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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고래 님의 서재입니다.

마법사로서 살아가는 방법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노랑고래
작품등록일 :
2024.02.09 05:46
최근연재일 :
2024.03.2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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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3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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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고블린 전쟁의 서막

DUMMY

[메레이라 대륙에서 살아가는 법] 스물두 번째 이야기






마르-하르-아시르.

고블린의 리더.

일족의 브레인이자 가장 간악한 전사. (고블린에게 간악하다는 말은 극찬이다.)

그가 고민에 빠졌다.


‘식량이 없다.’


마키아 시 서쪽을 휩쓸어 온 지 5년. 먹을 만한 건 다 집어삼켰다.

육식, 오로지 육식을 거듭하던 시절이 좋았지, 지금은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손이 나갔다.

지금 모닥불을 둘러싸고 있는 저 부하들을 보라.


“내 거야, 이리 내.”

“무슨 소리 내가 망을 봤잖아.”

“도토리를 딴 건 나라고, 이 자식아.”


지들이 다람쥐도 아니고, 도토리 갖고 싸우고 있네. 어휴.

고블린 체면이 말이 아니다.

2년 전에 인간들이 커다란 문을 닫아건 후로 늘 이 모양이었다.


마음이 답답해서 동굴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일족은.

주식이었던 인간들은 성벽 안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는다.

간간이 나오기도 했다.

성 밖에서 깨작대며 땅을 파는 인간들을 습격할라치면 종소리가 울렸다. 종소리에 놀란 인간들이 순식간에 성벽 안으로 사라졌다.

성벽 쪽으로는 나가봐야 매번 허탕이었다.


인간들이 거대한 석조 둥지로 철수하면서, 많은 먹이를 잃었다. 인간들이 기르는 가축을 잡아먹을 수 없었고, 인간이 키우던 작물을 맛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두 번의 겨울이 갔고, 다시 또 겨울이 왔다. 산양도 사슴도 토끼도 씨가 말랐다.

새로운 뭔가를 사냥하지 않고서는 수천으로 불어난 고블린 일족을 먹여 살리기가 너무 어렵다.


‘하루에 멧돼지 열 마리는 잡아야 하니.’


숲과 들이 버텨낼 수가 없다.

들판과 숲속에서 잡아먹을 동물들은 거의 다 잡아먹었고, 이제는 먹이를 두고 회색늑대들이랑 싸움을 벌이는 판이다.


‘어떻게 이 겨울을 넘겨야 하나.’


고블린 리더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저 먼 아래쪽을 망보고 있던 부하 하나가 그를 불렀다.


“두목, 저기 말과 사람이 있습니다.”


뭐라고?

먹이가 있다고?

정말이었다.

저 멀리 희끄무레하게 움직이는 건 인간 두 명과 드워프 둘, 말도 두 마리.

여섯은 성을 떠나 숲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놓칠 수 없다.


“북을 울려라. 사냥의 시간이다!”


숙련된 리더 마르-하르-아시르는 일족들을 둥지에서 불러냈다. 마르-아시르의 지휘를 받은 고블린 떼가 산을 내려갔다. 새되고 단절적인 고함을 질러대면서.


“축제, 축제!”

“고기, 고기!”


노약자와 여자를 제외한 모든 고블린들이 사냥에 나섰다. 전부 몰려갈 필요는 없는데, 신이 너무들 났네.

확실하게 힘을 보여주는 것도 좋겠지.


인간들은 겁이 많다.

숫자 앞에 지레 겁을 먹고 항전을 포기하는 한심한 피식자들이다.

2천 여 마리에 달하는 고블린들이 산을 새까맣게 덮었다.



***



주변 지형은 작전계획을 세우며 봤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이트는 걱정했던 만큼 꼴통은 아니었다. 루밀레코 마냥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타입은 아니었다.

결정은 자기 마음대로 했어도 강압적이진 않았다. 나는 나 너는 너, 라는 행동 방식이 익숙해 보였다.


‘나름 합리적인가.’


안드레이프는 적이 마음이 놓였다.


‘큰일은 안 날 거다.’


자이트가 주변을 돌아보러 간 사이, 성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눌러앉았다.

여기라면 안전했다. 아직은.

못 했던 수업이라도 조금 해 볼까.

올던과 막심을 불러놓고 정령술의 기본훈련을 했다.


막심은 물의 정령 소환은 쉽게 해냈어도, 바람정령을 불러내는 걸 어려워했다. 막심의 바람정령은 자꾸 손 밖으로 도망갔다.


“어렵네요.”

“바람정령은 장난기가 많아. 어느 정도 눌러줄 필요가 있어.”


음.

막심은 정령들을 정적인 존재로 받아들이는 단점이 있었다.


‘끝없이 순환하고 움직이는 존재들이 정령들인데······.’


감각을 바꾸기 위해 의식적으로 계속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첫 실습치고는 무난한 편이었다.


올던에게는 알아서 정령들이 모여들었다.

손끝에서부터 팔꿈치까지 물의 정령이 열을 지어 서 있었다.

반대쪽 팔에는 바람정령들이 미끄럼틀을 타고, 개중에 하나는 올던의 팔목에 드러난 솜털을 노렸다. 뽁, 뽑아냈다.


“앗, 따가워.”


‘신기하네. 어딜 봐도 평범한 꼬마인데, 정령들이 잘 따른단 말이지.’


올던은 갈고 닦을 맛이 나는 원석이었다.

정령술에 한해서는.

우선 여기를 살아 나가야겠지만.


먼저 이변을 눈치챈 건 막심이었다.


“스승님, 저기 산사태가 났나 봐요.”


올던이 무심하게 덧붙였다.


“바위라도 쏟아지나.”


안드레이프는 막심이 가리킨 곳을 쳐다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산사태가 아니었다.

저건.


쏟아져 나온 고블린들이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안드레이프는 자이트를 찾으러 숲쪽으로 다가갔다. 저 멀리 자이트가 보였다. 자이트는 평화롭게 말을 몰고 있었다.

멀리서 소리쳤다.


“돌아가야 하오.”


자이트는 고개를 젓고는 말을 멈춰 세웠다.

저 인간이 왜 저러지. 저기 내려오는 놈들이 안 보이나. 안드레이프는 다시 한번 소리치고 산을 덮고 내려오는 고블린들을 가리켰다.


“저거 안 보이시오?”


자이트가 천천히 말을 몰아 안드레이프에게 다가왔다. 가면 안에서 자이트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왜요? 정찰기병 한 기만 있으면 고블린 토벌이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소.”


비웃는 건가. 안드레이프가 자이트의 눈빛 속에서 읽어낸 감정은 그랬다.

침착하자. 명목상 지휘권은 자이트에게 있다.


“정찰기병이 필요한 이유는 정찰을 하기 위해서지. 저런 숫자와 맞부딪히려는 게 아니오.”


후.

자이트는 한 번 웃고는 한가로이 말을 몰았다. 어쩌자는 건가.

자이트는 어쩌자는 말 대신 다시 한번 안드레이프를 비웃었다.


“그렇게 겁이 난다면 도망가시오.”

“그럼 당신은 저 숫자에 맞서 싸울 거요? ”

“잘 알고 있을 텐데? 우리는 마키아 시를 대표해 나온 거요. 후퇴는 없소.”


이 인간이 정신머리를 잃은 건가. 왜 미친 소리를 하는 거지.



***



자이트는 철저히 준비된 대본대로 움직였다.

가불기, 외통수, 체크메이트.

어떤 식으로 부르든 마찬가지다.

안드레이프가 어떻게 반응하든 그의 신뢰도는 오늘부로 끝난다.


도망가면 겁쟁이가 될 것이고, 맞서 싸우면 죽을 것이다. 자이트는 말을 몰아 유유히 사라질 거고.


문책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고 루밀레코는 말했었다.


안드레이프와 그 종자들이 죽는다 해도 상관없다.

내 목적은 토벌대가 살아남는 게 아니니까.

그들의 죽음은 곧 내 주인의 이익.


자이트는 뒤를 돌아봤다.

안드레이프와 두 꼬마녀석이 짐을 잔뜩 실은 말을 끌고 성문으로 향했다.


‘어리석은 짓을.’


서쪽 성문을 지키는 경비대원에게는 이미 말을 해 놓았다.


“오후에나 돌아올 거다, 푹 쉬다가 오도록.”


경비대원들은 술에 취할 것이다.

성문은 열리지 않을 거고. 문 열어줄 사람이 있어야 열리지.


그래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루밀레코에게 물어봤다.


“만약 경비대원이 제 뜻을 거스르고 문을 열어준다면 어떡합니까?”


자이트의 질문에 루밀레코는 대답했었다.


“그대로 사라지게.”


아하.

익숙한 희곡이군.

나머지 대사와 지문은 알 만도 하다.

나는 다시 한번 죽은 사람이 되는 건가?


칼 한 자루에 적당히 고블린의 피를 묻히고 근처 어딘가에 버려야겠군. 성벽 안의 겁쟁이들이 찾을지는 모르겠지만.

루밀레코가 알아서 하겠지.

누군가 ‘칼 한 자루의 증거’를 찾고 나면 안드레이프에게는 지휘자를 사지에 버리고 도망해 온 혐의가 씌워지겠지.

시민들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다, 그 당당했던 기사가 패잔병이 되다니. 그것도 지휘자를 버리고 도망을 쳐?


형벌이 선고 돼도 좋고, 아니어도 좋은 거다.

더 이상 마키아 시민 어느 누구도 안드레이프라는 이름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면.


자이트의 이름을 버리고, 나는 남쪽으로 쭉 내려 갈 것이다. 저 멀리 사라졌다가 계절이 바뀌면 이 마키아 시에 나타날 것이다.

또 새로운 가면을 쓴 채로.

자이트는 이 희곡이 재밌었다. 무료한 인생에 이 정도 재미는 있어야지.

다음 역할이 궁금했다.


‘제 3막에서는 어떤 인물로 등장할까?’


용병대장, 경비대장, 다음에는 기사단장 정도 되려나?


자이트는 안드레이프가 희미하게 보일 때까지 숲으로 말을 달렸다. 용맹하고 무모한 경비대장으로서 마지막 모습을 연출하며.

이 희곡을 제대로 상연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블린 한 마리를 베어야 했다. 고블린의 피에 젖은 검은 이 연극의 중요 소품이니까.


자, 이쯤이면 됐다.

이제 보자.

우리의 조연 안드레이프 씨는 어쩌고 있지?

저런, 서쪽 성문으로 향하고 있네?



***



안드레이프는 자이트의 속셈을 정확히는 몰랐다. 그래도 감이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우선 서쪽 성문으로 가봤다. 올던과 막심이 성벽 위를 올려보며 소리쳤다.


“파수꾼이 안 보여요.”


심상하게 대꾸해줬다.


“밥이라도 먹으러 갔나 보다.”


파수꾼 역할을 맡은 경비대원들은 돌아오지 않을 거다. 올던과 막심이 소리쳐 경비대원들을 부르게 두고, 해안지형을 돌아봤다.

남쪽 성문으로 돌아들어 가도 됐다. 고블린들이 산을 내려오는 시간동안 남쪽으로 내려간다면, 충분했다.

그렇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혼자 정벌에 나선다고 할 때부터 그리던 그림이 있었다. 자이트가 이탈한 지금이 기회일 수도.


‘역시 저쪽으로 가야겠지.’


마키아 시에서 해안선을 따라 오르다 보면, 바다 쪽으로 툭 튀어 나간 지형이 있었다.

그 끝 쪽은 좁은 삼각형 꼴이었다.


‘사람 살긴 어려워도 방어에 최적인 위치다.’


삼면이 절벽으로 막혀 앞쪽만 보면 됐다.

마키아 평야가 비스듬하니 아래쪽으로 펼쳐진 곳이기도 하다. 달려와서 접근하려면 힘도 빠지고, 위치도 다 보였다.

고블린들이 숲을 가로질러 나타난다 해도 비스듬한 평야지대를 몇 백 아르신이나 달려와야 했다.

그야말로 고블린을 상대하고 요격하기에 제격인 천혜의 요새.


‘시간 내에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애초에 저곳에 임시 방어진지를 설치하려고 했다.


안드레이프가 말을 끌고 앞서갔다. 고블린보다 먼저 저 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됐다.

시간은 충분하다.


“올던, 막심. 어제 연습했던 것을 보여주렴.”


임시기지를 위한 목책 방어선.

그리고 비장의 방어무기 몇 기.

고블린만 들이닥쳐서는 절대 뚫리지 않을 방어선을 구축해야 했다.

겁 없는 고블린들을 몇 잡아 기선을 눌러도 좋고.


자이트라는 경비대장은 자기들과 의견을 달리하고 돌진해 들어갔으니 알아서 하게 두고.



***



자이트는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 봤다.

없다.

이런 상황에서의 매뉴얼은 받은 적이 없다.

당황스러운 상황이군.

제 3의 선택이라니.

방어기지를 세운다고?


잠시 상황을 관망했다.

꼬마들과 마나공학자가 나무 망치로 말뚝을 박고, 뭉뚝한 끝을 갈아냈다.

매우 분주하고 바쁘게 움직였다.

지켜보다 보니 답이 나왔다.


‘저런 방식으로는 시간 내에 기지를 세울 수가 없다.’


저걸 세워서 언제 방어를 하나. 박아넣고 갈아 넣을 말뚝이 아직도 수도 없이 많은데. 자재도 부족할 거 같네.

저걸로 고블린들을 몇 마리 죽인다 해서 전부를 막아낼 순 없을 거다.

쯧쯧.

도망가는 게 빠를 텐데.


내 연기는 예정대로 한다.

조금 더 극적인 연출을 해도 괜찮겠지.

한 마리를 베고 달아나면서 나머지를 안드레이프 쪽으로.


굶주린 고블린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폐허와 잘 발려진 해골만 남는다지?

자이트는 숲 앞에서 고블린들의 떼를 기다렸다. 산에서 이제 막 출발했으니, 시간이 좀 걸릴 거였다.


‘기꺼운 마음으로 배달해 드리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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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마르-아시르의 결단 24.03.16 63 4 12쪽
34 The Hanged Man 24.03.15 57 7 12쪽
33 마법사의 상상력 24.03.14 61 4 13쪽
32 맥없이 물러나는 고블린 (수정) 24.03.13 66 8 12쪽
31 그는 좋은 추장이었습니다 +1 24.03.12 78 5 12쪽
30 타리우스의 소문 (2) +1 24.03.11 79 6 11쪽
29 타리우스의 소문 +2 24.03.10 96 9 15쪽
28 토성을 지켜라! (4) +3 24.03.09 105 12 12쪽
27 토성을 지켜라! (3) 24.03.08 115 9 12쪽
26 토성을 지켜라! (2) +1 24.03.07 111 6 13쪽
25 토성을 지켜라! +1 24.03.06 121 7 12쪽
24 고블린 전쟁의 서막 (3) 24.03.05 112 8 12쪽
23 고블린 전쟁의 서막 (2) +1 24.03.04 115 8 12쪽
» 고블린 전쟁의 서막 24.03.03 117 8 12쪽
21 낙하산 대장과 함께, 출정! +2 24.03.02 118 9 12쪽
20 혼자서도 괜찮습니다만? (3) +1 24.03.01 121 7 14쪽
19 혼자서도 괜찮습니다만? (2) 24.02.29 128 8 12쪽
18 혼자서도 괜찮습니다만? 24.02.28 140 8 13쪽
17 마도학과 무기술 24.02.27 156 9 13쪽
16 정령술에 능숙한 기사 24.02.26 147 11 12쪽
15 계획의 재구성 (5) 24.02.26 137 9 13쪽
14 계획의 재구성 (4) 24.02.25 148 9 12쪽
13 계획의 재구성 (3) +1 24.02.24 144 11 11쪽
12 계획의 재구성 (2) +4 24.02.23 152 12 12쪽
11 계획의 재구성 24.02.22 150 1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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