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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능선의 서재입니다.

구걸왕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좌능선
작품등록일 :
2020.05.11 12:25
최근연재일 :
2020.09.11 10:30
연재수 :
87 회
조회수 :
39,835
추천수 :
460
글자수 :
344,307

작성
20.05.1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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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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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글자
9쪽

지하통로

DUMMY

“ 안돼! ”

눈을 감고 가쁜 숨을 쉬던 아버지가 벌떡 반신을 일으키며 치우의 바짓자락을 잡았다.

“ 네 이놈. 아비의 명을 거역할 테냐.

네가 이리 나온다면 나는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겠다.

정녕 아비의 말을 듣지 않겠느냐? ”

머리에서부터 피가 흘러 손목까지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가 그리 말하자 치우는 어쩌지도 못하는 상태로 멈췄다.

“ 시간이 없다. 어서 가! 어른의 일은 어른이 해결할 것이다.

분명한 건 지금 내게도 네게도 대화를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니······.”

점점 기운이 다해가는 목소리로 힘없이 부여잡은 바짓자락을 놓는 아버지.

안타까와하는 치우에게 유화부인이 단호하게 다시 말했다.

“ 어서 가라.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라. 나는 괜찮다. ”

망설이던 치우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쓰러져 있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피가 솟는 머리를 한쪽 손으로 덮고 있는 어머니에게 묵례하곤 안채로 뛰어들었다.


비고. 秘庫

강룡금장의 안채에는 혈족만이 알고 있는 비고가 있었다.

문자 그대로 보면 비밀스러운 금고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강룡금장의 비고는 비밀통로의 입구였다.

장원은 야트막한 산을 등에 지고 앞에 작은 개울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형태의 땅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배치된 전각들의 중앙 후면에 살림하는 안채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안채에서도 깊숙한 안쪽에 가문의 장서를 보관하는 장서각이 있는데,

그 장서각 안에 비고가 숨겨져 있다.

치우는 눈물을 훔치며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었다.

어차피 부모님이 다그쳐 먼저 도망가는 것.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군지 모를 적도들로부터 비고의 입구를 들키지 않는 것이다.

장서각을 향해 달리는 치우의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등 뒤로 화광이 충천한 가운데 아직도 여기저기서 폭발하는 소리와 비명소리,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멀리 들려온다.

치우는 장서각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았다.

바깥채와 안채 입구가 불길로 덮여 아비규환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 소동에 장원의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거나 불을 끄러 갔는지 안채에서 장서각에 이르는 동안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치우는 장서각에 들어섰다.

장서각의 입구에는 서각 내부에서 사용할 수 있는 등롱과 부싯돌이 있었다.

등롱을 켜니 서각 내부에 가득 찬 책꽂이들이 보이고,

특유의 나무 향과 벌레를 막는 약초의 냄새,

수천 권에 이르는 책자들의 종이 냄새들이 가득했다.

장서각에 들어선 치우는 등롱을 앞에 들고 부친이 이전에 한 번 보여주었던 비고의 입구를 찾아 더듬었다.

좌우 폭으로는 다섯 개, 깊이로는 열두 개가 늘어선 책꽂이는 책꽂이 간의 거리가 장정 두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넓었다.

등롱 불빛이 책장들에 그림자를 기괴하게 드리우고 있는데,

바깥채와 안채의 소란함과 불빛들이 장서각의 창문으로 드문드문 들어온다.

치우가 눈물을 훔치며 걸음을 옮겼다.

왼쪽으로 세 번째.

거기서 앞에서 아홉 번째 책장.

치우는 책장 앞에 쭈그리고 앉아 책장의 맨 아래 칸에 박힌 나무못을 돌렸다.

단단하게 박혀 있을 것 같은 나무못은 최근까지 손을 보았는지 의외로 쉽게 돌아가고,

몇몇 개의 나무못은 완전히 뽑히지는 않고 살짝 걸쳐진 형태가 되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치우는 폭이 일곱 자쯤 되는 거대한 책장의 왼쪽 모퉁이를 밀기 시작했다.

무거운 책장은 치우가 힘을 쓰자 의외로 가볍게 돌아갔다.

기기긱 소리를 내며 책장이 빙글 돌아가자,

책장이 덮고 있던 마루판 아래로 뚫린 검은 통로가 열렸다.

갇혀있던 지하의 공기들이 훅하니 장서각으로 올라왔다.

치우는 등롱을 앞세우고 조심스럽게 지하로 열린 구멍 속 계단을 밟았다.

짙은 어둠에 가득 찬 지하로 통하는 구멍 속에는 돌로 만들어진 계단이 놓여있었고 어른 두 사람의 키 정도로 깊었다.

계단 아래로 조심스럽게 내려간 치우는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계단의 우측에 드리워져 있는 굵은 밧줄을 찾아 힘껏 당겼다.

그그그 소리를 내며 치우가 돌려놓았던 책장이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치우가 들고 있던 등롱의 등불이 일렁이지 않고 조용히 타올랐다.

비고로 들어오는 입구가 완전히 책장으로 덮인 것이다.

공기의 흐름이 차단되자 정신없이 일렁이던 등불이 조용히 타오르며 지하 통로를 비췄다.

지하 통로는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덜 다듬어진 자연석이 쌓여 동굴처럼 만들어진 흙냄새가 가득한 공간.

이곳에 내려온 이상 끝까지 가야 했다.

전에 아버지와 함께 내려와 본 적은 있지만, 굳이 이 지하 통로를 통해 길게 가보진 않았다.

다만 그때 아버지가 엄숙한 얼굴로 치우에게 했던 말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들었다.

장서각의 비고는 가문 최후의 수단이라고.

그런 일이 없을 것이고 없어야 하지만,

만에 하나 가문에 정말 위급한 상황이 생기고 달리 벗어날 길이 없을 때,

비고를 사용해야 하며 그런 이유로 비고에 대한 위치와 들어서는 방법은 오직 가문의 직계 혈족만 알 수 있다고 말했었다.


정신이 없던 와중에 거의 본능적으로 비고를 찾아 내려온 치우는 비고의 입구가 닫히자 참았던 울음을 토해냈다.

아무리 의연하듯 하더라도 결국은 어린아이.

어제까지만 해도 대갓집의 귀한 종손이던 몸에서 갑자기 뭔지도 모를 것으로부터 도망쳐 지하 통로로 피신을 한 상태.

게다가 얼핏 봐도 크게 다친 아버지와 그 아버지와 함께 남은 어머니.

불안감과 공포가 짓누른다.

외부의 아비규환이 들리지 않는 지하에 내려서자마자 치우는 일부 안도한 느낌과,

앞으로 어찌할지 모르는 당황함에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한참 흑흑하며 흐느끼던 치우는 무슨 소리에 쭈뼛 머리털이 곤두섰다.

쿵쾅대는 소리.

뭔가 우드드득 소리.

머리 위에서 거친 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 장서각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게다가 들리는 소리는 아주 희미하지만, 여러 사람의 발소리.

장서각 아래로 내려오는 통로 이외에는 빈 곳이 없으므로 발소리가 울릴 이유는 없다.

통로도 책장이 덮어버리기 때문에 사람 발소리로 쿵쿵 울릴 리 없는 것이다.

물론 상당한 거리도 있고 마루 두께도 상당해서 그들의 말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

치우는 바짝 긴장하며 흐느낌을 멈췄다.

아직 완전히 안전하지 못한 것이다.

치우는 행여나 싶어서 등롱의 불을 끄고 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이 걸어 내려온 계단의 맨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침입자들도 등이나 횃불을 들고 있는지 닫혀있는 계단 입구 틈새로 실낱같은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치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실낱같이 어른거리던 불빛들이 갑자기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비쳐들었다.

치우는 그것이 침입자들이 장서각에 불을 놓은 것이라는 걸 깨닫고,

서둘러 등롱에 불을 붙이려고 했다.

비고의 입구를 가리고 있는 것은 책장이고 책장은 나무로 만들어져있다.

병충을 막기 위해 값비싼 자단목으로 만들어져있긴 하지만, 어차피 바짝 마른나무다.

장서각에 불이 타오르면 순식간에 불바다가 될 것이고,

비각의 입구가 드러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 전에 도망치려면 서둘러야 했다.

비밀통로의 길이가 얼마나 긴지도 치우는 모르고 있었으니까.

등롱에 불을 붙이려고 부시를 계속 부딪치던 치우는 불을 피울 수 없었다.

머리 위 장서각에 불이 크게 붙었는지 어두운 터널 내부의 공기가 계단 입구로 무섭게 빨려 들어가서 일어나는 바람 때문에 등롱에 불이 붙지 않았다.

여러 차례 시도 끝에 불붙이기를 포기한 치우는 어둠 속으로 미친 듯 달려갔다.

어둠이 가득한 통로는 일직선으로 뻗어있지 않았다.

치우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 채, 갑자기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모퉁이 벽에 몸을 부딪치기도 하고, 발이 걸려 나뒹굴기도 하며 무조건 앞으로 뛰었다.

쥐가 있는지 이따금 뭉클 발에 뭔가 밟히기도 하면서 앞으로 뛰기를 한참.

어두운 지하 통로를 세차게 흐르던 공기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치우는 그것이 장서각이 거의 불타서 이제 불길이 잦아드는 때문임을 깨닫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제 더 머뭇거릴 수 없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치우는 더듬거리며 주머니에 든 부싯돌을 꺼내 본능적으로 부딪쳤다.

손도 보이지 않으니 순전히 감으로 돌을 부딪치다 손등이 부싯돌에 맞아 피가 흘렀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부시깃에 불이 붙었다.

짙은 어둠 속에 적응된 치우의 눈에 작은 불꽃은 눈이 부시게 반가웠다.

등롱에 불을 댕긴 후 치우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온통 흙투성이 벽은 습기가 스며들었는지 물기로 번들대는데,

어디서 잃었는지 신고 있던 신발마저 없어진 것도 몰랐다.

지나온 통로는 빛이 휘어지는 곳에서 어둠으로 남고,

앞을 비춰봐도 깊은 어둠이 아직 도사리고 있었다.

가늠이 안 되는 공간과 깊이 때문에 치우는 자신이 얼마 동안 그 통로를 달리며 넘어지며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생존본능에 의지해 미친 듯 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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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추종 追從 +2 20.05.26 526 5 9쪽
19 어사 20.05.25 529 3 10쪽
18 강시독 20.05.24 513 5 10쪽
17 녹죽장 20.05.23 527 4 10쪽
16 강시당 20.05.22 551 5 9쪽
15 관제묘 20.05.21 583 7 10쪽
14 역모 20.05.20 588 5 10쪽
13 고문 20.05.19 586 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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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탈출 20.05.15 635 5 10쪽
10 합의 20.05.15 654 8 9쪽
9 용모파기 20.05.14 681 8 10쪽
8 기록 20.05.14 714 7 10쪽
7 함정 20.05.13 753 7 9쪽
» 지하통로 +1 20.05.13 815 7 9쪽
5 습격 +1 20.05.12 920 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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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협의 +1 20.05.12 1,052 1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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