疊山中이 아닐 수 없다.

늘, 그 무엇보다도 돈을 더 벌 수 있는 일에 가장 크게 관심을 두고 살아온 왕호에게는 정말 선택하기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가 왕위와 왕방 같은 거지 아이들을 부리고 있는 이유도 돈에 죽고 사는 그의 평소 가치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고만한 또래 아이들은 은밀히 노예시장이나 남색을 즐기는 무리에게는 인기가 있어서 팔아먹으면 돈이 될 터였다.

어차피 개방의 거지로 받아들일 아이들은 사방에 흔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보다는 녀석들이 앵벌이로 꾸준히 벌어오는 것이 자신에게 더 이익을 가져다주는 이유로 녀석들을 거두고 있다.

만약, 그 아이들의 몸값이 좀 높았었다면 망설임 하나 없이 이미 팔아치웠을 왕호였다.

그런 타산적인 왕호의 생각에,

치우는 어떤 식으로든 돈벌이가 될 아이로 보이기는 하지만 뭔가 잘못 손대면 봉변을 당할 소지도 많은 사고뭉치로 보였다.


왕호는 어쩌면 이것이 자신의 거지 인생 이십여 년에 처음으로 찾아온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속셈을 굴렸다.

분명 저 녀석을 현청에 끌고 가면 뭔가 사례를 받게 되겠지만,

그 액수가 클지 어떨지는 미지수인 데다가 만약 저 꼬마 말대로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진짜로 역모 어쩌고에 얽혔다면 자칫 자신의 목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게다가 놈을 인신매매 업자에게 넘겨봐야 큰돈이 될 리도 없다.

원래는 제법 곱상한 얼굴이었겠지만 화상을 입은 얼굴에 진물이 흐르고 있는 꼬마를 누가 비싸게 쳐줄 것인가?

그렇다면 일단은 놈이 지하통로의 기록과 부친한테서 들었다는 가문의 비사를 믿고 쓰촨성 지부에 가보는 게 어떨까?

어쨌든 놈의 숨겨져 있을지 모를 재산에도 군침이 당겼고,

만에 하나 놈이 빈털터리라고 해도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강룡금장의 지하통로 동굴에는 분명히 값비싼 야명주가 무슨 호롱불처럼 흔하게 박혀있을 터였다.

그것들만 손에 넣는다고 해도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다만, 그곳에 접근하려면 당연히 저 꼬마가 있어야 하고,

뭔가 지부의 간부들이 알아서는 안 될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자고로 명예는 함께 나눠도 돈벌이는 혈족이라도 나눠서는 안된다는 게 왕호의 지론이었다.


“ 좋아. 강룡금장의 도련님.

네 말을 일단은 믿기로 하지.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우린 자선사업을 하는 게 아니야. 그냥 거지라고.

개방에 연결이 되어있긴 하지만 개방도로 딱히 혜택 보는 건 없다.

그러니 내가 이곳의 생업을 접고 먼 지부까지 행차 한다면 거마비가 제법 든단 말이지.

더구나 너, 진위는 몰라도 관에서도 쫓기는 반역도당 아니냐?

게다가 정체 모를 자들로부터 공격도 당하고, 아주 위험한 길이 될 거거든.

어쩔 테냐? 우리가 왜 너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말해봐. ”


돌연 사납던 분위기를 넉살 좋게 바꾸며 갑자기 은근해진 왕호의 청산유수 같은 말에 왕방과 왕위는 기가 막혔다.

생업이라니.

구걸도 생업에 속하는 것이라면, 구걸이야 가는 길 어디서도 할 수 있는 건데.

그리고 국법을 어기거나 죄를 지은 자들이 개방도로 변해서 숨어있는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라,

자신과 같은 꼬마 거지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 물론, 처음에는 개방의 협을 믿고 말씀드린 것이오.

하지만 두목의 말처럼, 내가 내 개인의 사정을 대책 없이 댁들에게 떠넘기는 건 좀 뻔뻔한 수작이란 것은 깨달았소. ”

그렇지 그렇지 하며 왕호는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구먼. 역시 명문가의 독자라 제법 현명해, 라고 주절거리며.

“ 그래서 말인데, 내가 들은 바로는 내 선조께서 기록해 놓은 개방의 인물은 짐작하건대 꽤 높은 직위에 머무는 분이 아닌가 싶소.

물론 지금 여기서 말을 꺼낼 수는 없소,

만약 그분을 만나기 전에 나와 당신들이 행여나 추적자에게 잡히거나 하면 그분마저 위험해질 테니까.

나만 알면 나 혼자 당하면 그만이니 나중에 지부로 가서 알려드리죠.

보상은,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없소.

하지만 내 듣기에 지하동굴에 있는 야명주들은 한 알에 천금을 친다고 했으니,

내가 원하는 분을 만나게 되면 그곳의 지도를 당신에게 알려주겠소.

물론 개방에는 따로 말을 않을 것이고. ”


요것 봐라?

처음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천둥벌거숭이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눈치가 있고 셈이 빠르다.

역시 금장의 후손이라 이건가.

생각은 하고 있지만 자기 입으로 꺼내기 좀 민망한 말들을 먼저 해주니 저 꼬마가 갑자기 마음에 썩 들었다.

개방의 협 어쩌고 할 때는 물정 모른다 싶었는데 몇 대 얻어맞고 나니 금세 눈치가 빠삭해지는 게 꽤 괜찮은 동업자로 가능해 보였다.


“ 두목, 그렇지만 그곳 동굴에는 야명주가 꽤 많다고 했는데 그걸 다 차지하는 건 너무 하잖아요? 치우와 나누는 게 합당하지 않을···.”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왕방이 불쑥 나섰다.

순간 왕호의 나름 온화해지던 얼굴에 노기가 치미며 더러운 발이 왕방의 복부를 걷어찼다.

“ 악!”

무심코 입바른 소리를 꺼내다 공격을 당한 왕방은 서너 걸음 거리를 튕겨 나가서 흙바닥에 굴렀다.

입가에서 피가 흐르는 게 다시 상처가 터진 모양이다.

“ 야, 이 걸귀야. 어디 감히 두목의 사업에 끼어들어?

죽고 싶냐? 엉? 너도 왕 민처럼 만들어줘? ”

왕호가 제 성질을 못 이겨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찾아온 돈벌이에 흥분해서 주변에 꼬마 거지들이 있는 것을 깜빡했던 자신에게 더 화가 난 것이다.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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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추종 追從 +2 20.05.26 526 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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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강시독 20.05.24 512 5 10쪽
17 녹죽장 20.05.23 526 4 10쪽
16 강시당 20.05.22 550 5 9쪽
15 관제묘 20.05.21 582 7 10쪽
14 역모 20.05.20 588 5 10쪽
13 고문 20.05.19 586 7 9쪽
12 동창 20.05.19 634 10 9쪽
11 탈출 20.05.15 634 5 10쪽
» 합의 20.05.15 654 8 9쪽
9 용모파기 20.05.14 681 8 10쪽
8 기록 20.05.14 714 7 10쪽
7 함정 20.05.13 752 7 9쪽
6 지하통로 +1 20.05.13 814 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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