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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능선의 서재입니다.

구걸왕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좌능선
작품등록일 :
2020.05.11 12:25
최근연재일 :
2020.09.1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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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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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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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구원

DUMMY

눈을 뜰 수가 없다.

어렴풋하게 의식이 돌아오긴 했는데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내가 누구이고 왜 지금 이렇게 캄캄한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한데 이것저것을 떠나 당장은 눈꺼풀이라도 밀어 올려야 할 텐데 눈꺼풀은 움직이지도 않고,

몸은 천근만근 꼼짝도 못 하겠고 감각이 없다.

돌덩이 같은 몸뚱이에 생각만 오간다는 것은 참 기이한 느낌이다.

왜, 내가 지금 이런 상태인지를 다시 생각해본다.

어렴풋한 기억속에 떠오르는 광경이 몇 가지.

어두운 밤이었고 사방에 불길이 치솟았고.

사람들의 비명이 밤하늘을 찌르는데 피비린내가 자욱했다.

꿈속에서 먼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얼레? 이 자식 또 기절했네?

동료들에게는 ‘소걸아 小乞兒 ’ 다른 사람들에게는 ‘ 소걸귀 燒乞鬼” 라 불리는 왕방은 그릇에 담긴 죽을 먹다 말고 잠시 꿈틀거리다 조용해진 아이를 바라보았다.

“ 그러게. 넌 니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마당에 왜 저딴 반 시체를 끌고 왔냐고, 그거 먹을 수도 없는걸 얻다 쓴다고. ”

왕방의 맞은편에 쭈그리고 앉아 왕방이 들고 있던 그릇과 비슷한 그릇을 후루룩 다 들이킨 왕위가 왕방에게 핀잔을 주었다.

왕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둘은 사실, 각자 몸 챙기기도 바빠 보이는 어린 거지에 불과했으니까.

그들이 지금 앉아있는 곳은 쓰촨성에서도 변두리에 속하는 곳.

쓰촨성 내에 있는 수백 개의 다리 중에서 거의 하수가 흐르는 무척 더럽고 냄새나는, 좋지 않은 곳이다.

그런 장소에서 구걸해온 죽그릇을 비우던 처지이니 왕위가 왕방을 탓하는 것이 매정해서가 아니란 것은 왕방도 안다.

하루 끼니라도 해결하려고 이곳저곳을 헤매다 객주에서 버리는 음식 찌꺼기를 구한 것은 운이 그런대로 좋은 날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자신들의 은신처인 ’ 수취교 獸臭橋‘라 불리는 다리 밑으로 오던 길에,

구정물이라는 표현이 맞는 개울가에 버려진 아이를 우연히 마주친 것은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각자 먹고살기도 바쁜 어린 거지 주제에 또래의 반죽음이 된 것으로 보이는 아이를 끌고 은신처로 돌아온 것은 순전히 왕방이었다.


아이는 머리도 헝클어지고 옷도 여기저기 찢긴 것이 뭔가 횡액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얼굴의 절반 정도에 심한 화상을 입어서 물집이 잡힌 상태였다.

그대로 두면 죽을지도 모를 판인데, 옷이 찢겨 드러난 팔다리에도 화상의 흔적들이 보였다.

자기 몸도 추스르기 힘든, 안 그래도 병약한 왕방이 그 꼬마를 질질 끌고 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왕위가 그 꼬마를 달갑지 않아 하는 것은 꼬마가 입은 옷이 비록 너덜대긴 했지만, 꽤 좋은 천으로 만든 옷이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멀쩡해 보이는 옷을 입었는데 불에 크게 다친 상태로 길가에 버려진 아이.

아무래도 길보다는 흉이 많은 사연으로 보였다.

안 그래도 하루 걸식으로 사는 것도 피곤한데 알지도 못할 사건에 끼어들면 좋은 게 없었다.

하다못해 옷이라도 멀쩡하면 내다 팔기라도 할 텐데 옷도 불에 드문드문 타서 쓸모도 없고,

그런 횡액을 당하고 언제 화상을 입은 자리가 감염되어 죽을지도 모르는 꼬마에게 호의를 베풀다니.

왕위가 보기에 나름 거지들 사이에서 독하다는 소리를 듣는 왕방 치곤 어딘가 마음이 좀 나약해 보이는 것이다.


“ 야, 소걸귀. 그러다 그 애 죽으면 또 어떻게 갖다 버리려고 그래?

공연히 우리가 그런 일에 말려들면 정말 재수가 없다는 거 몰라?

그 왜, 일전에도 저 건너편서 살던 거지가 죽어가는 사람 구해줬다가 그 인간을 쫓던 무림인들한테 팔이 잘렸잖아,

우리 몸 건사하기도 바쁜데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 석걸 石乞 ‘이라 불리는 왕위의 말에 방의 눈초리가 싸늘해지고 왕위는 순간 움찔했다.

“ 야, 돌 거치야. 너 우리가 그래도 명색 개방의 문도인데 어떻게 길가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모른 척하냐?

우리 개방의 가장 큰 문규 門 規가 뭐냐? 협 俠이잖아. 협. ”


왕 방의 말에 뭔 소린가 하며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왕 방과 쓰러져 있는 꼬마를 바라보던 왕위가 갑자기 배꼽을 잡고 웃으며 굴렀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으로 왕위를 바라보던 왕방은 그의 뜬금없는 파안대소에 어리둥절, 뭔 일인가 하고 바라보았다.

한참을 구르며 웃어대던 왕위가 캑캑대며 일어나자, 눈가에 눈물까지 흘렀다.


“ 야. 소걸아. 너 우리 대장이 우리가 개방의 문도라고 하는 말 정말 믿어? ”


왕위가 침을 뱉으며 하는 말에 거꾸로 왕방은 어리둥절할 판이다.


“ 뭐···? 그럼 우리가 개방 문도가 아니면 뭐야? 왕초가 그랬단 말야.

우리는 구파일방 중의 일방인 개방,

그중에서 쓰촨성 지부에 있는 분타중 열두 번째 지파라고 말야.

너두 함께 들었잖아? ”


왕방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는 말을 듣던 왕위가 다시 죽자고 웃으며 떼굴떼굴 구른다.

한참을 웃다가 다시 일어난 왕위의 눈에, 화가 잔뜩 난 왕방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이 보이자 왕위는 이크, 하곤 정색을 했다.


“ 야, 미안한데, 너 정말 순진하구나? 왕초가 아무리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해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냐? ”

“ 아니면? 아니면 뭔데? ”


당장 주먹다짐이라도 할 것 같이 흥분한 왕방을 달래며 왕위가 한참 늘어놓은 설명은 이랬다.


보통 무림에서 구파일방 九派壹幇 이라고는 한다.

구파는 아홉 개의 무림방파를 말함인데, 소림·무당·화산·곤륜·점창·공동·운산·청성·아미의 아홉 개 파와 일방은 개방 丐幇 파를 말했다.

그렇지만 그건 사람들이 대충 갖다 붙인 말일뿐, 불교 도교를 근본으로 하는 정파 중의 정파로 불리는 저 구대 문파들하고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파가 동급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단지 전 중원대륙에 걸쳐 가장 많이 퍼져 있는 게 거지들이고, 어디서나 홀대받고 목숨 부지하기 어려운 게 거지들이니 그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몇몇 무공을 아는 이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 개방파의 실체다.

하지만 무림방파들처럼 경제력도 없고 문벌이나 권력도 없는 거지집단이 그들처럼 뭔가 구체적으로 관례와 전통을 갖고 움직일 리가 있겠는가.

오직 숫자만 많을 뿐 하루 구걸해서 하루 먹고 살기도 바쁜 게 거지집단인데.

그런 거지들에게 들러붙어서 일종의 보호세를 뜯어먹는 세력들도 없지 않았다.

보통 거지들이 거의 전부 ’개방’이라는 이름으로 행세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착취와 협박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함이고,

중앙에 있는 실제 무력을 지닌 개방 총 타와 무관한 각지에 흩어진

분타들이라고 해도 실제로 구석구석 힘을 발휘하진 못하므로,

분타 아래에 산재한 헤아리기도 어려운 거지들의 집단은 스스로 ’지파‘라고 이름 붙이곤 어떤 일이 생기면 지파들끼리 모여서 집단의 힘을 발휘하곤 했다.

비록 무공과는 거리가 먼 지파의 인원들이라도 그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불을 지른다거나 온갖 수간을 안 가리고 역습을 하는 경우들이 많으므로 소위 개방파 이름을 걸면 무섭다기보다는 더러워서 피하는 무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라고 왕위가 다시 침을 튀기며 말했다.

” 우리 지파도 그래. 너, 우리 지파에 들어와서 무공이란 거 배워본 적 있어? 없잖아? 무공은 고사하고 한 끼 밥 구걸해 먹기도 벅찬데,

어쩌다 동전 몇 닢이라도 생기면 꼬박꼬박 왕초가 다 뺏어 가잖아.

그거 왕초가 쓰는 건 아주 일부고 고스란히 모이고 모여서 결국 사천분타로 가는 거라고.

즉, 방파 소리를 들으려면 돈도 있고 인물도 있어야 하는데 개방파의 돈과 인물은 최소한 일개 성의 분타 정도는 되어야 갖추고 있다는 말이지.

말하자면 우린, 그냥 개방 이름을 빌려서 먹고살고 그러면서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자금을 앵벌이 하는 역할까지 다 이거야. “


장시간 쉬지 않고 말을 늘어놓은 왕위가 때가 꼬질꼬질한 호로병 박의 주둥이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다.

한동안 침묵을 하고 있던 왕방이 좀 맥빠진 얼굴을 하고 입을 연다.


” 그러면? 그러면 협은 뭔데? 우린 평생 앵벌이로 끝나는 그런 거야? “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묻는 왕방이 안돼 보였던지 왕위가 좀 낮아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 내 말은, 개방파가 협을 찾는다고 해서 우리 아무런 힘도 없고 미래도 없는 촌구석 거지들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는 거지.

물론 개방 총타에서도 이따금 후기지수를 키우기 위해 전국을 돌며 재능있는 방도들을 찾는다는 얘기는 들었어.

그런데 사실 그것도 최소 총타쯤 되는 곳에 연결된 아이들이 해당하는 거지.

말이 거지일 뿐 분타나 총타에 있는 무공을 지닌 방도들은 옷차림만 허름할 뿐이지 구걸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각자 재산들도 꽤 있다고 하던데.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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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추종 追從 +2 20.05.26 526 5 9쪽
19 어사 20.05.25 528 3 10쪽
18 강시독 20.05.24 512 5 10쪽
17 녹죽장 20.05.23 526 4 10쪽
16 강시당 20.05.22 551 5 9쪽
15 관제묘 20.05.21 582 7 10쪽
14 역모 20.05.20 588 5 10쪽
13 고문 20.05.19 586 7 9쪽
12 동창 20.05.19 634 10 9쪽
11 탈출 20.05.15 635 5 10쪽
10 합의 20.05.15 654 8 9쪽
9 용모파기 20.05.14 681 8 10쪽
8 기록 20.05.14 714 7 10쪽
7 함정 20.05.13 752 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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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습격 +1 20.05.12 920 8 12쪽
4 명분이 없다 +1 20.05.12 987 11 9쪽
3 협의 +1 20.05.12 1,052 13 9쪽
2 +1 20.05.12 1,349 19 10쪽
» 구원 +4 20.05.11 2,301 5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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